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a Crazy Genius Composer RAW novel - chapter (85)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85화(85/482)
“촬영 시작 30분 전입니다.”
조연출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때.
김영호 PD가 제 두 손뼉을 쳐 대며 이목을 끌었고.
“촬영에 앞서 주요 제작진분들과 심사위원분들만 잠시 이곳에 모여 주시겠습니까?”
성규진 또한 서브 PD였으므로, 하던 준비를 멈추고 그의 곁으로 향했다. 김영호의 표정은 몹시 편안해 보였다.
그래, 자신과는 달리….
“오늘은 심사위원분들에게 조심스러운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사람인 양 인자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 김영호 PD를 보고 있노라면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고로.
메인 PD라면 응당 현장을 한 번에 제압하고 통솔하며, 높은 시청률을 내기 위해서라면 악역도 자처해야 하거늘….
‘너무 물러 터졌다니까.’
성규진은 예전부터 김영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이자, 늘 프로그램의 메인 PD를 도맡는 그였기에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다만.
자신이 세운 기준인 PD가 갖춰야 할 ‘자질’이나 ‘위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존경이나 동경 따위를 품지는 않았다. 그래, 아까도….
‘나를 말리는 척, 되레 자신이 좋은 사람인 양 굴어 댔지.’
결국.
이번에도 고현덕 CP는 대신 총대 메고 나선 자신이 아니라, 김영호 PD와 함께, HS한테 붙어먹은 모양이었다.
모인 사람들 속에서 고현덕 CP가 극적인 연출을 위해 ‘TOP 10’이 아니라 ‘TOP 11’로 추진해 보자며, 넉살스럽게 얘기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게 이번 TOP 11 합격 내정자 리스트입니다.”
고현덕의 말을 이어 김영호가 서류를 나눠 주며 부연했다.
“오늘은 중간 평가전이라 탈락자가 선정되는 건 아닙니다만, 내일 있을 본 라운드에서 사람들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어느 정도 염려해 두고 심사를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거부감 없는 말들로 좋게 포장했다지만, 결국 낱낱이 해석하자면 탈락 내정자로 분류된 참가자에게는 당일 평가 기준인 A, B, C 중 가장 낮은 평가일 수 있는 C를 주면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뭐, 그 말을 저리 어렵게 돌려서 하는지.’
성규진이 불만스러운 양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던 차였다.
“근데 HS 씨가 안 보이네요?”
이영아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잠시 볼일이 있으셔서, 금방 오실 겁니다.”
김영호의 답변에 이영아가 “아아.”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상전이야, 상전.”
이영아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성규진의 빈정거림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상전’은 HS를 뜻하는 게 명백해 보인 까닭이었다.
‘막상 HS 앞에서는 말도 못 하면서, 허세는….’
지난 본선 라운드 때도, 물로 들어온 PPL을 헬멧 때문에 마실 수 없다는 HS에게 “암요, 계약사항이니 어쩔 수 없죠.”하고 꼬리를 말아 보이지 않았던가?
‘정말 싫다….’
이영아는 전형적으로 강약약강(強弱弱強) 성향을 지닌 사람을 본능적으로 혐오했다. 앞에서 못 할 말을 뒤에서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래, 딱 성규진 PD 같은 사람 말이다.
‘HS와 친분을 쌓으려고 안달이더니만….’
왜 돌연 그가 HS에게 반감을 보이는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은 현재 제 손에 들려진 의 서류가 더 중요했다.
“하….”
이내 이영아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네.’
이전 라운드에서도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로 분류된 참가자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해 줄 것을 조금씩 강요받아 왔다.
또한, 일부 참가자에게만 편파적으로 분량을 몰아주고, 자극적인 흐름을 위해 악마의 편집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도 알고 있다.
물론.
기획사에서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오디션이 아니라, 방송을 타고 나가는 오디션 프로그램인 만큼 일부 형평성이 어긋나는 점이 있더라도 수긍하고, 협조해 왔다.
그래, 이영아는 비단 K-싱어스타뿐만이 아니라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 모두 어느 정도 짜고 치는 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만큼의 연차가 쌓인 프로 방송인이었다.
그랬는데….
이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는 제법 재미를 느꼈었다. 점차 성장해 나가는 참가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겨났으며.
다소 무심하고 날카롭긴 해도, 모든 참가자를 매번 진심으로 바라보며, 올곧게 심사하는 HS를 보며 자극을 받아, 오랜만에 열의를 불태웠다.
하나.
결국, 온전히 짜고 치는 판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두세 명 정도의 내정자도 아니고, 이미 TOP 10을 꽉 채우다 못 해 갑작스레 룰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TOP 11의 내정자를 모두 정해 놓았을 줄이야.
그렇게나 청탁이 많이 들어왔나?
하기야, 이번 K-싱어스타는 워낙 대규모인 데다가, 방송 화력도 좋은 편이니 지켜보던 여러 기획사에서 너나 할 거 없이 손을 뻗어 판에 끼어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고액의 계약금과 회차당 높은 출연료를 보장받으며, 제작진들의 요구에 협조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터라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더러워도 어쩌겠어….’
그때 고현덕 CP가 한차례 제 두 손을 파리마냥 비벼 대고는 정리하듯 정리했다.
“이번 중간 평가는 다소 많은 관여를 하려고 하오니,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해요.”
그 말에 이영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 답하기도 잠시.
“어?”
서류를 쭉 훑어보던 이영아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고.
‘윤제이….’
명단 맨 아래에는 급하게 볼펜으로 추가 작성한 ‘윤제이’란 글씨가 보였다.
‘얘도 소속사에 들어간 건가?’
