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a Crazy Genius Composer RAW novel - chapter (20)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20화(20/482)
야심한 밤.
박 전무가 청담동 번화가 어딘가에 위치한 유흥주점을 찾았다.
모든 좌석이 룸 형태로 되어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부에 발을 들이고 나면, 직원의 안내 없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 만큼 널찍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룻밤 술값으로 어지간한 직장인들의 두세 달 치 월급을 내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특유의 프라이빗한 분위기 덕에 연예계 인사들은 왕왕 걸음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VIP룸.
소파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박 전무가 무료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 손목시계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였다.
“전무님, 일행분 오셨습니다.”
웨이터의 안내와 함께 문이 열렸고….
“안녕하십니까?”
뚱뚱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들어서자 박 전무가 화색을 해 가며 그를 반겨 주었다.
“김 CP,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아닙니다.”
“얼른 앉아, 목부터 축이자고.”
이내 박 전무가 자연스럽게 그의 온더락 잔 안에 얼음 몇 개를 채우고는 고가의 양주를 따라 주었다.
“우리 서로 밀어 주고 당겨 주고 하는 사이잖아?”
박 전무가 술이 가득 담긴 잔을 건네주며 꺼낸 물음에 김 CP가 경계심이 어린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김 CP한테 도움받은 일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에이, 아닙니다.”
“모쪼록 나도 고급 정보 하나 주고 싶어서 불렀어.”
“고급 정보요?”
“그런데 막상 또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박 전무가 제 잔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말을 이었다.
“나 실없는 사람 아닌 거 알잖아?”
“그럼요, 알다마다요.”
“회사 내에서도 대외비인 사항인데….”
박 전무가 괜스레 고민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김 CP가 장단을 맞춰 주기 시작했다.
“이 바닥에서 저만큼 입 무거운 사람 없는 거 아시잖아요?”
“나도 알긴 아는데….”
“만약 제 입 열리면 그다음 날 연예면 아주 난리 날걸요?”
김 CP가 어깨를 들썩여 가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사표 써야 할 관계자는 몇 명이고 은퇴해야 할 연예인들은 또 몇 명이겠어요?”
그 말에 박 전무가 “뭐, 그야 그렇지….”하고 답하고는 다시금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저한테만 살짝 흘려 주세요.”
이내 김 CP가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박 전무를 바라봤다.
‘박 전무, 이 늙은 너구리….’
방송가에서 잔뼈가 굵은 김 CP가 박 전무와 알고 지낸 시간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십 년 이상이었다.
그가 바라본 박 전무는….
민머리에 거대한 풍채 탓에 겉만 보면 괄괄하고 시원해 보일지 모르지만, 들여다보면 구렁이를 수백 마리 정도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통성명을 하던 때만 하더라도 임원 직함은 고사하고 로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무늬 실장 신세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기어이 임원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몇 번이고 혀를 내둘러 댔더랬다.
‘오늘도 한참 뜸 들이다가 본론 꺼내려나 보네. 대강 털어놓고 바라는 점이나 말하지….’
박 전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푸는 법이 아예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철두철미함이 그를 임원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게 해 줬을지는 몰라도….
모든 대화가 ‘거래’의 양상을 띠곤 했기에 약속을 잡을 때마다 피로감이 들곤 했다.
아마 오늘 역시 마찬가지겠지.
분명 ‘고급 정보’라는 걸 털어놓은 뒤에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올 터였다.
그런데도 나름 끈끈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박 전무의 정보력이 꽤 훌륭한 덕이었다.
“당분간은 함구해 줘야 해.”
그때 박 전무가 재차 경고하고는 덧붙였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조만간 KOK 애들 귀국할 거야.”
“예? 그 친구들 지금 한창 일본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방송가 마당발이라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뜬소문으로조차 듣지 못한 소식이었다.
아이돌의 아이돌 격인 KOK는 현재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단독 콘서트 중일 텐데….
만약 사실이라면 연예부 기자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최고급 정보가 분명했다.
박 전무처럼 영악한 인물이 이런 고급 정보를 거저 흘렸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래, 그럼 그렇지….’
박 전무의 저의를 추리해 보던 김 CP가 이내 입가에 그윽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뮤직 중심에 컴백 무대를 마련해 주셨으면 하시는 거죠?”
자신에게 바랄 만한 점이라고 해 봐야 오래도록 담당해 온 장수 프로, ‘뮤직 중심’의 메인 무대 편성뿐이었다.
이 정도면 양측 모두 서로 *윈&윈(*Win&Win)이 가능한 수준의 합리적 청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KOK 정도 되는 대형 아이돌의 컴백 무대를 마다할 음악방송 CP가 대체 어디 있겠는가?
“하여튼, 김 CP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라니까?”
