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16
1615화. 그러니 허물 수밖에요. (5)
그리 크지 않은 방 중앙에 놓인 작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객이 왔는데 엽차 외에는 마땅히 대접할 게 없군. 내가 불러 청한 적은 없으니 박하다 욕하지는 말게나.”
“설마요.”
쪼르르르.
청명의 찻잔에 찻물이 느릿하게 차올랐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청명은 잔이 다 채워지자마자 들어 올렸다.
“종남 장문인께서 주시는 차라면 감히 산해진미 따위와 비교할 수 없겠죠.”
“그리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군.”
청명의 손에 들린 찻잔이 점점 달아오르더니 이내 모락모락 김을 흘려 내었다.
“뜨거운 차를 즐기는 모양이로군.”
“네. 미지근한 건 딱 질색이거든요.”
종리곡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중간한 것보단 확실한 걸 좋아하는 것 자체가 젊은 사람의 특권이지. 하지만…… 차를 그리 즐기면 향도 맛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네.”
“많이 들었던 말이네요. 그래서 저도 될 수 있으면 차를 제대로 즐기려고 무던히 애를 써 봤거든요? 그런데.”
중간에 말을 끊은 청명이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거의 펄펄 끓고 있던 찻물을 말이다.
탁.
깨끗하게 비워진 찻잔을 다탁에 내려놓은 청명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천성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군.”
종리곡은 그저 피식 웃으며 청명의 빈 찻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우리가?”
“네.”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종리곡이 의자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었다. 하나 자세만 그럴 뿐, 시선은 청명에게 날카롭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네와 나는 딱히 대화를 나눌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네가 천우맹의 총사임은 알고 있네. 하지만 종남은 천우맹에 든 문파는 아닐세. 내게 무언가를…….”
청명은 단호하게 종리곡의 말을 끊어 냈다.
“아뇨. 저는 지금 천우맹의 총사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종리곡을 응시하는 청명의 시선이 얼핏 날카롭고 차가웠다.
“화산의 제자로 왔죠. 다름 아닌 화산의 사람으로.”
작은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종리곡의 두 눈에 잠깐 이채가 스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런 일 따윈 없었던 것처럼 무표정을 고수하며 종리곡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화를 나눌 일이 없을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잠깐 침묵하던 종리곡이 팔짱을 꼈다.
“말과 행동이 다르군. 확실한 걸 좋아한다더니, 오히려 아까부터 계속 질문만 하는 것이.”
“의뭉스럽기 짝이 없다?”
“부정하지는 않겠네.”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이해 좀 부탁드려요. 뭐랄까…….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라서 오긴 왔는데 막상 그쪽 얼굴을 보고 있으니…….”
으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울렸다. 종리곡을 앞에 두고도 숨김이라고는 없는 행동이었다.
“그 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자꾸 불쑥불쑥 솟아나서 누르는 중이거든요.”
살기가 맹수의 그것처럼 노골적으로 쏟아졌다. 이를 고스란히 받으며 종리곡은 작게 미소 지었다. 대종남파의 장문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천우맹의 총사이고,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화산의 청명이라 해도 말이다.
종리곡이 이를 문제 삼으려 한다면 천우맹을 와해시키고 남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감히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종리곡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래도 다행일세.”
“뭐가요?”
“때론 내가 너무 체통이 없는가 하고 반성했다네. 어쩌면 나는 정파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고.”
청명을 바라보는 종리곡의 두 눈에도 옅은 살기가 어렸다.
“자네만 없다면, 화산검협 청명만 없다면. 이런 생각을 내가 과연 몇 번쯤 했을 것 같은가?”
다탁 위에 놓인 종리곡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 꽉 힘이 들어간 손이 내심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자네만 없다면. 그래……. 자네만 사라진다면. 저리 싸우다 어딘가에서 죽어 나빠진다면. 아니면 하다못해…….”
종리곡이 말끝을 흐렸다. 차마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듯했다. 덤덤히 듣고 있던 청명이 대신 그 말을 해 주었다.
“나라도 저 목을 베어 버린다면? 갖은 오욕과 불명예를 짊어지고라도?”
종리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청명이 모를 수는 없었다. 종리곡이 청면을 직시하며 말했다.
“아무리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더군. 지금 자네를 앞에 둔 이 순간에도 말일세.”
서로를 마주하는 눈빛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그렇게 조금 길다 싶은 침묵과 시선 교환이 이어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종리곡 쪽이었다.
“왜 왔는가?”
어느새 들끓던 살기는 씻은 듯 갈무리되었고, 무심을 가장한 냉정만이 남았다. 두 사람의 눈이 평온하게 마주치고, 청명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토해 내듯 말했다.
“종남이…… 필요해요.”
종리곡의 눈이 잠시 어둑해졌다. 청명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아니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의를 찾아내려는 듯.
그러다 이내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오해 말아 줬으면 좋겠군. 이제 와 새삼 화산의 행사에 일일이 딴죽을 걸고 나설 생각은 없네. 내가 협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호의를 가장하는 것도 가식이기 때문일세.”
“…….”
