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343
1342화. 구하러 갈 것입니다. (2)
사패련 군사부의 재경관 서문유는 까마득하게 높은 흰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제 복색을 정비했다. 허리끈을 단단히 조이고 늘어진 바짓자락을 추어올렸다.
“후우⋯⋯.”
준비를 마친 후에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따악. 따악.
대리석을 밟는 발소리가 아래에 이어진 커다란 광장까지 울려 퍼졌다.
혹자는 이 대리석 계단의 존재는 장일소의 고약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라 말한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계단. 굳이 필요하지 않은 화려함. 세간에 알려진 요란하기 짝이 없는 장일소의 모습 그대로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직접 이 계단을 올라 본 이라면 그런 평가 따위는 입에 담지도 못할 것이다. 이 계단을 올라 장일소를 대면하러 갈 때마다 얼마나 큰 긴장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하는 이라면 말이다.
새하얀 외길을 따라 모두 오르고 나면 웅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대전이 계단을 오른 이를 맞이한다.
그 압도감을 아래에서 내내 보기만 하는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후우⋯⋯.”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뙤약볕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련주께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대전 앞을 지키던 홍견들이 번들대는 눈으로 서문유를 노려보았다. 장일소의 명이라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송곳니를 드러내는 사냥개들. 이들을 마주하는 건 같은 만인방 소속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견의 시선이 서문유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한낱 문사에 불과하니 무슨 수를 써도 장일소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그런 서문유를 상대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들어가라.”
홍견들이 문을 열어 준 후에야 길고 긴 과정을 끝내고 마침내 대전에 들 수 있었다. 향로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향이 코로 끼쳐 왔다.
대전은 집무를 보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그저 알현을 위한 장소다. 황량하기까지 한 그 공간 중앙에 커다란 옥좌가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 화려한 황금 용이 수놓인 붉은 장포 차림의 장일소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 대전은 결코 큰 게 아니다.
서문유는 새삼스레 실감했다.
황량할 정도로 넓어 보이던 대전이 장일소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오히려 좁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말이다. 만일 대전이 지금보다 좁았다면 장일소의 존재감에 숨도 쉬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도 장일소를 모셔 온 게 벌써 몇 해째인데 이렇게 배알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서문유는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차라리 몸을 숙이고 엎드려서 다가가면 긴장이 덜할 것 같은데 장일소는 제 시선이 닿는 곳에서의 허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련주님.”
침상 같은 옥좌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장일소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른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색 옅은 눈동자가 드러나자 서문유는 순간 무언가가 자신을 꿰뚫는 듯한 감각에 전율했다.
“보, 보고를⋯⋯. 물자 수급에 대한 장부입니다.”
서문유가 조심스레 제 손에 든 장부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럴 때는 자리를 비운 호가명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본래 이 장부는 장일소에게 들어갈 필요 없이 호가명의 선에서 확인이 끝나야 했다. 그런데 호가명이 자리를 비우며 장일소에게 직접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장일소의 눈동자가 천천히 옮겨져 서문유의 손에 들린 장부에 가 닿았다. 빤히 장부를 보던 장일소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비가 조심스레 뒤쪽에 놓여 있던 커다란 인장을 들고 왔다. 사패련의 련주를 상징하는 인장의 겉을 황금으로 조각된 용이 휘감고 있었다. 황제의 옥새도 이보단 덜 화려할 듯했다.
“대령하였습니다.”
시비가 장일소의 손 바로 앞에 받쳐 들고 온 인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무심한 손길로 인장을 들더니 서문유의 앞으로 내던졌다.
텅! 터엉!
사패련을 상징하는 귀하디귀한 귀보가 한 줌 가치 없는 돌덩어리처럼 내전 바닥 위로 굴렀다. 앞으로 떨어진 인장을 바라보는 서문유의 등에선 식은땀이 배어났다.
저걸 감히 손으로 잡아도 되는 것인가? 그 자체로 불경이고,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단 듯 심드렁하게 몸을 돌려 누웠다.
“적당히 찍고 가려무나.”
“예⋯⋯? 예, 련주님!”
서문유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쳐 든 그는 바닥에 떨어진 인장을 조심스레 잡았다. 황금으로 만든 인장이 부스러질까 봐 겁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자꾸 속눈썹을 적시고 눈에 들어오는 땀을 소매로 연신 닦아 낸 후에야 힘겹게 인장을 찍었다.
끝이다. 이제 겨우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정말 찰나에 불과한 한숨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든 서문유는 보았다. 그를 등지고 누웠던 장일소의 시선이 어느새 그에게로 돌아와 있는 것을 말이다.
순간 서문유의 등을 타고 차가운 한기가 쏟아졌다.
“흠.”
피처럼 붉게 칠해진 장일소의 입술 끝이 싱긋 가볍게 올라갔다.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문유를 빤히 바라보던 장일소가 느릿하게 말했다.
“이리로.”
“⋯⋯예?”
“그거 이리 가져와 보렴.”
서문유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장일소는 조금 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결국 서문유는 장일소를 향해 홀린 듯 다가갔다. 쥐고 있던 장부를 조심스레 내미니 장일소가 느릿한 손길로 받아 들어 훑었다.
“흐음.”
묘하게 웃음 서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 후 탁 소리와 함께 장부를 덮은 장일소는 서문유를 마주 보며 웃었다.
“모르겠구나.”
“⋯⋯.”