청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TOP에 오를 자격이 충분한 참가자랄 수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배신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여타 다른 참가자들처럼 방송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보단, 어떻게 들릴지를 더 고민하던 참가자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일까? 요즘 보기 드문 스타가 아닌 가수(歌手)를 꿈꾸는 자라 믿었기 때문일까?
이윽고.
이영아는 씁쓸한 헛웃음을 흘려 보였다.
‘당연한 선택을 한 거지, 뭐.’
그래, 참가자 입장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 * *
한편.
비즈니스실 안으로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저, 저기….”
윤제이는 제 앞에 앉은 헬멧을 뒤집어쓴 HS와 처음 보는 풍채 좋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를 왜….”
조심스럽게 꺼낸 물음은 결국 끝을 맺지 못했고.
“왜 너를 여기에 불렀냐고?”
HS가 대신 뒷말을 이으며 되물었다.
“네….”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윤제이는 헬멧을 뒤집어쓴 HS를 지그시 바라봤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네가 꼭 합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LS 엔터랑 계약을 안 해도 되거든?”
“네? 갑자기 무슨….”
“근데 남아 있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별 시답잖은 이유로 쫓겨나는 건 가만히 보고 있기가 좀 그래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던 HS가 더는 설명하기가 귀찮다는 양 헬멧 뒤통수를 긁어 댔고.
이내.
아주 단호한 투로 부연했다.
“한 마디로 넌 소속사도 뭣도 없어서 TOP10에서 떨어지게 될 예정이야. 그렇게 결정이 났거든.”
“아…….”
“근데, 걱정하지는 마. 조금 전에 바뀌었어. 넌 지금 LS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될 거고.”
잠시 말을 멈춘 HS는 김 실장으로부터 전달받은 서류 뭉치를 윤제이 앞으로 쭉 내밀었다.
“TOP 11의 기회가 쥐어졌지.”
“네…?”
“물론, 네가 무대를 망치면 탈락하겠지만.”
헬멧 너머로 보이는 HS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자, 윤제이는 흠칫 몸을 떨고는 고개를 푹 떨궈 버렸다.
그래.
처음 지원했을 때는 그저 제 경험을 넓히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전’에 의미를 뒀다.
최종 예선에서 탈락이라는 문턱을 밟았었는데….
기사회생으로 살아나 어느덧 고지가 코앞이지 않나? 정말 제 앞에 있는 심사위원의 명예를 망치지 않으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열심히 달려왔다.
탈락.
두 음절로 이루어진 그 단어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채, 그저 이를 꽉 깨물고 매 라운드 혼신을 쏟아부었다.
‘탈락….’
근데 돌연 탈락이라는 단어가 심장 안으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았다.
‘맞아, 탈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짙은 어둠으로부터, 지독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제법 생기있고, 빛이 나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제법 좋은 가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걸까?
탈락이라는 두 음절이 자신을 현실로 다시 불러들이며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야.”
그때 상념에 잠겨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 윤제이를, HS가 불러 세웠다.
“뭔 생각하냐?”
“아, 그게….”
“계약 안 해?”
“아, 아니요.”
그리고는 재촉하듯 검지로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톡톡 두들겼다.
“잘 읽어 보고 사인이나 해.”
그 말에 윤제이는 상념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펜을 들었다.
“야, 계약서 읽어 보지도 않고, 바로 사인부터 하게?”
“예? 다른 곳도 아니고 LS 엔터테인먼트잖아요….”
이내 HS는 계약서를 한 장씩 넘겨주며 다그치듯 부연했다.
“독소조항은 없는지, 계약금 조건은 네가 원하는 바에 충족하는지 다 살펴보고 사인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물론 독소조항 따위도 없거니와, 되레 신인 기준 정산 비율도, 계약금도 가장 높게 측정해 놓은 계약서였다.
사락, 사락-.
그의 다그침에 윤제이가 서류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레 넘겨 가며 내용을 확인하던 찰나였다.
“어?”
윤제이의 시선이 계약금이 적힌 칸에서 멈췄다.
“이게….”
비록 표준 계약 조건에 대해 잘 모른다지만….
“말도 안 돼….”
살면서 자신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운 좋게 의류 브랜드 홍보 모델로 발탁되며 계약금을 받았었다. 그때 당시 받은 계약금만으로도 밀린 공과금과 더불어 올해는 월세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좋아했는데….
이젠 끓인 물을 부은 바가지 앞에 쪼그려 앉아 씻지 않아도 되고, 세면대 앞에 서서 세수할 수 있는 집을, 무려 전세로 구할 수 있을 만큼의 계약금이 쥐어진 셈이었다.
그뿐이랴?
다른 지망생들은 LS 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표현할 정도였으니, 정말 말 그대로 인생역전(人生逆轉)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왜? 계약 조건이 별로야?”
“아니요. 그럴 리가요!”
HS의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인 윤제이는 다시금 믿기지 않는다는 양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요….”
어느새 마음속에 ‘탈락’이라는 두 음절이 지워지고 ‘희망’이라는 글자가 덧대어 새겨졌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희망을 안겨준 그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노라 다시금 결심하며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제 인생이 단번에 바뀐 기분이라서요.”
그래, 비탈길 같던 제 인생에 잘 포장된 지름길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라….”
HS는 계약서를 쥔 윤제이의 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려 오는 걸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인생이 원래 그렇더라고.”
그리고는 한 차례 텀을 두고 다시 한번 넌지시 읊조렸다.
“절망 속에서도 불현듯 기회가 오더라고.”
무심하게 던진 그 말은….
“내가 살다 보니 그렇더라고.”
경험담에서 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