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595
1594화. 부처도 너를 버린 거란다. (4)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가 기어이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면서도 법계는 쉬지 않고 나아갔다. 상처투성이 육신은 진즉에 한계에 달했지만, 그의 정신은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부여잡고 있었다.
턱.
평범한 이의 걸음보다도 훨씬 느리다고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비척댄다고 해도. 그럼에도 법계는 나아갔다. 등에 법정을 업고.
이건 법계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등에 업힌 법정은 산 채로 지옥을 겪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또 어디선가 누군가가 죽어 가는 참혹한 비명이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법정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또 하나의 목숨. 또 하나의 절망. 그리고 또 하나의⋯⋯.
“법⋯계⋯⋯.”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다.
그러면 전신을 칼로 저미는 것보다도 더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제자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죽어 가는 소리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를 살리는 게 이제 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못한 삶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이다. 적어도 지금의 법정에게는 남은 삶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 천형(天刑) 같은 입마(入魔)는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지언정 의식은 생생히 남겨 두었다. 그야말로 살아서 겪는 지옥이었다.
“나를⋯⋯.”
그는 안간힘을 다해 법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물론 제대로 힘조차 들어가지 않은 무력한 손길이었다.
“제발, 법⋯⋯계⋯⋯.”
나를 내려놓고 너라도 살아나가라.
그의 입은 그 짧은 한마디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법계는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법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법⋯⋯.”
“⋯⋯기억합니까? 사형.”
법계가 휘청휘청, 천근만근인 다리를 또 한 번 내디딘다.
다 타 버린 초처럼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육신이건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담담했다.
“예전에⋯⋯ 말입니다.”
“⋯⋯.”
“⋯⋯저는 소림에서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법계의 목소리는 그저 중얼거림 같기도 했다.
“천생이 우둔하고, 외골수 같⋯⋯던 제게 소림은 잘 맞지 않았지요. 아직도 기억납니다. 사형제들의 한숨과 스승들의 엄⋯⋯한 눈초리가.”
“법⋯⋯.”
“그때, 제⋯⋯ 편을 들어준 이가 사형⋯⋯이셨지요.”
금방이라도 잦아들 듯하면서도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적어도 법정의 귀에는 확연히 들렸다.
“그때 사형의 말을, 저는 아직⋯⋯ 아직 기억합니다. 우둔하다는 건 불자⋯⋯로서 다시없을 복이다. 우둔하기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불법만을 궁구할 수 있고, 우둔하기에 작은 유혹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는 훌륭한 수행자의 덕목을 이미 갖춘 이라 할 수 있다⋯⋯.”
법계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선명해진다.
그 의미를 똑똑히 아는 법정은 그저 법계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십니까?”
법정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아마 답하지 못했으리라.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우스운 이야기다.
누군가는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일로 여기며 가슴에 품고 있었을 일을, 정작 누군가는 그저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일로 여겼단 게.
우습지만, 웃을 수 없었다. 서글펐다.
“그때⋯⋯ 사형은 소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재셨지요. 기뻤, 허억, 기뻤습니다. 그런 사형이 저를 인정해 준다는 게. 어쩌면 그래서 저는 소림에서 지금껏 버텨 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두 사라져 버린 뒤인데.
그가 쌓은 죄가 태산 같은 무게로 짓눌러 와 숨조차 쉬기가 버거운데, 그런 게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제 와 말하지만⋯⋯ 사형.”
“⋯⋯.”
“⋯⋯저는 사형이 싫었습니다.”
법계가 또 한 발을 내디뎠다.
알 수 있다.
이건 법정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법계는 법정을 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나아가고 또 나아갈 뿐이다.
우둔하게, 그리고 어리석게.
“사형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지켜보자면 제가 너무도 초라해졌습니다. 그래서 계율에 집착했지요. 그건, 저같이 우둔한 이도 알면 지킬 수 있으니까.”
“법⋯계⋯⋯.”
“계율에 얽매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게, 사형은⋯⋯ 사형은 너무도 빛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싫었고⋯⋯ 때로는 증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머릿속에 남은 게, 사형을 살리는 것뿐인 걸 보니, 어쩌면⋯⋯ 저는 제 생각보다 사형을 좋아했나 봅니다⋯⋯.”
푸스스 흐려지는 웃음이 들려왔다.
법계의 옷자락을 움켜쥔 법정의 마른 손이 파르르 떨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 따윈.
“돌이켜 보자면⋯⋯.”
고통으로 가득하던 법계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게⋯⋯ 그게 인연인 게지요.”
콰당.
다리에 힘이 풀린 법계가 법정과 함께 나뒹굴었다.
하지만 육신에선 더 이상의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법계⋯⋯. 나⋯⋯를⋯⋯. 너라도⋯⋯.”
등 뒤에서 법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법계는 띄엄띄엄 들려오는 간절한 말을 무시하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법정을 고쳐 짊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눈길 닿는 곳마다 천 길 낭떠러지다.
어디로 내디뎌도 추락하고 굴러떨어진다. 고통의 길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법계는 그 흐릿한 가시밭길로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기 있었으리라.