“이런 건 영 적성에 맞질 않아서 말이야. 봐도 머리 안에 들어오질 않는단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서문유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명이 녀석은 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문사라는 족속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장난스러운 말투와 가벼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서문유는 오히려 더 움츠러들었다. 그를 응시하는 장일소의 눈이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말해 보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 장부는 정확하니?”
“무, 물론입니다, 련주님!”
서문유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황급히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장일소가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가, 감히 련주님께 드리는 보고에 어찌 거짓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장부의 숫자 하나, 토씨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장부 내에 기재된 숫자와 현재 련 내에 들어와 있는 물품의 숫자가 정확히 들어맞는지도 일일이 확인을 마쳤습니다!”
“흐음?”
“단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서문유가 거의 쑤셔 박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장일소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 들어맞는다라⋯⋯.”
날카롭던 장일소의 눈이 다시 나른하게 풀렸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만사가 귀찮은 듯 보였다.
“그럼 다행이구나.”
서문유의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의 의복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가명이가 자리를 비워서 네가 고생이 많겠어.”
“미력하게나마 군사의 자리를 메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좋은 대답이구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예?”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가명이가 하는 일은 단순히 장부를 맞추는 게 아니란다. 나와 직접 닿는 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잘 알아야 하지.”
서문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일소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려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니?”
“저, 저는 잘⋯⋯.”
“이런, 이런. 모르면 안 되지.”
장일소가 손을 뻗었다. 가늘고 흰 손가락 끝, 길게 자란 손톱이 서문유의 이마에 닿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눈썹의 끝을 스쳐 뺨까지.
“알아 두렴. 나는 나를 속이려 하는 이는 싫어하지 않는단다.”
“려, 련주님. 저는⋯⋯.”
“내가 싫어하는 건⋯⋯.”
따끔.
장일소의 손톱이 닿은 뺨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톱이 그의 피부로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서문유는 눈 하나 깜빡할 수 없었다.
“나를 속이지 못하는 것들이란다.”
장일소의 입꼬리가 기괴할 만큼 환하게 벌어졌다. 실로 요사스러운 웃음이었다.
투둑.
손톱이 점차 깊게 박혀 든다. 그 감각이 서문유의 정신을 한없이 혼미하게 만들었다. 아니, 정신을 앗아 가고 있는 건 고통이 아니라,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에 대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말해 보렴.”
장일소의 눈빛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해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연신 들끓는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그 눈을 앞에 둔 것만으로도 심장이 자꾸 죄어들었다.
“가명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피처럼 붉은 장일소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 아이가 나마저 속여 가며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말이다.”
서문유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
턱을 괸 채 옥좌에 기대앉은 장일소가 흥미롭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해남에?”
“그, 그러하옵니다!”
서문유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지경으로 조아렸다.
장일소가 과례를 싫어한다는 거야 알지만, 지금은 그런 걸 떠올리고 헤아릴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조아리고 또 조아릴 수밖에.
“흐음.”
희미한 비음을 흘린 장일소는 그러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문유로서는 감히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짐작해 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하⋯⋯ 하하하핫.”
이윽고 장일소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다가도, 또 어찌 보면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나 했더니.”
장일소의 목소리는 분명 조금 전보다 들떠 있었다.
“화산검협이라.”
서문유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말라붙은 목이 찢기는 듯 아팠다.
장일소 앞에서는 모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하지만 이건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호가명이 약조했던 시간은 지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호가명의 지시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호가명의 당부가 있었고, 서문유가 군사의 명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가명이 장일소를 속인 것은 사실이다.
이 모든 보고를 올린 이가 호가명 본인이라면 서문유만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만일 장일소가 분노한다면 그 화는 모조리 이 자리에 있는 서문유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서문유의 모든 신경은 장일소에게로 쏠려 있었다. 한번 말라붙었던 뺨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흐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눈을 감고 깊은 어딘가로 침전해 버린 듯 장일소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서문유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장일소가 눈을 떴다.
“가명이가⋯⋯.”
옅은 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내뿜으며 이글거렸다.
“꽤 주제넘은 일을 벌였구나. 재미있게도 말이야.”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호가명에 대한 분노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놀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기이한 열기가 실려 있을 뿐.
장일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처럼 붉은 그의 장포가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화산검협⋯⋯. 화산검협.”
엎드린 서문유를 넘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던 장일소가 조용히 웃었다. 어딘가 비틀린 웃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와 준다면 환영해 주지 않을 도리가 없어지잖니. 응?”
장일소가 걸음을 옮겼다. 서문유가 기겁하여 고개를 조아렸지만, 장일소는 이미 서문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권태로움과 나른함은 씻긴 듯 온데간데 없다. 그의 걸음마다 패도가 넘쳤다.
쾅!
그가 양손으로 단번에 문을 열어젖히니 대기하던 홍견들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숙였다.
장일소가 명했다.
“단주들을 불러라. 홍견들도 모두!”
“예, 련주님!”
홍견들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이미 출발한 이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장일소는 계단 꼭대기에 섰다. 웅장한 사패련 본단을 넘어 드넓게 펼쳐진 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화산검협.”
장일소의 두 눈이 섬뜩한 호선을 그려 냈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여기까지란다.”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세상.
하지만 장일소의 두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저 먼 남쪽에서 피어오른 피처럼 붉은 화염이 세상을 뒤덮어 가는 광경이 말이다.
한번 피어오른 불꽃은 이 세상을 모조리 집어삼켜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