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05
1604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9)
이해는 간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곳에 모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서로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니까.
이렇듯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서로 조율해 가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그 시간이니 이런 광경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종남이 중원에서는 꽤 훌륭한 문파라더니.”
침묵을 지키던 야수궁주 맹소가 종리곡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이로군.”
“궁주님.”
“그렇지 않소?”
나직이 나무라는 당군악을 향해 맹소가 되레 웃어 보였다.
“남자의 시기는 추한 법이지.”
종리곡도 지지 않고 조소했다.
“사파에 새외인에, 잡탕도 이런 잡탕이 없군그래.”
“안 그래도 그게 마음에 안 드는 어떤 자가 천하를 사파 일색으로 물들이려 하는 것 같으니, 생각이 같으면 합류해 보시는 건 어떻겠소?”
종리곡의 눈이 살기를 띠었다.
“다 지껄이셨소?”
“그렇다면?”
종리곡은 금방이라도 일어서 죽일 듯이 맹소를 노려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종남파의 장문인이다. 그런 그가 ‘꼴 같잖으면 가서 장일소 발이나 핥든가?’라는 모욕을 받고도 참을 수 있을 리 없다.
“사파와 친한 건 오히려 천우맹이겠지.”
“그리 생각한다면 남은 구파를 이끌고 싸우시면 될 일 아니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때, 종리곡 대신 제갈자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천우맹의 입장이시군요?”
그가 냉소 어린 얼굴로 당군악을 응시하며 말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객이 괜히 자리나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늙은 놈이 눈치가 없어 타문의 회의에 끼어들었으나 이제라도 잘못을 깨달았으니 과히 타박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가주님.”
모용위경이 그런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번만은 제갈자인도 되레 성난 눈으로 모용위경을 노려보았다.
“이런 대접을 받아 가면서까지 끝끝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겁니까?”
“……가주님.”
“결과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취급이든 다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모용위경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그도 더 이상 제갈자인을 만류하기가 힘들었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곳을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제갈세가나 모용세가가 단독으로 무슨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모용가주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제갈세가는 빠지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제갈자인이 이번엔 종리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남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계속 굴욕을 감내하실 겁니까?”
종리곡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 바로 그때였다.
“굴욕이라 하셨습니까?”
담담하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순간 그쪽으로 쏠렸다. 중앙의 상석에 앉은, 천우맹의 맹주인 현종에게로.
현종이 물었다.
“어떤 것이 굴욕입니까?”
“맹주님, 저희는…….”
“무시하던 이들을 우대해야 하는 게 굴욕입니까?”
종리곡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아니면, 더는 과거와 같은 위세를 과시할 수 없음이 굴욕입니까?”
이번엔 제갈자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반박했다.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귀하께서 천우맹의 맹주이고, 우리는 패장(敗將)에 불과하다지만 패자에게도 자존심은 있습니다.”
제갈자인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당군악의 얼굴이 자못 사나워졌다. 하지만 당군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현종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존심?”
현종이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로 제갈자인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엇이 그대의 자존심이오?”
“맹주…….”
“이 자리에서 대접받는 것? 아니면, 패했으되 목을 뻣뻣이 세울 자격을 얻는 것? 어떤 것이 제갈세가의 자존심입니까? 결과가 좋지 않을지언정 그 의도는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받는 것이 그대의 자존심입니까?”
늘 차분하던 현종의 목소리에는 감당키 어려울 만큼의 노기가 실려 있었다.
“그딴 것들이 정말 자존심입니까?”
도인답지 않은 차가운 눈빛이 흘렀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감히 그런 현종의 질책 어린 말과 눈빛이 잘못되었다 여기지 못했다.
“누가 책임을 물었습니까? 누가 잘못을 가리려 했습니까? 우리가 땅에 묻고 돌아온 수많은 시신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서 채 가시지도 않았거늘, 지금 자존심 따위를 논할 때입니까!”
소란하던 공간 안엔 이제 현종의 목소리 외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진정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는 이라면! 사사로운 체면을 논하기 전에 당장 정세부터 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갈세가의 역할일 것이고, 호북에서 죽어 간 이들이 그대에게 바랄 일 아니겠습니까? 그 의미도 없는 체면을 세우는 게 그토록 중요합니까?”
제갈자인은 차마 현종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종리곡조차 슬쩍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곳에서 가장 정당히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현종이거늘, 그들이 괜히 찔리고 제 발이 저려서 지레 성질을 낸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제가 천우맹주 자리에 올라 거들먹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대신 그 자리에 오르십시오. 저는 물러날 테니.”
“매, 맹주님! 그게 무슨……!”
당군악이 기겁하여 외쳤지만, 현종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종리곡을 노려보았다.
