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a Crazy Genius Composer RAW novel - chapter (22)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22화(22/482)
“다 왔네.”
그 말에 현승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앞 유리창을 바라보자 거대한 저택의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집 좋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아방궁(*阿房宮)과 비슷한 규모가 분명해 보였다.
철문을 통과한 뒤에도 한참을 더 들어가고 나서야 저 멀리 저택이 보인 건 물론이거니와….
정원에 심어진 분재나, 비단잉어들이 헤엄치는 연못, 그 위로 놓인 돌다리만 놓고 봐도 그랬다.
한편.
덤덤해 보이는 현승과 달리 김 실장은 연신 호들갑을 떨어 대는 중이었다.
“이야, 집 끝내준다….”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할 지경이었으니 감탄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 실장 역시 나름 ‘고액연봉자’ 그룹에 속하는 편이었으나….
매달 월급날 빠져나가는 카드 값, 대출 이자, 공과금 덕에 고통받기 일쑤였다.
“근초고왕 시절부터 일했어도 이런 집은 못 샀겠지….”
그리고는 현승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야, 너는 또 왜 이렇게 무덤덤한 건데?”
“그럼요?”
“놀랍다거나, 기죽는다거나 그런 거 없어?”
“예, 딱히.”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 보니 정원 안쪽에 자리한 저택 입구까지 다다른 채였다.
이윽고 최 이사, 김 실장, 현승이 차례로 차량에서 내려서기에 이르렀고….
띵동-.
최 이사가 조심스럽게 현관 옆의 벨을 누르던 찰나였다.
철컥!
문이 열렸고….
“선생님, 들어가겠습니다.”
인터폰에 대고 정중한 투로 말한 최 이사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미술품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기다란 복도가 그들을 반겨 주었고….
저벅, 저벅.
저 멀리 복도 끄트머리에서 무테안경을 쓴 깡마른 체형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야, 최근식이.”
최 이사를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 보더라도 관계가 제법 돈독해 보일 따름이었다.
빈틈없이 빽빽한 머리칼은 마치 눈이 내리 앉기라도 한 양 새하얗게 샌 채였고….
대충 걸쳐 입은 생활한복은 옷깃이 삐죽거릴 정도로 정돈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적어도 이토록 호화로운 대저택의 주인이라기에는 지나칠 만큼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이었다.
다만.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빛만큼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이두석.
최 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연예계의 시조새 격인 인물인 동시에, 지금의 LS 엔터테인먼트가 있게 해 준 개국공신인 셈이었다.
“선생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최 이사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가며 인사하자 ‘이두석’이 곧장 그런 그를 만류했다.
“하여튼, 허례허식은. 이미 진즉에 발 빼고 은퇴까지 한 마당에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야? 기껏 해 봐야 그냥 동네 영감쟁이지.”
말을 마친 그가 소탈한 웃음을 흘리고는 그제야 최 이사의 등 뒤편에 서 있던 김 실장과 현승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같이 온 친구들은 전부 초면이네?”
이내 최 이사가 두 사람을 소개해 줬다.
“일단 이쪽은 제 후임인 김우현 실장입니다.”
그 말에 김우현이 고개를 푹 숙여 보이자 이두식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답했다.
“그래, 똘똘하니 일 한번 잘하게 생겼네.”
그리고는 시선을 옮겨 현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보자, 이쪽은 관상을 보니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보아하니, 배우 아니면 가수 관상인 것 같은데?”
이내 최 이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이 친구가 인물이 훤해서 종종 그런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만 작곡가입니다.”
의아하다는 양 “작곡가?”하고 되물은 이두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리고는 곧장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덧붙였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이내 현승과 일행이 복도 끝의 중문을 열고 들어서자 탁 트인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보더라도 한없이 값이 나가 보이는 스위스제 가구들이 한가득이었으며….
천장에는 화려하다 못해 웅장한 느낌이 드는 최고급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중이었다.
이윽고.
대리석 식탁의 상석을 꿰차고 앉은 이두석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 근식이가 제 새끼들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그냥 인사나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용건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한참을 머뭇대던 최 이사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불쑥 찾아뵙고 이런 말씀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만….”
그리고는 한없이 정중한 투로 부연했다.
“선생님의 도움이 간절합니다.”
한차례 “도움?”하고 되물은 이두석이 계속 말해 보라는 것처럼 가볍게 턱짓을 해 보였다.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흠.”
박 전무가 일본에서 비밀리에 ‘KOK’ 10주년 기념 앨범 제작을 진행 및 완료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현승에게 앙심을 품고 물을 먹이기 위해 KOK의 컴백 시기를 의도적으로 앞당겼다는 사실.