또 다른 인연들이. 만생의 인연으로 그의 제자가 된 이들이.
실로 허무한 그 죽음의 끝에,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미⋯⋯.”
불호를 완성하지 못한 건, 그저 힘이 다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정말 지켜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저 많은 이들을 저리 가게 두었나이까.
법계의 주름진 두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그저 힘이 다하지 않았으니 나아갈 뿐이다. 마치 지금껏 그가 살아온 방식처럼.
“고해(苦海)⋯⋯.”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등에 짊어진 게 무엇인가.
그가 지키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신음하는 한 중생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의 업(嶪)인가?
어쩌면 그 모든 것인가.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살아⋯⋯.”
파아아아앗!
그 순간, 뒤에서 도기가 법정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법계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법정을 감쌌다.
콰드득!
도기가 법계의 몸에 사선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피투성이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 도로 나뒹굴었다. 묶어 둔 옷자락이 잘려 나가며 법정의 몸이 저만치 처박혔다.
“⋯⋯거머리 같은 놈들.”
저벅. 저벅.
이름에 걸맞게, 전신을 붉게 적신 적호가 도를 끌며 걸어왔다. 그가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먼 거리를 격해 법계의 귀에도 들려왔다.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나?”
소림의 제자들은 실로 지독하게 그를 막아섰다. 죽어 시신이 되어서도 그를 붙잡고 늘어지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 내고 오는 길이었다.
살기가 끝까지 치솟은 적호의 두 눈이 흉악하게 번뜩였다.
그 순간 법계의 손이 법정의 등을 떠밀었다.
“가십⋯⋯시오, 사형.”
“법계⋯⋯.”
“가란 말입니다!”
“⋯⋯.”
“절대로, 잊지⋯⋯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소림의 방장이외다.”
그 말을 끝으로 법계는 몸을 일으켰다. 법정의 대답 따윈 기다리지 않았다.
법정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법계는 이미 힘을 다했다.
하지만 법정은 그를 두고 갈 수밖에 없다.
법계는 설령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고 해도 적호를 막아설 것이다. 찢겨 나간 육편 한 조각까지 저자의 앞을 가로막으려 들겠지.
법정이 손으로 땅을 힘껏 짚었다.
가야 한다. 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 저들의 죽음이 그저 개죽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땅을 긁으며 몸부림을 쳤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이런 순간에도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법정은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땅을 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엄한 소림의 방장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비천한 모습이다. 땅을 그러쥐자 손톱이 빠지고, 무거운 몸뚱이를 끄느라 앙상한 손이 형편없이 덜덜 떨린다.
소림의 방장 법정이 땅을 기며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법정은 피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땅에 비비며 어떻게든 조금씩이나마 기어 나아갔다.
“흐⋯⋯.”
오열 섞인 실소가 흙 묻은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대체 무엇을 손에 거머쥐려 했던 걸까.
홀로 얻어서는 그저 허깨비일 뿐인 것을. 어째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던가?
짧은 단말마가 들려온다.
‘법계⋯⋯.’
시선을 돌릴 수도 없다. 법정은 그저 발로 아등바등 땅을 밀어 대었다. 자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 믿었더냐?
왜 마지막까지 원망의 말 하나 하지 않았느냐?
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게 그임을 알았을 텐데도. 그런데도 어찌 칼날 같은 말 한마디 박아 넣지 않고 그리 가느냐.
그 가슴에 겹겹이 쌓였을 원망을 어찌 한 마디도 풀어놓지 않고 그냥 가느냐.
“흐으⋯⋯.”
살아남아야 한다.
저벅.
환청인지 무엇인지, 어디선가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지만 법정은 그저 손을 뻗었다. 시린 얼음장 위를 기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나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가 어렸던 시절.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아직 가득했던 시절. 그런 그를 바라봐 오던 작은 동자승이 있었다. 조금 미련하고, 조금 아둔해 보였다.
환히 웃지도 못하고 수줍은 미소만 짓던 그의 사제.
‘법계⋯⋯.’
그 뒤로 숱한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스승, 그의 제자, 그리고 그의 사제들과⋯⋯ 그가 저버리지 말아야 했던 이들의 얼굴이.
“으⋯⋯.”
덜덜 떨리는 법정의 손이 앞을 향해 간절히 뻗어졌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걸 어떻게든 쥐어 보려는 듯.
그러다 이내 아래로 힘없이 툭 떨구어졌다.
툭.
그런데 상처로 무뎌지고 뭉툭해진 손끝에, 땅이 아닌 다른 게 닿았다.
법정은 감기던 두 눈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흐린 시야에 무언가 낯선 것이 들어왔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법정은 힘겹게, 가까스로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하여 마주한 건, 누군가의 눈빛이었다.
한없이 서늘하고 조용한 노기가 실려 있었다. 질책이라기에는 차갑고, 징벌이라기에는 뜨거웠다.
말을 잃고 굳어 버린 법정을 힐끗 일별한 그 누군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법정을 향해 다가오다 멈춰 버린 적호를 향해서였다.
이를 갈아붙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꺼져라. 죽여 버리기 전에.”
실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적호의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