그 말에 김 CP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에이, 과찬이십니다.”
그리고는 곧장 욕망으로 반들거리는 눈을 한 채 덧붙였다.
“컴백 스케줄 픽스 되면 바로 말씀만 해 주세요. 저희 뮤직 중심 마지막 순서로 빼놓겠습니다.
“안 그래도 컴백 일정 때문에 논의 좀 해 보고 싶었거든. KOK 애들 컴백 일정이 예상보다 앞당겨졌어.”
김 CP가 난색을 표하며 되물었다.
“언제쯤인데요?”
한차례 “그게….”하고 뜸을 들이던 박 전무가 부연했다.
“다음 주야.”
그 말에 김 CP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음 주 맨 마지막 순서는….’
LS 엔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ON 엔터 소속의 아이돌 그룹 ‘더슈퍼즈’가 이미 맡아 놓은 채였다.
당연히 막강한 엔터의 힘 때문에라도 손바닥 뒤집듯 순서를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더슈퍼즈만 놓고 보더라도 결코 ‘KOK’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나름 견고한 팬덤과 인기를 보유한 그룹이었다.
하물며 ‘더슈퍼즈’는 이미 두 달 전부터 순서를 확정받고, 무대 연출팀과 얘기도 끝내 놓은 상황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하아, 이거 여러모로 곤란한데요….”
이제 와서 순서를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고 싶지만 이미 진즉에 순서가 정해졌고, 무대 연출이나 기획까지 마무리된 상태라….”
그가 박 전무의 눈치를 살펴 가며 부연했다.
“아무리 박 전무님 부탁인 데다가 KOK 컴백 이슈까지 겹쳐져 있다지만, ‘더슈퍼즈’ 쪽도 이번 앨범 발매 후 첫 컴백 무대인지라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박 전무가 재차 채근했다.
“김 CP, 내가 업어 키운 새끼들이라고 편파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툭 까놓고 더슈퍼즈가 우리 KOK 애들한테는 안 되는 거 알잖아? 솔직히 KOK의 첫 컴백무대가 뮤직 중심이라면 김 CP도 좋은 거 아냐?”
한차례 “그야 그렇지만….”하고 답한 김 CP가 괜히 제 턱 끝을 만지작댔다.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받아들였을 때 따라올 문제들이 눈에 훤했다.
무엇보다 원만하게 친분을 쌓아 온 ON 엔터와는 척지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김 CP.”
박 전무가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투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걸 까먹었네.”
그가 슬쩍 테이블 위로, 척 봐도 명품 브랜드의 시계 케이스를 올려놓으며 덧붙였다.
“별건 아니고 약소하게나마 성의 표시 좀 해야겠다 싶어서 챙겨 왔거든. 이번 일이랑은 아예 무관하게 그동안 도와줬던 게 고마워서 특별히 준비한 거니까 부담 없이 받아 줬으면 좋겠네….”
김 CP가 떨리는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시계 케이스를 바라봤다.
꿀꺽.
자신의 연봉. 아니지, 어쩌면 연봉보다 더 비쌀지도 모르는 스위스제 고급 시계였다.
“이건 좀 과분한 선물인 것 같습니다만….”
반면 박 전무는 굽힐 생각이 없다는 양 오히려 시계 케이스를 김 CP 쪽으로 슬쩍 밀어 보일 뿐이었다.
“부담될 게 뭐 있어? 김 CP도 이제 이런 거 하나 찰 때 됐지. 우리 김 CP 말 한마디면 껌뻑 죽고, 벌벌 떠는 새파랗게 어린 가수들도 이런 시계 하나씩은 쟁여 놓고 잘만 차고 다니는데….”
말끝을 흐린 그가 시계 케이스를 손수 열어 주었다.
“한번 봐 봐, 김 CP한테 딱 어울리잖아?”
말을 마친 박 전무가 시계 케이스를 도로 닫아 김 CP의 바로 앞까지 밀어 놓은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사람 난감해지게 무턱대고 부탁하는 사람이야?”
“아니죠….”
“그래, 그럴싸한 명분도 하나 준비해 왔으니까 들어나 보라고.”
박 전무가 목소리를 살짝 낮춘 채로 말했다.
“다음 주에 우리 회사 신인 가수 데뷔 무대 잡혀 있잖아?”
그 말에 김 CP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맞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떠올려 보려는 양 낮게 중얼대다가 덧붙였다.
“정아린 맞죠? 안 그래도 LS 엔터에서 간만에 나온 신인이라서 제법 후반 순서로 잡아 뒀습니다. 박 전무님하고 연 있는 친구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뒤쪽 순서로 잡아 드렸을 텐데….”
그 말에 박 전무가 “아냐, 아냐.”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 대기를 잠시.