그 덕에 데뷔를 코앞에 둔 신인가수가 음방에서 소개 멘트 하나 없는 첫 순서로 끌어내려졌다는 사실까지.
“잘한다, 잘해.”
모든 사실을 들은 이두석이 최 이사를 나무랐다.
“애들도 아니고 아직도 둘이 티격태격하는 거야?”
최 이사와 박 전무는 이두석이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부터 서로 얼굴만 보면 으르렁대던 사이였다.
다만.
이제 둘 다 쉰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앙숙처럼 구는 게 썩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뭐?”
이두석의 냉정한 반응에 최 이사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나한테 도와 달라는 거야?”
다시금 정적이 드리웠다.
“집안싸움인데 알아서 해결해야지.”
“선생님….”
“내가 은퇴한 지가 몇 년인데 말이야.”
말을 마친 이두석이 눈매를 좁히며 현승을 바라봤다.
“더군다나 정작 당사자인 저 친구는 별로 다급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이두석이 시종일관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현승을 바라봤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번 일의 최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건 저 친구였다.
근데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듯 여유롭게 굴고 있으니 마냥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김 실장이 현승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보채자 마지못해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예, 근데 저는 낭중지추라는 말을 맹신하는 편이거든요. 만약 좋은 곡이었더라면 KOK가 아니라 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앨범이랑 시기가 겹쳐도 흥행하겠죠.”
“얼씨구?”
“더군다나 열심히 앨범 준비해서 컴백하겠다는 ‘KOK’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가 전전긍긍한다고 바뀔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최 이사와 김 실장의 원망이 가득 서린 시선이 동시에 현승에게 날아들었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더라도 모자랄 판에 당당하게 굴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하지만.
정작 이두석은 만족한 눈치였다.
“마음가짐 하나는 마음에 드네.”
“…….”
“너희도 얘 좀 보고 본받아라.”
말을 마친 이두석이 “그럼 이제 이야기 얼추 끝났으니….”하고 화제를 전환하려던 찰나였다.
“여기까지는 제 입장일 뿐이고….”
현승이 특유의 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선생님의 도움이 간절하긴 합니다. 으레 생기곤 하는 파벌 싸움에 휩쓸린 신인 가수에게는 죄가 없잖아요? 그 친구는 이번 싱글을 통해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두식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현승을 잠자코 바라봤다.
“차근차근 포석을 깔 듯 보낸 연습생 시절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6년이 넘는 친구입니다. 언뜻 들은 바에 따르면 입지와 영향력이 대단하신 분 같던데, 혹시 그 친구가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 말에 이두석이 되물었다.
“포석을 깔다라….”
현승이 굳이 ‘포석’이란 표현을 쓴 건 저 멀리 보이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바둑판이나, 프로기사의 기보가 수록된 바둑 서적 몇 권 때문이었다.
“자네 바둑 좀 둘 줄 아나?”
“예, 뭐.”
“이야, 그거 정말 잘 됐는데.”
이두석이 뜬금없는 제안을 해왔다.
“그럼 바둑으로 내기를 하지.”
그 말에 현승이 되물었다.
“미생(未生)인 어린 가수의 앞날을 걸고요?”
이두석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이 친구, 말을 날카롭게 하는 재주가 있네? 자네한테는 어떤 게 걸려 있는 내기 바둑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굳이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점치기 위해 재미 삼아 두는 내기 바둑일 뿐이야.”
그가 방긋 웃으며 되물었다.
“어때? 해 보겠나? 아니면 밥만 먹고 돌아가겠나?”
그렇게 정적이 드리운 와중에 최 이사가 애꿎은 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바둑은 이두석의 아주 오래된 취미였다.
이따금 ‘프로 바둑기사’를 집으로 초대해서 대국을 즐길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고….
정작 자신만 하더라도 이두석에게 몇 년 바둑을 배웠던 경험이 있지 않던가?
털털하고 강요 없는 그 이두석이기에 기원에 끌려갔을 때는 얼떨떨하였지만, 오히려 이두석과 더 친분을 쌓음과 동시에 바둑을 두는 법뿐만이 아니라 실 업무에 대한 팁도 많이 배웠던 기억이 있다.
최 이사는 이미 현승의 패배를 확신하기라도 하는 양 깊은숨을 내쉴 뿐이었다.
“자네가 이긴다면 힘닿는 데까지는 도와줄 수 있어.”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이제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사내아이다.
끽 해 봐야 온라인으로 바둑 좀 둬 본 게 전부겠지.
‘어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섬에서 배낚시를 즐긴다든지.
무 농사를 한다든지…
현승의 취미를 고려해 본다면?