“그것으로 종남이 작금의 상황을 타파하는 데 최선을 다해 준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저는 맹주가 아니라 일개 맹도의 입장에서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
“어찌하시겠습니까?”
시선을 외면하던 종리곡이 마침내 다시 현종을 마주 보았다. 현종 역시 피하는 일 없이 그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천하비무대회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두 사람이다.
과거에는 종리곡의 시선을 버거워하던 현종이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종리곡이었다.
그러겠다고 하기에도, 그러지 않겠다고 하기에도 면이 상하는 상황이다. 결국 종리곡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그리 어울린다고 하기는 어려운 진금룡에게 그 뜻을 물은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게 조금 이상한 진금룡의 애매한 입장이 오히려 종리곡에겐 훌륭한 대안이 되어 주었다.
진금룡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종남이 그리 염치없는 문파는 아닙니다.”
“그렇구나.”
진금룡은 이번엔 현종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맹주께서 조금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종남은 어떤 경우, 어떤 처지에서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파와 싸울 것입니다. 종남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습니다.”
종리곡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 아이의 말이 곧 종남의 입장입니다.”
“하면, 종남이 천우맹과 그 뜻을 함께한다 여겨도 되겠습니까?”
현종이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종리곡을 보며 물었다.
“……네, 무방합니다.”
답은 하였지만, 입에 쓴맛이 돌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종리곡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
무당이 언제 봉문을 풀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제갈, 모용세가와 연합하여 단독으로 세력을 구축한다?
그건 남은 세 문파마저 멸문하겠다는 말과 진배없는 소리다.
상대의 약점만을 기가 막히게 파고드는 저 패군이 약한 고깃덩어리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있을까.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천우맹에 의탁해야 한다.
그 모든 말을 스스로 밝히지 않은 건 종리곡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제갈세가는 어떠십니까?”
“……남은 방법이 그것뿐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함께하겠단 소리임에도 결코 호의적이진 않았다. 이에 대한 주위 반응이 나오기 전에 모용위경이 얼른 입을 열었다.
“모용세가도 당연히 천우맹과 함께하겠습니다. 당연한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모용위경을 일별한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이만큼을 양보했으니 그 역시 양보할 건 양보해야 한다.
“세를 과시하고자 함도 아니고, 잘잘못을 따지고자 함도 아닙니다.”
“…….”
“애초에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한가로이 그런 걸 논할 만큼 녹록하질 않습니다. 이제 더는 저 사패련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바. 상황을 똑바로 직면하고자 함입니다.”
제갈자인이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사실 저건 병법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그 일을 방해하고 나선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게 쓰디썼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계속하시지요.”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군악은 내심 감탄하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천우맹의 세력을 과시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현종은 그 난장판을 어렵지 않게 정리했다.
당군악이었다면 위압하고 내리누를 수야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저들의 협조를 얻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기가 되어야 빛나는 이가 있다더니.
“그럼 정리가 되었으니…….”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청명아.”
“총사!”
뒤늦게 나타난 청명을 보며 몇몇 이들이 반색했다. 조금 어둑한 눈으로 종리곡과 제갈자인을 본 청명이 이내 현종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늦었습니다.”
“어서 앉거라.”
“예.”
청명은 말없이 걸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왜 이리 늦었냐, 화산신룡.”
“미안.”
“끄응.”
이제 사람도 다 모였고 상황도 정리되었으니 임소병이 다시 입을 열 차례였다. 그런데 청명이 손을 들었다.
“잠시.”
“네?”
“곧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모두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오다니? 누가 말인가?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문이 다시 열렸다. 낯익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문대리!”
“남궁 장로가 아니십니까?”
백천과 남궁명이었다.
포권을 하며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숭산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다 왔네.”
백천을 일별하며 중얼거린 청명이 제갈자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제갈자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청명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상상보다 훨씬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자가 화산검협…….’
아까 이 자리에 화산검협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가 그토록 볼멘소리를 할 수나 있었을까?
그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청명이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 보죠.”
“……무엇을?”
“왜 제때 소림을 돕지 못한 거죠?”
“…….”
“법정 그 작자가 한심한 인간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멍청한 인간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설명해 보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누가 당신들을 막아선 건지.”
“그게…….”
제갈자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맞닥뜨렸던 광경이 머리 안에서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종에게는 간단하게나마 상황을 전했었다. 그러나 이건 현종만 알아서 될 일이 아니다. 모두에게 확실히 전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정체는 모릅니다.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학은 분명 대단했습니다. 방장의 지시에 따라 사패련의 등을 노리려 할 때, 갑자기 일백이 훨씬 넘는 고수들이 나타나 우리 앞을 막아섰습니다.”
청명의 두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