“그 친구로 명분 삼으면 되잖아?”
이내 김 CP가 “예?”하고 되물으며 눈매를 좁혔다.
“일본에서 빵빵한 프로듀서들 끼고 앨범 다 만들어 온 KOK가 맨 마지막 순서 꿰차는 대신, 우리 LS 엔터에서 모처럼 야심 차게 준비한 신인을 음방에서 버리는 카드나 마찬가지인 맨 앞 순서로 뺐다고 하면….”
박 전무가 빈 잔을 채워 주며 덧붙였다.
“자네도 명분이 좀 생기는 거 아닌가?”
만약 뜻대로만 된다면 박 전무로서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밀리에 야심 차게 준비한 KOK의 컴백무대를 음방 맨 마지막 순서로 배치하는 동시에….
덩달아 최 이사 라인에서 거슬리는 성장세를 보이는 어린 작곡가를 물 먹일 수도 있다.
“…….”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것 참, 진짜.”
박 전무가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답답해?”
“그게….”
“아니, 망설일 이유가 아예 없는 제안이잖아!”
이윽고.
“하아.”
김 CP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박 전무의 말대로 이런 전후 사정을 듣는다면 ON 엔터 쪽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을 터였다.
“야, 김 CP.”
그때 박 전무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로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 보겠습니다?”
고압적인 물음에 김 CP가 곧장 제 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며 답했다.
“맘에 드시도록 순서 맞춰 놓겠습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 박 전무가 제 허리춤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룸 출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야지.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가는 길에 아가씨들 넣을 테니까 괜찮은 애들로 둘 앉혀 놓고 오늘은 내가 김 CP한테 그간 입은 은혜 보답하는 날이니까 술도 원하는 걸로 다 시켜 놓고….”
그리고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턱짓으로 시계 케이스를 슬쩍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시계 손목에 차고 있어.”
“…….”
“누가 보면 남의 물건인 줄 알겠어.”
말을 마친 박 전무가 “얼른.”하고 재촉했고….
“예….”
김 CP가 서투른 손길로 손목에 시계를 채우자 박 전무가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이야, 거봐. 잘 어울릴 거라고 했지?”
그리고는 곧장 문을 열고 룸을 나섰다.
“후우….”
박 전무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김 CP가 별안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개 같은 새끼….”
어울리지도 않는 ‘임원 자리’에 오른 이후로 은근슬쩍 하대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박 전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이번 KOK 컴백 무대 자체가 워낙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며 세금 걱정 없이 현금화가 가능한 고가의 시계까지 눈앞에 있었으니….
“그래, 돕고 살자….”
연예계며, 방송가라는 곳은 늘 이런 식이었다.
서로의 이권만 잘 맞물리면….
부모의 원수와도 손을 잡고 합을 맞추는 곳.
“흠.”
이내 그가 제 손목을 슬쩍 내려다봤다.
“정말 잘 어울리나….”
슬쩍 미소 지은 그가 제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찰랑찰랑.
잔 안에 담긴 술이 두 사람의 욕망처럼 넘실거렸다.
퍽 아슬아슬한 모양새였다.
* * *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하아아암-.”
생각보다 길어진 미팅 탓에 뒤늦게 회사로 복귀하던 김 실장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 보이던 찰나였다.
지이이이이이잉-.
어쩐지 불안한 전화가 울려댔다.
“이 시간에 왜….”
한솥밥을 먹는 식구랄 수 있는 매니지먼트 2팀 소속 부하 직원의 전화였다.
“야, 넌 잠도 없냐? 아직도 퇴근 안 했어?”
장난스럽게 받았으나….
– 저, 실장님. 다름 아니라 문제가 조금 생겨서요….
“문제? 무슨 문제?”
– 회사 복귀하시면 몇 시쯤 되실 것 같으세요?
아무래도 심각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도착하려면 삼십 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왜?”
이윽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 그, 정아린 데뷔무대 있잖아요….
“그래, 순서 잘 받았잖아?”
– 담당자한테 방금 연락이 왔는데….
말끝을 흐린 부하 직원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 순서가 바뀌었다네요.
“순서가?”
– 첫 번째로 바뀌었다고….
그 말에 김 실장이 반사적으로 으르렁대듯 물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이내 부하 직원이 재차 부연했다.
– 그런데 정황이 조금 이상해서요. 조금 전에 갑자기 ‘KOK’의 10주년 미니 앨범 티저 영상이 업로드되고, 다음 주 발매라고 기사까지 떴어요.
“뭐?”
–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정말 아예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라 팀원들 멘탈 다 갈려 나가는 중이에요. 아무리 신인이라고는 해도 LS인데 첫 순서는….
김 실장이 애써 침착한 투로 답했다.
