Return of a Crazy Genius Composer RAW novel - chapter (196)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196화(196/482)
현승은 드라마 OST 작업을 이어 나가던 중, 간단한 야식거리를 사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아까 그냥 점심 먹을걸.”
허기진 배를 달래며, 푹 눌러쓴 모자 너머로 먹을 만한 것들이 있는지 샅샅이 살펴 댔다.
그때.
투명한 비닐 재질의 포장마차 안으로 무척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터벅, 터벅-.
이내 현승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제 예상대로,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공은 박 전무였다.
평상시와 달리,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나 헤집어진 머리칼,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얼큰하게 취한 모양이다.
처음이다.
성미가 몹시 괄괄하고 어떻게 보면 표독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던 사람이, 빈틈 가득한 초식 동물처럼 처량히 앉아 있는 모습.
‘흐음-?’
현승으로선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쥐방울만 한 자식이 뭘 안다고….”
매번 날카롭게 날이 선 어투마저, 오늘따라 어리광이 섞인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결국.
해야 할 작업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기는 하지만.
“그런 김에 쥐방울만 한 놈한테 한 잔 따라 주시죠.”
현승은 결심한 듯,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새로 받은 술잔을 내밀었다.
쪼르르르륵-.
박 전무는 그런 자신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아무 말 없이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다행이도….
내심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쨍-!
애초에 현승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유흥 자체도 즐기지 않는 편이니까.
그저, 지금은 박 전무와 처음 술잔을 나누게 된 것에 의미를 두고 싶은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별로였는데….
보면 볼수록 현승이 생각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본모습을 지닌 사람이라, 계속 정이 갔다.
그래.
애증도 사랑이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미운 정이 단단히 생겨 버린 모양이다.
박 전무의 얼굴 위로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운 게, 신경 쓰이는 걸 보면 말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박 전무는 비워진 현승의 술잔을 채워 주며, 이죽거리는 어투로 덧붙였다.
“네가 다 해 먹는 바람에 1팀이 할 일이 없어, 인마.”
“에이, 제 발매 시기 피해서 준비하려고, 매번 발 빠르게 확인하고 다니시는 거 다 압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그러고는 앞에 놓인 자신의 잔에도 술이 넘칠 듯 가득 채워,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덩치값 제대로 하시네.’
현승은 천천히 잔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술맛을 잘 안다고 주름 잡아 놨는데 취할 수야 없지.
‘페이스 조절 잘해야겠네.’
대충 박 전무의 비위나 좀 맞추며, 몇 잔만 마시고 일어나야겠노라 생각하던 찰나였다.
“넌 남자가, 아니 가장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냐?”
박 전무가 대뜸 심오한 질문을 던져 왔다.
가장이라….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결혼을 안 해 봤기에 정말 한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어 본 적은 없다만, 다른 의미로 가장이긴 했다.
몸이 불편하고 귀가 안 들리는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모두 책임졌어야 하니까.
“책임감이 막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무겁고, 어려운 자리니까요.”
“네 말도 맞다. 무겁고, 어렵고,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지.”
현승은 제 말에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 전무를 보며, 제법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가장으로서 어깨가 많이 무거우신가 봅니다.”
“어? 너, 내가 가장인 건 어떻게 알았냐?”
“뭐, 우선 이런 걸 묻는 것도 그렇고, 현재 전무님 연세를 고려해 유추해보면….”
“뭐, 인마? 나 어디 가면 아직 총각 소리 들어.”
“주사가 좀 심하신 편이시네요.”
제 말에 박 전무가 빈정이 상했는지 “말을 말자.”하며 거듭 잔을 채워 나갔다.
“음.”
그때 현승이 테이블 위에 놓인 박 전무의 휴대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넌지시 되물었다.
“지금 전무님 휴대폰 배경 화면에 있는 아이들이 자녀분인 거죠?”
그 물음에 박 전무가 고개를 돌려, 제 휴대폰을 바라봤고.
“아, 어.”
쉴 틈 없이 떠오르는 알람 때문에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자녀의 사진이 액정 위로 떠올라 있는 채였다.
“딸이랑 아들 녀석이야. 연년생이지.”
박 전무는 무언가 제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지,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 많이 어려 보이네요. 도희 또래 정도이려나?”
“도희?”
“네, 전무님네 애들 중에 김도준 여동생 말이에요.”
“아, 이 사진 찍었을 때는 그 꼬마 나이쯤이긴 했지.”
현승은 과거형으로 돌아온 답변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남겨 둔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박 전무는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알아서 빈 잔을 채워 주며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둘 다 초등학교 다녀. 집사람이랑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내가 직접 찍은 건 이 사진이 마지막이지.”
“그럼, 설마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가신 거예요?”
“일 때문에 계속 못 가다가 겨우 시간 빼서 딱 한 번, 보러 갔었지. 결국 만나진 못하고 돌아왔어.”
“왜요? 칠칠찮게 비행기 잘못 예약하고 그런 건 아니죠?”
“설마 그랬겠냐?”
박 전무는 혀를 끌끌 차고는, 묵묵히 잔을 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쪼르르르륵-.
