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07
1606화.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1)
임시로 마련된 군사전에서 나서자 부관들이 따라붙었다.
“군사, 련주께서는……?”
호가명은 대답 대신 슬쩍 부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차가운 눈빛에, 부관은 제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태양궁을 중심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사흘이 넘었는데 아직 아무런 명도 하달되지 않았다고……. 나아갈 건지 물러설 건지, 그게 아니면 최소한 이곳에 머물 것인지라도 말을 해 달라고 합니다.”
호가명의 얼굴이 조금 더 서늘해졌다.
“고작 사흘을 못 기다리겠다는 말이로군.”
“…….”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겠지.”
조소한 호가명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다른 이들은?”
“아직 딱히 큰 반응은 없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부관의 눈이 본능적으로 한쪽으로 향했다 돌아온다.
“조금의…… 의구심을 품고 있는…….”
탁.
청석을 내리밟는 호가명의 발소리가 살짝 커졌다. 부관이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한심한 놈들.”
“……송구합니다.”
사파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의 대승을 거둔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지긋지긋하군.’
이게 사파의 생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럴 때마다 정말이지 환멸이 난다. 부관이 덧붙였다.
“……아직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알았다.”
호가명은 부관을 제치고 걸음을 옮겼다. 순간 움찔하며 무언가 말하려던 부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기색을 알아챈 호가명은 결국 참지 못하고 불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고작…….’
이럴 때마다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열흘.
장일소란 이름이 없다면 고작 열흘도 버티지 못한다. 이 사패련이라는 모래성은 말이다.
그가 아무리 애를 쓰고, 수많은 업적을 쌓아 올려도 장일소라는 기둥이 무너지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기껏 대승을 거두고 확인하는 게 이따위 사실이라니.”
앞쪽의 커다란 전각으로 향하는 호가명의 발걸음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전각의 짧은 계단을 단번에 올라, 그 앞을 지키는 위사마저 휙 지나친 호가명은 문 앞에 시립하고 있는 시비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시비가 움찔했다.
“구, 군사를 뵙…….”
“언제부터 안에 계셨느냐?”
시비는 날카롭게 말허리를 자르는 호가명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어젯밤부터…….”
호가명의 눈이 한층 싸늘해졌다.
“주인을 위하는 건 좋지만, 주제넘는 개는 으레 목이 잘리는 법이다.”
시비는 이제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다시.”
“시, 실은, 어제 점심 무렵부터…….”
창백하게 질린 시비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호가명은 온기 한 점 없는 눈길로 그걸 물끄러미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문은 이 순간에도 꽉 닫혀 있었다.
시비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사이 안에 들어간 이는?”
“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호가명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열어라.”
시비는 이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도 안에 들이지 말라고 명한 건 패군 장일소다. 그리고 문을 열라 하는 이는 사패련의 군사 호가명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누구의 말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됐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 호가명은 직접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시비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끼이익.
꽉 닫힌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틈으로 새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흘러나왔다.
호가명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안색을 평소처럼 정비했다. 그리고 연기로 꽉 찬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를 찔러오는 매캐한 이 냄새는 몽혼향(夢魂香)이다.
장일소가 간혹 즐겨 쓰는 것이기는 하나, 오늘따라 그 향이 유독 짙다. 마치 지금 그의 마음……. 아니, 장일소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처럼.
저벅. 저벅.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을 만큼 몽혼향으로 가득 찬 실내를 호가명은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 이내 우뚝 멈추었다.
하얀 연기를 계속해서 뿜어내는 세 개의 향로 중앙에 놓인 커다란 침상과 그 위에 드러누운 한 사람이 보였다.
술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몽혼향 사이에도 확실히 느껴질 만큼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물끄러미 이 광경을 보던 호가명이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은 흔한 광경이라 여길지 모르나, 호가명은 알 수 있었다. 지금 향과 술에 취해 쓰러진 장일소의 모습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련주님.”
대답이 없다.
“련주님.”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인지, 꿈에 취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향에 취해서인지. 아니, 어쩌면 세상에 취해서일지도 모르지.
“련주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련주…….”
파아아앗!
바로 그 순간, 호가명의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의 눈 바로 앞, 무언가가 울부짖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벼락같이 뻗어온 장일소의 손아귀였다.
호가명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톱 끝이 피부를 파고든다. 금방이라도 두개골을 쪼개 버릴 듯한 악력이 머리를 조여 왔다. 이 와중에도 호가명의 귓가로는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은 거친 숨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명이냐?”
비로소 얼굴을 움켜잡았던 손아귀가 떨어져 나갔다.
멀어지는 손가락 틈새, 그 사이로 호가명이 본 것은 금방이라도 피를 쏟아 낼 듯 붉게 충혈된 장일소의 두 눈이었다.
침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장일소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호가명을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맡에 둔 술병을 들었다.
꿀꺽. 꿀꺽.
반쯤 남아 있던 독주가 거칠게 장일소의 목으로 넘어갔다. 입술 새로 흐른 술은 엉망으로 풀어 헤쳐진 앞섶을 따라 긴 선을 그렸다.
한참 후에야 장일소가 술병을 입에서 떼었다. 거꾸로 들고 위로 높이 들어 올려 보니 투명한 술이 방울방울 흐르다 이내 그쳤다.
