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571
1570화. 산책은 이런 날에 가는 거란다. (5)
“대체 왜 종남 놈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냐!”
선두에서 무자비한 검격을 날리는 이들의 가슴팍에 구름을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광경이 흑룡왕의 두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종남은 화산과 견원지간이나 다름없을진대, 어째서 이 먼 곳까지 와서 화산을 돕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저놈들이 움직이는 모양새는 명백히 흑룡왕 하나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
이를 갈아붙이니 검은 수염이 자란 건장한 턱에 힘줄이 불거진다.
바로 그 순간, 귓가에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이라도 나나?”
흑룡왕의 고개가 묵직하게 돌아갔다. 짓씹은 입술과 핏발 선 눈만 봐도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모욕을 느끼는지 보였다.
그의 매서운 시선 끝에선 다 죽어 가는 남궁도위가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설마? 천하의 흑룡왕이?”
“입을 아주 찢어 주마!”
파아아앙!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흑룡왕의 언월도가 맹렬히 휘둘러졌다. 남궁도위가 검을 들었다. 미약한 백색 검기를 품은 검이 날아드는 언월도를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당연히 역부족이다. 남궁도위의 몸은 흡사 어린아이가 던진 물수제비처럼 땅을 들이받고 튕겨 오르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선지피를 줄줄이 게우면서도 말이다.
“흐으⋯⋯. 사람의 가치⋯⋯는 죽을 때⋯⋯ 나오는⋯⋯.”
“이⋯⋯!”
흑룡왕이 있는 힘을 모두 실어 언월도를 움켜잡고 남궁도위를 향해 쇄도하려 할 때였다.
“진정하시지요, 흑룡왕. 지금은 물러서야 합니다.”
흑룡왕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다 죽어 가는 남궁도위 대신에 말리는 이를 천참만륙 내 버리겠다는 듯 살기등등했다.
그러나 그 살벌한 기세를 받으면서도 흑룡왕을 말린 이의 얼굴은 이렇다 할 동요 없이 담담했다.
“임무를 잊지 마십시오.”
으드드득!
흑룡왕이 이를 악물었다. 언월도를 쥔 손이 노기를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렸다.
흑룡왕 적세광이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장이자, 드넓은 장강의 주인.
그런 그에게 감히 장일소도 아니고 호가명 따위가⋯⋯. 아니, 심지어 그 호가명의 졸개 따위가!
“흑룡왕!”
하지만 순간적으로 언월도에 잔뜩 밀려 들어갔던 기운은 이내 기세를 잃고 흩어졌다.
으득.
분풀이라도 하듯 제 아랫입술을 물어뜯어 버린 흑룡왕은 입 안으로 고이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언월도를 내렸다.
“저딴 놈들 때문에⋯⋯.”
“여기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습니다. 복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말입니다. 고작 저 몇 놈을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시잖습니까.”
흑룡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만인방도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 앞에서도 만인방도는 무표정했다.
‘군사전(軍師殿)이라 했던가?’
그 호가명이 키운 놈들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주둥이는 놀릴 줄 아는 놈들이다.
그리고 흑룡왕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이런 놈들이었다는 것을.
“어찌해야 하는가?”
“저놈들은 부나방일 뿐입니다.”
만인방도가 이곳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무시무시한 기세다.
“화살은 무섭습니다. 특히나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은 역전의 장수도 피하지 못하는 법이지요.”
“으음.”
“하지만 과녁이 없는 화살은 고작해야 신호전(信號箭).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합니다.”
“도망치자는 말을 고상하게도 하는 재주가 있군.”
“몸을 잠시 물리는 걸 두고 달아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역사 속의 모든 용장도 겁쟁이에 불과하지요.”
흑룡왕은 자신에게 돌진하고 있는 화산과 종남의 애송이들을 슬쩍 일별했다.
‘확실히⋯⋯.’
과거의 그라면 당장에 저놈들을 모조리 곤죽 내려 했을 것이다. 그게 위험한 짓이라는 판단이 선다고 해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 많은 수하 앞에서 애송이들을 피해 물러설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흑룡왕은 다르다.
“대신⋯⋯ 저놈들이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네놈부터 찢어 죽여 버리겠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담담한 확신에, 흑룡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러고도 못내 찝찝한 모양인지, 접근해 오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
“흑룡왕!”
군사의 목소리에 묘한 다급함이 실렸다.
“흥!”
결국 흑룡왕이 거칠게 몸을 들리는 순간이었다.
“어딜⋯⋯ 가려고?”
“⋯⋯.”
겨우 진정되었던 흑룡왕의 얼굴에 지독한 노기가 치솟았다.
으드득 이를 갈며 돌아보니, 어느새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다가오는 남궁도위가 보였다.