‘어쩌면 바둑에도 능통할지도-?’
그때.
“흠.”
현승이 자신감이 묻어나는 투로 되물었다.
“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승리를 확신하나 보군?”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현승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부연했다.
“둡시다, 바둑.”
* * *
이윽고 이두석과 현승이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로 마주 앉았다.
“돌을 가릴 필요 없이 자네에게 흑 돌을 양보하지.”
이두석이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아니요, 공정한 걸 선호해서 말이죠.”
현승의 대답에 그가 흥미롭다는 양 눈썹을 씰룩였다.
“좋아.”
이두석이 백 돌 하나를 꺼내 들었고, 그에 맞춰 현승이 흑 돌 한 움큼 집어 올리며 돌을 가렸다.
결과는….
“돌 가릴 필요 없었구만.”
현승이 흑, 이두석이 백을 쥐었다.
“그래도 정당하게 가려낸 거니까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마세요.”
“얼씨고? 그래, 자네에게 몇 점을 주고 시작하면 좋겠나?”
그 말에 현승이 답했다.
“그냥 맞바둑으로 두시죠.”
“나랑 맞바둑을 두겠다고?”
“공정한 걸 선호한다니까요?”
이두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친구가 기세가 좋네.”
“과찬이십니다.”
“그럼 내게 덤도 주는 건가?”
“예, 물론이죠.”
앞에 있는 어린 작곡가는 자신에게 여유로운 어투로 공정한 ‘*호선’(*互先) 바둑을 둘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두석은 오랜만에 즐거운 경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 덕에 연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채였다.
비록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최 이사와 김 실장은 그저 불안할 따름이었지만….
“그럼 제가 먼저.”
현승의 손에 쥐어진 흑 돌이 느긋하게 바둑판 위로 착수했다.
쩔그럭, 탁-.
두는 모양새만 놓고 보면 제법 기원 좀 들락거려 본 사람처럼 보였다.
“오….”
최 이사와 김 실장이 작게 감탄을 뱉었다.
모르긴 모르더라도….
돌을 놓는 폼만큼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쩔그럭, 탁.
쩔그럭, 탁.
그렇게 고요 속에서 대국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김 실장은 바둑 좀 둘 줄 아나?”
“자세히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너무 기대하고 보진 마.”
최 이사는 덤덤한 투로 현승의 패배를 확신했다.
“아무래도 저 친구, 바둑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네.”
천천히 판을 지켜보니 현승은 한 수, 한 수를 장고 끝에 두는 형태로 대국에 임하고 있었다.
적당히 판을 읽을 줄 않다면 모든 수를 초읽기 시간이 다 되도록 두지는 않을 터였다.
반면.
이두석의 손끝에는 일말의 고민이 없었다.
마치 모든 변수가 머릿속에 있는 양….
돌을 집음과 동시에 착수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최 이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쩔그럭, 탁.
쩔그럭, 탁.
쩔그럭, 탁.
경기가 전개될수록 점차 흐름이 빨라졌다.
또한….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흠….”
이두석의 손이 느려졌고….
쩔그럭, 탁.
현승은 거듭 판을 주도하듯 이끌어 나가는 중이었다.
‘묘수를 부리네…?’
마치 몇 수를 내다보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으며 착수한 흑 돌은 견고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역할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게.
장장 몇 시간에 걸친 팽팽한 접점이 막을 내렸다.
탁-.
이두석이 마지막 돌을 착수했고.
“이사님….”
김 실장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한차례 “잠깐만.”하고 낮게 답한 최 이사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대며 집 계산을 해 보기 시작했다.
“것 참….”
그야말로 접전이었으나….
“아쉽게 됐네.”
실로 아슬아슬한 패배였다.
고작 반집 차이.
반집 차이로 패한 것이다.
“역시 현승이가 진 거죠?”
“응, 정말 아슬아슬하게….”
최 이사가 아쉬운 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부의 기세가 좋길래 혹시나 하며 기대했건만….
아무래도 이두석을 상대로는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아쉽게도 제가 졌군요.”
현승이 덤덤한 투로 이두석에게 말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졌으니.”
의미심장한 투로 물었다.
“부탁은 못 들어주시겠군요.”
그 말에 김 실장과 최 이사가 낙담하듯 한숨을 내쉬던 찰나였다.
“풉….”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이두석이 끝내 박장대소를 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못 당하겠어.”
뜬금없는 박장대소에 최 이사와 김 실장은 의아함을 품은 채로 이두석과 현승을 번갈아 쳐다봤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최 이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이겼지만, 완벽하게 진 거야.”
“이겼는데 지신 거라고요?”
“그래, 어디서 이런 친구를 데려온 거야?”