여전히 타는 듯한 갈증이 가시질 않았는데 술병이 먼저 비었다. 장일소는 이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터엉!
내동댕이쳐진 술병이 거칠게 튕겨 올랐다.
호가명은 조용히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식은땀이 묻어났다.
머리로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몸은 알았던 것이다. 조금 전 지옥문에 발을 걸쳤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하지만 호가명에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지금 호흡하기에 버거운 까닭은…….
“……련주님.”
위태로워서다.
수없이 보아 왔던 장일소다. 세상에 호가명만큼 장일소를 잘 아는 이는 없다고 자부할 만큼.
하지만 지금의 장일소는 여태껏 본 적이 없을 만큼 위태로웠다.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앞에 뒤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툭 힘을 잃은 듯 장일소의 몸이 천천히 등받이에 늘어진다. 장일소는 기다랗고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연신 느리게 문질렀다.
한없이 평온하고 느긋해 보이는 듯한 손짓이지만, 호가명은 얼굴 위에 얹어진 그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도!”
잠깐 높아졌던 목소리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다.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호가명은 말없이 길게 심호흡했다.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떤 모습으로 저 사람 앞에 서야 할까?
그가 선택한 길은 간단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
담담하고,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목소리가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너무 오래 쉬셨습니다. 련주님이 없어서 동요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틈을 타서 승냥이 같은 것들이 슬금슬금 코를 들이밀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며칠쯤 더 놀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제 능력이 거기까진 닿질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놀 만큼 노셨으니 이제는 일을 좀 하셔야 합니다.”
호가명의 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너른 공간을 가득 채우지 못해 그저 방황하듯 배회하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울렸다.
“……쿡.”
이윽고, 그 숨소리 위로 살짝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쿡쿡쿡.”
장일소의 손이 천천히 제 얼굴에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호가명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그의 앞에 드러난 장일소의 얼굴은 그가 익히 아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여유 넘치고, 요사스럽고,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시대의 패자다운 모습으로 말이다.
“흐음.”
어느새 본연의 색으로 돌아온 장일소의 눈이 호가명을 빤히 응시한다.
“동요하는 것들이 있다고?”
“예, 련주님.”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겠지.”
장일소가 제 상체를 조금 당겨 일으켰다.
“그것들도 결국 내가 그 중놈과의 싸움에서 큰 부상이라도 입고 골골대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한 것 아니더냐.”
호가명은 차마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골골대고 있다면 그 상처를 덧나게 만들어서 제가 뜯어 먹겠다는 생각이겠지.”
장일소가 빤하다는 듯 쿡쿡 웃더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겠다.”
“……련주님.”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다시 움직여야지. 걱정 그만하고 시비들이나 부르거라.”
완곡한 축객이었다. 하지만 호가명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자, 장일소가 짧게 혀를 찼다.
“하여튼 이렇게 늘 늙은이처럼 걱정만 많아서는.”
장일소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슬슬 움직일 참이었단다. 푹 쉬고 싶어도 저 돼지 같은 것들이 킁킁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서 쉴 수가 있어야지.”
장일소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피어난다. 그 모습을 본 후에야 호가명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비를 들이겠습니다.”
“그러렴. 이왕이면 술도 한 병.”
“절대 안 됩니다.”
“매정하긴.”
호가명이 몸을 돌려 전각을 나섰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장일소는 장일소,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호가명은 차마 묻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 남은 진짜 의문 한 가지만큼은 말이다.
턱.
홀로 남은 장일소는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술병을 찾으며 더듬대던 손길이 이내 허무하게 잦아들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젖혀졌다. 초점 희미한 눈이 천장으로 향한다.
시야가 어리어리했다.
흐릿하던 천장이 이내 선명해졌다가, 금세 다시 처음처럼 흐릿해진다. 아니,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일그러지며 점점 변해 가기 시작한다.
붉고, 또 붉다.
결코 잊히지 않는 광경.
너른 대지 전체가 온통 붉다. 그 대지가 눈앞의 천장과 겹쳐진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돌아가 있다.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할 그 광경이 눈 속에 아로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자꾸만 보인다.
“……이젠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그의 입에서 짧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상 모든 것들이 뭉개지고 일그러지며 그곳에 녹아든다. 쏟아지고, 또 뒤엉키고, 짓이겨지고.
그가 만들어 낸 모든 것. 그의 손길 닿은 모든 것. 한때는 움켜쥐었다 믿었던 것. 그리고…… 장일소 그 자신마저도.
붉고, 붉고, 붉고, 또 붉은 세상.
천천히 점멸하고 시들어 가는 그의 시야에 세상 모든 것의 파멸이 스민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 홀로 우뚝 선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기껏 안정을 되찾았던 장일소의 손이 다시 잘게 떨리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세상 속 홀로 오연한 이.
그 모습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온다.
본 적도 없는 이의 뒷모습이. 모든 것을 파멸로 되돌릴 이의.
“쿡……. 쿡쿡.”
장일소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없구나.”
조금 서둘러야 하리라.
그의 기름한 눈이 조금씩 다시 붉어졌다. 그가 본 세상의 색, 그 검붉은 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