“겁⋯쟁이 놈이⋯⋯.”
“이⋯⋯!”
“격장지계일 뿐입니다, 흑룡왕! 내버려 두십시오!”
흑룡왕은 남궁도위를 눈으로 태워 버릴 듯 노려보다 다시 몸을 돌렸다.
“하아아압!”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남궁도위가 도약하며 흑룡왕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기세가 간신히 억눌렀던 흑룡왕의 노기를 터트려 버렸다.
흑룡왕이 짐승의 포효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남궁도위를 향해 전력으로 도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남궁도위의 몸이 쏘아질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다시 튕겨 나갔다.
우드득!
흑룡왕이 부러뜨릴 기세로 콱 움켜쥔 언월도를 재차 휘두르려는데, 다시 한번 말리는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흑룡왕! 여기서 죽을 셈입니까!”
“으!”
흑룡왕의 팔이 덜덜 떨렸다.
“그 팔을 잃었던 때를 잊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흑룡왕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군사전에서 온 이를 노려보며 그가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그 일을 입에 올리면 네 아가리부터 찢어 주마!”
“진정하십시오.”
흑룡왕이 마지못해 언월도를 내린다. 손은 여전히 굴욕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못⋯⋯ 간⋯⋯.”
이젠 일어서지도 못하는 남궁도위가 검을 쥔 채 기어 오고 있다.
흑룡왕의 두 눈에 순간 질린 기색이 어렸다.
남궁도위가 부득부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풀려 있었다. 순간, 흑룡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대체 이놈들은⋯⋯.”
“흑룡왕!”
“앞장서라!”
“예!”
치욕과 분노, 굴욕, 그리고 어쩌면 껄끄러움까지.
그 모든 것을 꾹꾹 억누르며 흑룡왕은 앞장선 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 셈이냐?”
“남은 장강으로 막혀 있으니 좋은 수가 아닙니다.”
“장강에는 내 배가 있다.”
“그러니 좋은 수가 아닙니다. 우선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게 좋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딱히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 것이다. 뒤에 있는 애송이들이 흑룡왕에게 도달한다면 먼저 죽는 것은 자신일 테니.
“그럼 시간 끌지 말고 움직여라!”
“으아아아아압!”
조걸의 검이 벌써 몇 차례 적의 목을 뚫었다.
그런 그를 노리던 이의 손목을 유이설이 작살째 베어 버렸다.
“비키라고, 이 새끼들아!”
조걸이 거친 욕설을 쏟아 내었다.
이러다 남궁도위가 죽는다. 누가 봐도 이제 한계였다. 더는 눈앞에서 그가 아는 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저리 꺼⋯⋯. 엇?”
그때 조걸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사, 사형!”
“왜!”
“흐, 흑룡왕이 달아납니다!”
“뭐?”
검을 휘두르던 윤종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의 눈도 커다래졌다.
“저, 저거⋯⋯!”
그도 본 것이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장이자, 사파에서 가장 명성 높은 네 사람 중 하나인 흑룡왕이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광경을.
“아니⋯⋯.”
윤종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달아난다? 그럴 수 있다. 위험에 처하면 몸을 빼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흑룡왕은 그럴 수 없다. 천하에 명성 높은 흑룡왕이 고작 정파 후기지수들을 피해 달아난다면 세상이 뭐라 하겠는가? 살아난다 해도 평생 비웃음과 조롱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흑룡왕이 저런 식으로 달아나는 꼴은 생각도 안 했건만.
“빌어먹을⋯⋯.”
백천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억눌린 채 새어 나왔다.
쫓으려면 쫓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저 흑룡왕을 잡을 수 있는가?
어렵다.
길을 열어 가며 쫓아야 하는 그들과, 거치적거리는 이 없이 달아나면 그만인 흑룡왕.
둘 중 누가 더 제 목적을 이루기에 유리한지는 세 살 아이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자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멈출 도리도 없다.
이미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다시 몸을 돌리면 파고든 만큼의 적을 다시 의미 없이 베어 내야 한다. 심지어 조금 전보다 더 정돈되고 여유를 찾은 적들을 말이다.
주변에 있는 이들은 어찌어찌 살아나갈 수 있을 테지만, 남궁세가와 등 뒤에 남겨진 이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멍청한 녀석.”
백천의 갈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검이 섬전처럼 허공을 스친다.
단번에 세 수적의 가슴을 횡으로 베어 낸 진금룡이 차게 조소하며 말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을 되돌릴 수 있나?”
“⋯⋯진금룡.”
“내가 길을 연다. 지금은 다른 수가 없어.”
옳다. 한없이 옳은 말이었다.
백천은 빠르게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길을 열어라!”
“예!”
백천의 명에 화산 검수들의 검이 조금 전과 사뭇 달라졌다.
