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a Crazy Genius Composer RAW novel - chapter (444)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445화(444/482)
현승은 남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빈치스 사옥을 찾았고.
“어라?”
정원을 가로지르다 말고, 헛것을 보기라도 한 듯 짙은 눈썹을 들썩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왜, 여기에….’
그러고는 이내 환각을 보는 건가 싶어,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푸른 정원 아래 놓인 벤치에 앉은 남성을 향해.
저벅, 저벅.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마 소재의 개량 한복을 입은 남성은 한적히 손부채질하고 있었다.
은색 테 안경 아래로 보이는 눈매는 인자한 주름이 잡혀 있었으나,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래.
그런 사람이라면, 딱 한 명.
“어르신?”
이두석밖에 없었다.
“대체 여기까지 어쩐 일로….”
현승은 자신이 술이 덜 깬 건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도 그럴 게, 이두석이 이곳을 직접 찾아올 일이 없지 않은가?
설마 대국 때문에 미국까지 건너왔을 리는….
있나?
이두석은 대답 대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기도 잠시.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있으니, 안 찾아올 만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앓는 소리와 함께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왔다네.”
현승은 그런 이두석과 함께 사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죠. 날이 찹니다.”
오랜 비행 탓인지, 그의 얼굴이 꽤 수척해 보인 까닭이었다.
“드시죠.”
현승은 이두석에게 상석까지 내어준 다음, 찻잔을 건넸다.
그의 자택에 찾아가, 차를 얻어 마신 적은 더러 있다지만.
자신의 공간에 그가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탓에, 왠지 온몸에 힘이 가득 실렸다.
혹시 모를 불안감으로.
후룩, 후룩.
이두석은 한동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들이켰고.
이내.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대국 한번 하지 않겠나?”
정말 대국을 위해 미국까지 찾아온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만약 내가 이긴다면 소원 하나 들어주게.”
덧붙인 그의 말에는 어딘가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럴게요.”
현승은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은퇴한 뒷방 늙은이라고 하나,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손에 쥐고 있는 양반이다.
그래.
넘쳐나는 게 시간이라고 한들, 부탁하기 위해 미국까지 건너올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세한 이야기는 대국을 통해 들어 봐도 되겠지.
달그락, 달그락.
이내 바둑판이 세팅된 테이블을 두고 둘이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이두석이 흑돌을 잡았다.
달그락, 달그락.
어지간히 이기고 싶으신 모양이군.
달그락, 달그락.
첫 착수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 보면.
달그락, 달그락.
이두석이 심오한 얼굴로 바둑판을 천천히 내려다보기도 잠시.
달그락, 탁!
바둑판 위로 흑돌을 착수했다. 망설임이 길었으나, 그만큼 신중한 첫발을 뗀 셈이다.
그에 비해….
탁!
현승은 망설임 없는 손으로 백돌을 집어, 착수했다.
그렇게─.
이두석과 현승은 번갈아 착수를 이어 나갔다.
달그락, 탁!
하나, 초시계를 읽어야 할 만큼 이두석의 착수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기풍이 바뀌셨네.’
들인 시간만큼, 그의 기풍은 기존과 많이 변해 있었다.
느리면서, 저돌적이고.
고요하지만─.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기고 싶다는 욕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기풍.
“어르신.”
궁지에 몰린 현승이,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제게 부탁하시려는 게, 꽤 큰일인가 봅니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신 걸 보면.
하나.
구태여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큰일이라….”
이두석이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리기도 잠시.
달그락, 탁!
다시 한번 매섭게 착수하고는 덧붙였다.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현승은 그런 이두석을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떤 일을 부탁하시려는 건지, 벌써 겁나네요.”
“나도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겁에 떨었지.”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바둑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르신이 겁을요?”
이내, 이두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다 늙은 뒷방 늙은이가 욕심을 품었으니, 당연히 겁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현승과 눈을 맞췄다.
‘거짓말하시네.’
현승은 그런 이두석을 정면으로 주시하다 말고,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버릇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던 까닭이다.
왜냐고?
이두석은 욕심을 품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런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야망이 가득 끓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어떤 욕심을 품으신 겁니까.”
현승은 그런 생각을 뒤로한 채, 백돌을 쥐며 넌지시 물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내 백돌이 엉뚱한 곳에 착수했고.
“함께, 자네를 도우며 함께 하고 싶네.”
이두석의 입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자네가 없는 VINCIS에서 쓰이게 해 주게나.”
“그게 무슨….”
“아무리 늙었다지만, 그래도 나 정도면 어딘가 쓰임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인자한 미소 뒤로 마치 청년같이 말간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혹시 나도 이력서가 필요한가?”
“농담이 과하십니다.”
“진심이야. 준비하라면, 하겠네.”
현승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되물었다.
“어르신, 갑자기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신 겁니까?”
그 말에 이두석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음.”
그러기도 잠시.
“문득 아쉽더라고.”
그렇게 답한 이두석의 얼굴 위로는 아주 잠시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이제 욕심 없이 평온하게 살아야겠다고.”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뿐.