“결론을 말하자면, 자네는 굳이 나를 회유할 필요가 없네. 종남은 최소한 종남이 해야 할 일 정도는 할 생각이니까.”
청명의 목소리가 차게 흘러나왔다.
“아뇨. 그 이상이 필요해요.”
“……그 이상?”
“완전한 협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종리곡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관계.”
그의 눈빛이 다시 서늘해졌다.
“……복종이라도 바라는 건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종남이 화산에 복종하는 그림 같은 건 아무리 나라도 도무지 그려 낼 수 없네요.”
“…….”
“하지만 같이 설 수는 있겠죠. 서로 겨눈 칼을 내려놓고.”
잠깐 멍하니 있던 종리곡이 작게 웃었다. 여기엔 여러 가지가 담겨 있었다. 황당함과 놀라움, 그리고 조소와 나무람까지.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예.”
“나는 패군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다네. 오히려 아주 아픈 곳을 찔렀다고 봐.”
종리곡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자네가 한 말은 인상적이었네. 경계를 허물어서 사사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이들을 억제한다. 하지만…… 우스운 소리지. 그 경계를 만든 게 누구인가? 바로 우리 아닌가?”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은 경계를 짓고 싶어 하지. 나와 남을 나누고, 우리와 저들을 나누네. 그게 본능이라네. 억지로 그 경계를 허물어 봐야 새로운 경계가 생길 뿐이야.”
종리곡이 차를 들어 제 목을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세. 섬서라는 지역 아래 두 개의 문파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함께’일 수 없네. 누군가가 완전히 승리하기 전까지는.”
침묵하던 청명의 입에 아주 차갑고 살벌한 비웃음이 어렸다.
“그래서 적의 습격을 받는 문파의 비급을 빼내고, 그들이 망하도록 방조했나요?”
“…….”
“완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청명은 이곳으로 걸어오며 새삼 깨달았다. 그가 단 한 번도 종남에게 이 일에 대해 따져 물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단죄하지도 않았고, 용서하지도 않았다. 저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죄받은 적도, 용서를 구한 적도 없다. 그저 그러한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을 뿐이다.
묻어 두는 건 결국 숨겨 두는 것에 불과하다.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던 종리곡이 다시 정면을 보았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얼굴만 보아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속죄라도 바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라면 접어 두게. 나는 속죄할 생각 없으니까.”
청명이 나직하게 웃었다.
이자는 알까? 청명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무엇을 참으며 이리 앉아 있는지.
“그래도 부정하진 않네요.”
“뻔한 거짓말을 늘어놔 봐야 종남만 우스워질 뿐이니까.”
종리곡이 살짝 눈을 감았다.
“다만…… 그뿐이네. 나는 그 선택을 잘못되었다 하진 않겠네. 자네가 내게 그 대답을 듣고자 온 거라면, 돌아가는 쪽이 나을 걸세. 해 줄 말이 없으니까.”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청명이 물었다.
“잘못되었다고 말 한 번 하는 게 어렵습니까?”
“…….”
“그건 실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그 때문에 죽어 간 화산의 제자들에게 미안하다고. 그 말 한 번을 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까?”
크게 감정이 실리지 않았던 청명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끓었다. 아니, 어쩌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나직하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말해 보세요.”
“…….”
“우리는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했지. 모든 것을 잃어야 했어. 하지만 너희는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잃지 않아. 그저 그 잘난 모가지나 한번 숙이고 말 일이지.”
“화산검협.”
“대답해 봐. 그게 왜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청명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얼굴은 어쩐지 울음을 참는 사람 같았다.
“화산이 지킨 이들 중에는…… 너희도 있었어.”
다탁 아래로 내려간 종리곡의 손은 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을 만큼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배신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사람이면 그러지 않을 테니까. 최소한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것들이라면.”
눈을 감고 묵묵히 그 말을 듣던 종리곡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한숨은 이내 갑옷을 두른 채 청명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가 있으니 이번에는 화산이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라는 건가? 그럼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나는…….”
“거절하지.”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종리곡은 그저 단호했다.
“그런 거래라면 받아들일 생각 없네. 종남은 화산에 죄를 지은 적이 없네. 그 모든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그러니 속죄할 것도 반성할 것도 없네. 무슨 말을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네.”
고개를 더디게 내저은 종리곡은 조금 지쳐 보였다.
“옛일을 두고 이야기할 거라면 여기서 그만 일어나지. 나는 더 할 말이 없으니까. 그게 종남 장문인으로서의 내 입장일세. 물론 자네가 이 일로 나를 비난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네. 어디 마음대로 해 보게.”
청명은 침묵했다. 종리곡을 노려보는 눈빛만이 형형했다.
이해해 보려고도 했다.
종남이 화산에 느꼈을 열등감. 더 강한 무학에 대한 갈증. 그리고 자신들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는 그 상황에서 해야 했던 선택까지도.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아마 청명은 영원히 이들을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할 것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무슨 소린가?”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거겠지. 그건 애초에 당신의 권한이 아니니까.”
청명을 응시하는 종리곡의 눈이 가라앉았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와 손쓰기 힘들 만큼 극심해진 갈등, 그로 인한 위태로움까지 모두 감춘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