마지막 순간 흑룡왕의 육신에 검을 꽂아 넣기 위해 여력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힘까지 쏟아부어 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거치적거린다! 비켜라!”
“막으면 죽어!”
“하아아압!”
화산과 종남의 검이 너 나 구분할 것도 없이 맹렬하게 수적들을 분쇄한다.
“아아아아아아악!”
“히, 히이익!”
막아서는 이는 비명에 횡사했고, 아직 막아서지 못한 이들은 겁에 질린 채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흑룡왕의 등은 계속 작아지고 있다. 이 순간에도 간격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남궁 소협!”
“소가주!”
마침내 남궁도위가 쓰러진 곳까지 도달한 조걸이 거의 네 발로 뛰다시피 달려가 그를 부축하고 안아 세웠다.
“괜찮습니까!”
“빌어먹을, 어떻게 이 지경까지⋯⋯!”
윤종과 조걸이 동시에 걱정과 노기를 토해 냈다.
“흑룡⋯⋯. 놈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남궁도위가 묻자 조걸이 얼굴을 굳혔다.
“지금 쫓고⋯⋯.”
그 순간 남궁도위가 조걸의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그런 힘이 어디에 남아 있었는지 놀라울 만큼 대단한 악력이었다.
“소가주님?”
“나를⋯⋯. 나를!”
조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궁도위가 무얼 말하는지.
그를 단숨에 등에 업었다. 그리고 앞서 길을 열고 있는 사숙에게로 따라붙었다.
“놈은요!”
“저기!”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그새 흑룡왕은 더 멀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체면도 모르는 사파 놈 같으니! 애새끼들이 무서워서 도망을 쳐?”
“큭⋯⋯.”
조걸의 등 뒤에서 힘겨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소가주?”
조걸은 순간 안쓰러운 마음에 얼굴을 굳혔다. 저 웃음에 얼마나 큰 허무가 담겨 있을지 다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이를 놓친 데다, 이제는 목숨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니.
그런데 남궁도위가 뒤이어 중얼거린 말은 영 예상과 달리 뜬금없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대체 왜 나온단 말인가, 조걸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때였다.
“걸아! 저기! 저, 저기!”
“뭐요? 갑자기 왜요?”
조걸은 보았다. 아니, 먼저 들었다.
저 멀리서 아련하게 울려 왔다. 생각도 못 했건만, 그래서 더 반갑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소리였다.
“아―미―타―불―!”
이젠 너무도 익숙한 황금빛 불광과 웅혼한 불호.
“스니이이이이이이임!”
“혜연 스니이이이이이임!”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난 혜연이 달아나는 흑룡왕의 앞을 막아섰다.
타인을 위해 제 역할을 해낸 이가, 제 일을 두고 달아나는 이를 막아선다.
“지금이다! 따라잡아라!”
“예!”
마지막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던 백천이 검에 힘껏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 의지가 한순간이나마 그의 검에 과거와 같은 정교함을 불어넣었다.
새빨간 매화가 피어난다.
비록 색이 맑지 않고 탁하게 검붉어 애처로우나, 그만큼이나 무겁고, 또 치명적이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검기에 휩쓸린 이들이 전신에서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연 길로 진금룡이 내달렸다.
“멍청한 놈이! 약해 빠졌으면 물러서 있어라!”
흰 검기가 눈보라처럼 흩날린다. 그러나 그 안으로 실린 내력은 차갑기보다 되레 뜨거웠다.
“하아아아압!”
진금룡의 검이 적을 흐트러뜨리고, 그 위로 올곧은 수직의 검기가 내려꽂힌다. 세상을 일도양단할 듯 바르고 단호한 검.
이송백이 아니라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을 검기다.
“가십시오, 장문대리! 조걸 도장!”
감사의 인사를 할 틈도 없다. 남궁도위를 업은 조걸과 백천이 튕기듯 쏘아졌다.
목표는 오직 하나. 혜연과 정면으로 맞붙고 있는 흑룡왕의 등이었다.
“적세과아아아아아아아앙!”
흰 무복을 휘날리며 비조처럼 쏘아진 백천이 허공을 양단하는 듯 검을 휘둘렀다.
“큭!”
혜연을 밀어 내려던 흑룡왕이 다급히 제 몸을 뒤틀었다.
서걱!
하지만 흑룡왕의 얼굴에 이내 길고 붉은 선이 생겨났다.
주륵.
새겨진 상처와, 흘러내린 한 줄기 피가 그 얼굴에 붉은 정(丁)자를 새겨 넣었다.
백천은 흔들림 없는 검으로 흑룡왕의 목을 겨누었다.
“여기까지다, 흑룡왕.”
흑룡왕 적세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