이두석이 질문의 답은 궁금하지 않다는 양 조금 전 치른 대국의 기보를 카메라로 급급하게 담아 냈다.
“이렇게 압도적인 경기는 정말 오랜만이야. 기록해 둬야겠어.”
한참을 찍어 대던 이두석이 고개를 들어 올려서는 현승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발톱을 숨긴 채로 느긋하고 어설픈 수로 방심시키더니….
차차 난전으로 빠르게 끌고 가면서 무서운 기세로 상대의 기류를 아예 깨트렸다.
일부러 그런 묘수를 부려 혼란 속에 접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는.
아쉽게 져 버린 양 반집 차 패배를 의도하여 마무리 짓다니….
하물며.
흑 돌을 쥐게 된 현승이 덤까지 내어 주지 않았던가?
이두석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셈이었다.
도리어 둘 사이의 압도적인 실력 차를 실감했을 뿐.
“하하! 오랜만에 아주 호되게 당했구만.”
말을 마친 이두석이 별안간 협탁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리고는 두툼한 수첩 하나를 꺼내 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호되게 당한 마당에 승패가 중요하겠어?”
그 말에 최 이사와 김 실장이 동시에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을 해 보이기에 이르렀고….
“좋아, 약속했으니 내 도와줘야겠지.”
이내 최 이사가 곁눈질로 수첩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건….’
콘크리트 정글이라 불리는 연예계의 먹이사슬 내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이들의 연락처가 가득 담겨있을 수첩이었다.
“어디 보자….”
이두석이 수첩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는 모두를 쭉 둘러봤다.
“그런데 말이야.”
장내에 짙은 적막이 드리우기를 잠시.
“이렇게 나까지 전면에 나서서 힘을 써 줬는데 그 신인가수가 잘 안 풀릴 수도 있는 거잖아? 뭐, 그럴 것 같다는 말이 아니라 으레 연예계란 곳이 뜻대로 되는 곳이 아니다 보니까….”
말끝을 흐린 그가 인자하되 강단 있는 어조로 되물었다.
“더구나, 근식이 너랑 그 누구야? 박 전무, 그래, 인태, 박인태. 두 사람 알력 다툼까지 껴 있는 문제인데 그 신인가수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말이지….”
짧은 침묵 속에서 연신 “사락, 사락.”하고 수첩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기를 잠시.
“전 대표가 나를 미워할까?”
그리고는 입가에 희끄무레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재차 물었다.
“아니면, 은퇴한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고자질한 건 물론이고 집안 식구들 밥그릇 싸움으로 끌어들인 주제에 성과도 내지 못한 너희를 미워할까?”
이내 그의 시선이 최 이사에게로 향했다.
“그 정도 책임은 질 각오로 찾아온 거 맞지?”
그때.
“당연하죠.”
현승이 최 이사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어르신께서도 책임지고 약속 지켜 주셔야 합니다.”
이내 이두석이 “이놈 봐라!”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소리쳤다.
“이놈아, 그건 확실하게 책임진다니까!”
이두석이 본래 ‘나이’나 ‘위치’의 고하를 막론하고 격식 차리는 일을 싫어하며, 권위 의식이라는 단어와는 아예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인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최 이사였으나….
‘쉽게 아무한테나 이놈, 저놈이라 할 사람도 아닌데….’
도리어 이두석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현승을 향한 마냥 살가운 태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쪼록.
모든 고민이 해결된 셈이었다.
“선생님, 시간도 늦었으니 트렁크에 챙겨 온 선물만 내려 드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이두석이 “선물은 무슨-!”하고 호통을 치고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뭘 준비했는지 몰라도 그런 선물 필요 없어.”
“예? 그럼….”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저 친구….”
이내 이두석의 시선이 현승에게로 향했다.
“민현승이 말이야.”
그 말에 현승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예?”
이윽고.
“자네, 이따금 우리 집에 바둑 두러 오지 않겠나?”
말을 마친 이두석이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최고의 선물일 것 같아서 말이야.”
이내 현승이 별 고민 없이 곧바로 답했다.
“예, 그 정도야 뭐.”
참고로.
현승은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귄 적이 없기도 했고 소위 말하는 집돌이 성향이 짙어 집이나 작업실을 비롯한 실내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왔다.
그 결과.
전생에서부터 음악이나 게임 다음으로 즐겼던 취미가 바둑이나, 장기, 체스 등의 게임이었다.
또한.
그런 취미들에 흥미를 잃게 된 건 겨룰 수 있는 마땅한 적수가 없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이두석이 알 수는 없었지만….
의도치 않게 자신 있던 바둑으로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현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