자신이 대출을 받아서 얻어 준 집인 뉴저지의 주소지로 말없이 찾아가니, 거실이 훤히 보이는 통창 안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보였다고.
자신 대신 생전 처음 보는 남성이 아버지 역할을,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자신은 하염없이 줄담배나 뻑뻑 피워 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혹여라도 애들에게 아빠임을 거부당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다고.
애 엄마가 애들한테 뭐라고 말을 해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쯤부터 애들이 연락도 잘 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자신의 기억에 아이들은 아직도 다섯 살 정도로 머물러 있다고.
깜짝 이벤트는 할 줄도, 해 본 적도 없는 자신이 어울리지도 않게 서프라이즈로 찾아간 것부터 잘못한 것 같다고.
근데 뭐 어쩌겠냐고….
자신은 가장이지 않냐고. 아비로서 제 자식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으니 계속 이렇게 악착스럽게 참으며 살 거라고.
뒤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악인이라 수군거려도 어쩔 수 없다고.
그래.
제 새끼들만 잘 먹고 잘 자라 준다면 그걸로 됐다고.
쪼르르르륵-.
사실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아마.
시간을 되돌려도 자신은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쪼르르르륵-.
술과 함께, 한참을 주절거리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위로 빈 병이 가득 굴러다녔다.
현승은 잠자코 박 전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잔이 비워지면, 채워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이내.
“이제 그만 드시죠.”
그가 따라 달라며 쭉 내민 술잔을 도로 밀어 버렸다.
이미 풀릴 대로 풀린 박 전무의 눈꺼풀이, 더 이상 먹으면 위험할 거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쩝, 그래.”
박 전무는 내심 아쉬운 내색을 보였지만, 스스로 과음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너한테 별 얘기를 다 했다. 이만 가자.”
그러고는 이내 민망함에 외투를 챙겨 일어섰다.
비틀.
세상이 뒤틀리듯 몸이 기우뚱 넘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박 전무는 최대한 멀쩡한 척 걸음을 옮겨 계산을 끝마쳤다.
이윽고.
뒤따라 포장마차를 나온 현승을 향해 말했다.
“애송아, 맨날 작업실에 처박혀만 있지 말고 사람 좀 만나고 그래.”
그러고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너도 그러다가 나처럼 왕따 된다.”
현승은 지금 그의 미소가 겨울을 닮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참 쓸쓸하고, 고독한….
그래, 제 아버지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 * *
술을 깰 겸 가볍게 산책을 끝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온 현승은 곧장 작업 테이블 앞에 앉았다.
“후….”
숨을 내쉴 때마다, 달큰하고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 묻어 나온다.
역시.
기분 좋은 향은 아니다.
다만.
술이라는 게, 사람을 참 감성적으로 만드는데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 헤어지기 전에 박 전무가 보여 준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대체 그 속에 무슨 돌덩이를 짊어지고 사시는 건지.”
현승은 악당도 각자만의 사정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내.
제 휴대폰을 꺼내, 당일 날짜로 녹음된 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 난 마리야….
술에 취해 어눌해진 박 전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성질이 못 돼서 그렇지. 말이 지닌 무게 정도는 알아. 내가 죽도로 아끼는 말이 있어. 그 말 앞에서 나는 자린고비야.
대체 왜 녹음한 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 어떤 말인데요?
머지않아 자신이 되묻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박 전무가 즉답했다.
─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야.
진심이 가득 묻은 어투로.
─ 잠든 딸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아이를 위해선 대신 죽어 줄 수도 있겠다.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대신 죽어 줄 수 있겠다 싶더라니까.
덤덤하지만, 절절한 목소리로.
─ 그때 잠든 딸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처음 말해 봤던 것 같아.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사랑이더라고.
탁-.
그 말을 끝으로 녹음은 끝이 났다.
사랑이라….
그러고 보면 나도 가슴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긴 하지.
그 형체 없는 감정은, 그 사람을 떠나보낸 후에야 사랑이었던 것 같다고 짐작했었다.
다시금 억지로 인연을 다시 만들 생각은 없으나.
지금, 이 시간 속….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아니, 아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박 전무가 말하는 사랑은 대체 어떤 사랑인 걸까.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악착스러운 사랑을 하고 계신 걸까?
탁-.
현승은 어째선지 박 전무를 모티브로 곡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다시금 녹음을 재생시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나 거듭해서 듣기를 반복했지만, 머릿속에 악상이 뚜렷이 그려지지 않았다.
감히 내가 짐작해 볼 수 없는 감정이라 그런가?
딸, 사랑, 아빠, 가장, 책임감.
떠오르는 키워드를 노트에 끄적이기도 잠시.
“하….”
현승은 오랜만에 만난 난제 앞에서 속을 끓었다.
그래.
술을 마셔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박 전무로부터 얻은 영감을 곡으로 풀어내는 건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혹여 겨울 시즌 안에 맞추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냥 꼭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우선, 이건 술 깨고 다시 해 보자.
타다다다다닥-.
지금은 드라마 OST 건부터 얼른 끝내고.
[ 첨부 메일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인터넷 창 위로는 첨부 파일이 담긴 메일이 전송되었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받는 이는….
안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