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23
1623화.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3)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화산은 늘 가깝고도 낯선, 그리고 그 어떤 곳보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산이다. 그곳에 올라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종리곡은 긴 숨을 내뱉었다.
이리 홀로 화산에 올라 먼 하늘을 올려다볼 날이 오리라 상상이나 해 보았던가?
시선은 자연스럽게 먼 서쪽을 향한다. 넓게 펼쳐진 세상의 끝이 그가 아는 익숙한 산자락의 형태로 이어진다.
‘이상하군.’
그는 단 하루도 종남을 눈에 담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런데 이 먼 곳에서 바라보는 종남은 묘하게 낯설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산에서 살아가는 이라고 하여 그 산을 가장 잘 아는 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한 발짝 떨어져서 응시하는 이가 더 많은 걸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지척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흠.”
종리곡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가슴팍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탁.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 보니 묵직하고 새하얀 자기 병이었다. 그 안에 든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야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술?”
“혹시 싫어하시나요?”
종리곡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엄격히 금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니까. 다만…….
“대낮부터?”
“그런 걸 따지는 분이셨어요?”
종리곡이 묻자 청명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는 종리곡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새삼스럽게 체면을 차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럼 감사히 마시지.”
종리곡이 술병의 마개를 따고 병째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술이지만, 오늘따라 그 향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 병 안에 담긴 게 그저 술뿐만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좋은 술이군.”
“싸구려 화주인데.”
“좋은 술이야.”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더니 제 몫으로 따로 챙겨 온 술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입가를 적당히 훔치며 청명은 종리곡을 흘끗 보았다. 우습게도 흰 종남 무복 차림의 그와 화산의 정경이 퍽 잘 어울렸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하기야…… 산에 더 어울리고 덜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산은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인데.
“그렇게 대책이 없으실 줄은 몰랐는데.”
“잘못 보았군. 나는 무척 신중한 성격이라네.”
“그리 성격이 나쁘신 줄도 몰랐고.”
“호인이란 소리는 자주 들었지. 자네들에게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런 것치고는 영 말도 안 통하고.”
“내 귀는 언제든 열려 있네. 그게 장문인의 도리지.”
청명이 한마디 지는 법 없이 족족 받아쳐 오는 종리곡을 잠시 허탈하게 보다, 이내 또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무슨 말인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종리곡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 왔다. 그 시선에 압박이라도 받았는지, 청명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 종남이 안타깝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죠. 원래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뭐랄까…….”
“재촉은 자네가 하지 않았는가?”
“그렇죠. 그건 맞죠. 그런데…….”
청명이 겸연쩍은지 콧잔등을 긁적였다.
“시기가 좋지는 않았잖아요? 이제 같이 싸워야 하는 입장이니까.”
“……시기라.”
종리곡이 멍하니 되뇌며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술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자네 말도 맞지. 하지만…….”
이윽고 청명을 보는 그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당한’ 시기 같은 건 없더군.”
“…….”
“자네, 아는가?”
“……뭘요?”
종리곡의 입꼬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지금이 아니어야 할 이유 같은 건 항상 있네.”
“…….”
“그래.”
자신의 말에 스스로 맞장구를 치듯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말은 청명에게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항상 있지. 언제고.”
그가 흘리는 작은 웃음에, 청명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끄응.”
푹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종리곡의 말도 맞다. 한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기회를 놓치고 나면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게 장문인께 꼭 나쁜 결과는 아니었을 텐데요. 당장 어젯밤만 해도 그 말씀을 하시던 것 아니었어요?”
“그게 당장 어젯밤만 해도 다 털고 가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던 이가 할 말인가?”
“거,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
청명이 입맛을 쩝 다셨다. 종리곡이 고소를 머금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자다.
그리 냉정하고 시리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노기를 뿜어낼 때는 언제고, 막상 종리곡이 결심하자 그의 입장을 배려하려 했다.
좋게 말하면 복잡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중구난방 제멋대로다.
그럼에도 지금 종리곡은 그런 청명이 딱히 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줏대 없는 행동 안에 깔린 잔정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래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으면 달리 도리가 있는가?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진짜 대책 없네.”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종리곡이 이런 사람일 줄 그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종남은 이번 일로 많은 걸 잃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종남을 성토할 이야 많지 않았으나, 한번 새겨진 낙인은 이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남이 융성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힘을 잃었을 때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천형(天刑)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차디찬 시선에 시달려야 할 수도 있겠지. 커다란 공을 세우고도 그 과거의 죄에 묻혀 버릴지 모르고.
종리곡은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다. 청명이 그러한 상황을 우려해 일단 당장은 일을 덮어 두려 했다는 것도.