“들어가자마자 확인해 볼게.”
그때 직원이 재차 덧붙였다.
– 살짝 알아봤는데 순서 바뀌기 전에는 이번에 앨범 발매하는 ON 엔터 소속 ‘더슈퍼즈’였다더라고요. 더슈퍼즈도 이제 터줏대감이 다 된 애들인데, 무리하게 발매 일자 앞당긴 KOK 애들한테 순서 빼앗긴 것도 이상하고 정아린 순서 첫 순서로 빠진 것도….
이내 김 실장이 마른세수를 해 보이고는 답했다.
“그러게, 이상하긴 하네….”
직원이 거듭 말을 이었다.
– 누가 봐도 정아린을 명분 삼아 앞 순서로 뺀 것 같은데 이거 아무리 봐도 박 전무님 입김 들어간 것 같지 않아요? KOK 애들 일본에서 앨범 비밀스럽게 준비했던 것도 전무님 지시 때문이라는 소문 파다하던데….
그 말에 김 실장이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야, 야, 그 정도만 해라.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웬 억측이야?”
– 그래도….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치졸하게 해 봐야 뭐가 남는다고.”
김 실장이 대강 통화를 마무리했다.
“일단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
윗사람들 사내 정치가 직원들 입방아에 오르내려 봐야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박 전무의 입김이 들어간 상황이 분명했다.
정아린과 같은 시기에 ‘KOK’의 깜짝 컴백도 모자라서 의도적인 무대 순서 갈아 치우기라니….
이렇게 작정하고 같은 식구의 앞길을 막는다고 하여 그가 이득 볼 만한 게 있나?
‘명분 때문에 정아린을 희생시킨 건가?’
정아린의 순서를 맨 앞으로 뺀다면 뒷자리를 빼앗긴 ON 엔터 쪽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터였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려나….
정말 그저 명분 때문이었더라면.
굳이 급하게 컴백 시기를 당길 필요 없이 한 주 정도 여유 있게 처리했어도 될 일이 아닌가?
악감정 때문인가?
한데 전무씩이나 되는 양반이 ‘정아린’같은 신인 가수에게 그런 졸렬한 화풀이를 할 이유가 대체….
“어라?”
그때,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박 전무’와 ‘현승’이 마주쳤던 일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김 실장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현승아, 너 예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 예? 예, 엘리베이터 앞에서 뭐요?
“그, 박 전무님 마주쳤던 날 있잖아.”
– 아아, 네. 지난번에 마주쳤었죠.
“그때 같이 올라가면서 별일 없었어?”
– 예, 그냥 조용히 올라갔었는데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 흠, 저한테 차 한잔하자고 하시긴 했었는데.
“차를 마시자고 했다고? 그래서?”
– 피차 바쁜 입장이니 기회 되면 그러자고 했죠?
김 실장이 작게 탄식을 뱉었다.
“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박 전무가 현승에게 눈독을 들였던 게 아닐까 싶어 보였다.
물론 만사에 무관심한 현승이 그런 제안에 큰 관심을 뒀을 리가 없을 테고….
현승이 최 이사님의 라인이라고 판단하고 해코지해야겠노라 결심이라도 한 걸까?
“이건 너무 갔나…?”
한데, 박 전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었다.
– 뭐라고요? 안 들리는데 용건 끝난 거 맞죠?
그 말에 김 실장이 다급하게 답했다.
“현승아, 내일 작업은 좀 미뤄 두고 연락하면 나와.”
– 예? 왜요?
“아무래도 박 전무님이 너한테 앙심 품은 것 같다.”
그 말에 현승이 되물었다.
– 쉰은 되어 보이시던데 티 파티 초대장 안 받아 줬다고 삐지기라도 하신 거예요? 덩치 큰 대머리 아저씨가 마음 씀씀이는 무슨 영애님이 따로 없네….
그 말에 김 실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어쨌든 우리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잖아?”
– 아니, 계속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
“내일 낮에 갈 곳 있으니까 꼭 시간 비워 놓고.”
현승이 거듭 행선지를 물었으나 김 실장은 연신 에둘러 답하며 대강 통화를 마무리 지었고….
“후우….”
통화를 마친 김 실장이 곧장 머릿속으로 작금의 상황을 파훼할 ‘작전’을 세워 보기 시작했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있다.
‘견’을 잡으려면 ‘원’을 찾아가야 할 테고, 반대로 ‘원’을 잡고자 한다면 ‘견’을 찾아가야겠지.
제 선에서 해결해 보고자 애썼지만 이대로 멍하니 당할 순 없는 노릇이므로….
최 이사.
박 전무와 명백한 견원지간에 놓인 인물이자 제 사수인 최 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성싶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의도와 달리 판이 점점 커지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