“그런데, 자네를 보고 있노라면 계속 욕심이라는 놈이 똬리를 틀고 앉아서 몸집을 키우더군.”
말을 잇는 이두석의 눈빛은 그 어떤 이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나는 생전 실패라는 걸 모르고 살았지. 그런데, 미국이라는 땅에서 처음 실패를 맛봤었다네.”
“미국 진출을 하셨던 겁니까?”
“그래,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던 모양이야.”
이내 이두석이 흑돌 하나를 쥐어, 착수했고.
탁!
승기를 잡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또한 미국에서 홀로 서려고 한다면, 어림도 없을 테지. 나에겐 자네처럼 불세출의 재능이 있는 건 아니니까.”
“대신 수완이 좋으시잖아요.”
“그래, 한국의 연예계 시장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를 도와 가며 살아가는 곳이니, 내가 계속 연명하며 살 수 있던 거지.”
이미 이번 대국의 흐름은 이두석에게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라. 오로지 실력과 재능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곳.”
애초에 현승은 이 대국에서 이길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두석의 기세에 휩쓸려 줄 요량이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자네의 뒤를 돕고 싶네.”
그가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죽기 전에, 미국에서 성공해 보고 싶네.”
그가 말하는 욕심이 이런 거라면.
“유니스로 가더라도, 이곳이 눈에 밟히지 않겠나? 무엇보다 합병한 만큼, 독립 체계로 간다고 한들 신경을 안 쓸 수도 없을 테지.”
그의 눈에 담긴 야망이 이런 거라면.
“내가 자네가 만든 이 빈치스를 유니스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만들어 보겠네.”
기꺼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생각이니까.
“그럴 수 있도록 해 주겠나?”
그의 물음에 현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이번 대국은 제가 졌으니, 별수 있나요?”
“져 줘서 고맙네.”
“근데, 인사 관리는 제가 아니라 김우현 이사님이 합니다.”
“그런가? 김우현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그놈 일은 잘해도 바둑 실력은 영 형편없거든.”
그 말에 둘이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현승이 이두석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덧붙였다.
“어떤 대국보다 아주 값진 대국이었습니다.”
그래.
덕분에 맘 편히 발걸음을 뗄 수 있게 되었으니까.
* * *
유니스 사옥 내 주차장에 도착한 현승은 구태여 한적한 곳을 찾아, 주차를 완료했다.
대표 전용 주차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끼이이익.
그곳에 대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다들 몰려와 새로운 대표의 차량을 구경할 테니까.
“흐음….”
현승이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놓인 헬멧을 바라보기도 잠시.
달칵.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래.
첫 출근을 헬멧 쓰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안 그래도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이들이 바글거리는 이 소굴에서 구태여 트집 잡힐 일을 내어주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젠….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빈치스는 남은 이들과 이두석이 잘 키워 줄 테니.
‘나는….’
유니스를, 빈치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버텨 주는 든든한 받침대로써 더욱 견고하게 일으킬 생각이다.
“흐음.”
머지않아.
현승은 허전한 머리칼을 대충 매만지고는 이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썩은 표정 가리기엔 헬멧만 한 게 없는데….
저벅, 저벅.
현승이 엘리베이터 앞에 걸음을 멈춰 선 그때.
“기다렸습니다.”
누군가 뒤에 바짝 붙어 서며 말을 건네 왔다.
슬쩍 돌아보니, 연회장에서 봤던 킬리언이었다.
나를 기다렸다니.
남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인기척이라도 좀 내시죠.”
“급하게 쫓아와서요.”
“저를 왜 쫓아오십니까?”
현승이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며 되물었고.
“대표 전용 자리에 대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른 곳에 주차하고 오시는 바람에 놓칠 뻔했거든요.”
“그러니까요. 저를 왜 기다리시고, 왜 쫓아오십니까?”
“잘 보이고 싶어서요.”
“저는 사내에서 라인 같은 거 만들 생각 없습니다.”
“그 점마저 마음에 드네요.”
킬리언은 지난번처럼, 외형과 안 어울리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저도 대표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아니거든요.”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음성이 들려왔고.
“근데 라인 만드실 생각 없는 거 압니다만, 편 하나는 만들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킬리언이 현승의 옆에 나란히 서며 덧붙였다.
“제가 그편이 되어드릴 겁니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곧 필요하실 겁니다.”
이윽고.
킬리언은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친절히 손을 뻗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우선 타실까요?”
그 얼굴이 상당히 흉흉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지이이잉.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세차게 진동했고.
[ 1시간 뒤, 대회의실에서 임원급 긴급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늦지 않게, 참석 부탁드립니다. ]문자 내용을 확인한 현승이, 미간을 좁혔다.
‘이거 참.’
첫 출근날부터 긴급회의라니. 그것도 문자로 통보라….
“대표실로 가십니까?”
그때 먼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킬리언이 물어왔고.
“네.”
현승이 짤막이 대답하며 몸을 싣자, 킬리언은 대표실이 있는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제법 빨리 제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신 것 같은데, 같이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현승은 대답 대신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