종리곡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 말은 틀렸네. 지금은 무척 좋은 시기네.”
“네?”
“소림이 없는 지금이 기회지. 구파의 허울이 사라졌으니, 이 일로 구파에서 퇴출될 일은 없을 게 아닌가?”
“……웃음이 나옵니까?”
“웃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돌겠네,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확실히 지금의 종리곡에게서는 이전 같은 딱딱함과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초탈과 여유가 채우고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제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된 것이나 다름없건만, 종리곡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도 사람이라 고민하긴 했었네.”
“고민요?”
“자네가 말하려는 나를 막아섰을 때 말일세.”
종리곡의 눈이 가라앉았다.
“순간적으로 이걸로 됐다 싶기는 했지. 나는 내 용기를 보여 주었고, 자네는 인정해 주었네. 그렇다면 이걸로 다 묻어 두고 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지.”
“……그런데 왜 강행하셨는데요?”
종리곡이 피식 웃는다. 이유라…….
“짐이란 어깨로 지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지는 것이니까.”
청명이 말없이 종리곡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화산의 도인들과 같은 깨달음을 구하기란 어려우리라.
하지만 때로 세상은, 평생을 수양한 이들조차 하지 못할 말을 쉬이 내어놓고는 한다.
청문이 그리 말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도가 있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좇는 이들이라고.
종리곡이 다시 옅게 웃었다.
“자네에겐 미안하게 되었네.”
“오해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웃는 낯에도 침 뱉어요.”
“하지만 칼질은 안 하겠지.”
“……진짜 돌겠다.”
청명이 제 머리를 마구 긁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숫제…….
“아오, 몰라. 내 알 바 아니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청명이 획 몸을 돌렸다.
“가는가?”
“예, 갑니다. 할 일이 산더미예요. 장문인께서도 여기서 시간 끌지 마시고 빨리 내려와서 일하세요.”
“그러지.”
“……어우. 적응 안 되네, 진짜.”
청명은 몸에 벌레라도 붙은 양 왁왁 고함을 내지르더니 훌훌 걸어 산을 내려가 버렸다. 그런 청명의 모습이 사라지자 종리곡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짐이라…….”
실로 둔중한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 이제부터 그는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종리곡은 이제 그 짐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짊어진 짐을 후대에 넘겨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그 힘겨움을 이겨 낼 수만 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언제고 한 점 거리낌 없이 세상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저들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의 눈에 어느새 저 멀리 산 아래까지 뛰어 내려간 청명이 보였다.
종리곡은 아까까지와는 다소 다른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 저자를 수많은 이들이 따르는지, 알 것 같군.’
청명은 그에게 종남을 위한 양분이 될 것을 강요했다. 후대가 서로 원한에 얽혀 피 흘릴 바에는 차라리 네가 그 모든 것을 짊어지라고 일갈했다.
그게 위에 선 자의, 먼저 걸은 자의 의무라고.
하지만 막상 종리곡이 그 말을 지키려 하자, 되레 그를 보호하려 들었다. 마치 자신이 그의 양분이 되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종리곡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면 이를 모욕적이라고 느껴야 할는지도 모른다. 천하의 종남 장문인을 아직 보호해 주어야 할 미숙한 이로 취급하는 어린놈이라니.
하지만, 종리곡은 조금도 그럴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끝없이 뻗은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이 흐르듯 밀려가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자 현종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개를 드십시오, 장문인.”
종리곡이 고개를 들었을 때, 현종은 온화하게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화산의 태상장문이기는 하나, 이제 화산의 장문은 아닙니다. 그러니 화산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다만……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에 누군가가 대답해야 한다면, 그 직위를 떠나 장문인과 가장 연이 깊었던 제가 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가 손을 뻗어 종리곡의 손을 잡았다.
“속죄는 화산이 아니라 세상에 해 주십시오. 그때 하지 못했던 도리를 지금 지켜 낸다면 그 누구도 종남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상장문인.”
“그리해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종리곡이 느리게 눈을 떴다.
여전히…… 답답하고 한심하고 순진한 사람 같으니.
만일 그가 현종과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종남을 말 그대로 거덜 내 버리고자 달려들었을 것이다.
설사 현종이 종남의 모든 가산을 요구한다고 해도 종남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현종은 그런 당부를 전하는 게 고작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종남의 산자락이 보인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능선이 자꾸만 흐릿하게 이지러졌다.
“……나쁘지 않군.”
그래, 나쁘지 않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종남도. 그 위로 펼쳐진 하늘도. 그리고…… 그가 딛고 있는 이 산도.
어쩌면 후예들이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가야 할 이 세상도.
어제 그가 바라보던 세상보다 한결 더 선명하고, 조금은 더…… 온화하게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