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28
1628화. 좋은 게 좋은 거잖습니까? (3)
“여기요!”
“…….”
현종이 제 앞에 놓은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판장……? 아니,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기다란 두루마리 문서에 수결들이 줄줄이 찍혀 있었다.
“수결(手決)?”
“권한을 반납했는데 장문인의 인장이 찍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손도장으로 받아 왔죠!”
청명이 ‘나 잘했죠?’라는 얼굴로 배를 쭉 내민다. 그 꼴을 본 현종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이걸…… 그…….”
현종이 의심과 불안함, 그리고 의혹을 한껏 담아 물었다.
“장문인들께서 직접…… 찍으셨다고?”
“그럼 설마 제가 대신 찍기야 했겠어요? 에이, 세상에 장문인분들의 수결을 위조할 만큼 간 큰 놈이 어디 있다고.”
“……있지.”
“있는 것 같아.”
“그러고도 남지.”
맹주실 안에 있던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졌다. 그만큼 간 큰 놈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간 큰 놈은 ‘또’ 없다가 맞는 말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찍힌 수결의 손 크기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위조는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위조해 볼 수 있다 쳐도, 지금도 두루마리를 벗어나려 애쓰는 것 같은 야수궁주의 거대한 손도장은 위조할 도리가 없었겠지.
“그러니까 장문인들께서 다들 자발적으로 이걸?”
“그렇다니까요?”
“뭐에 수결하는지도 알고?”
“아, 거기 적혀 있잖아요!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지셨지? 예전에는 안 이러셨는데!”
“…….”
청명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현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결들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건 손가락이 여섯 갠데?”
“흔들렸나?”
“여긴 뭔가 강제로 짓누른 듯 뭉개진 게…….”
청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만큼……. 어……. 의욕이 있으셨다는 것 아닐까요?”
“…….”
“…….”
현종의 볼이 푸들푸들 떨린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이 자식아!”
“아이코!”
현종의 서탁 위에 놓여 있던 벼루가 허공을 날았다. 청명이 고개를 냉큼 숙여 날아드는 벼루를 피해 냈다.
“안 봐도 뻔하다. 보나 마나 뭔 내용인지도 잘 모르는 연약한(?) 장문인들을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 강제로 수결을 찍게 만들었겠지!”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아니긴 뭘 아니냐! 이 망둥이 같은 놈아!”
두 사람이 순식간에 맹주전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걸이 곁에 있는 윤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사형.”
“응?”
“보통 장문인과 연약, 그리고 협박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올 수가 있습니까?”
“있겠냐?”
“……그렇죠?”
조걸이 떨떠름한 얼굴로 현종의 주먹질을 피해 대는 청명이 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게 참 말이 안 되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진정하시지요, 맹주님.”
보다 못한 당군악이 현종을 말리고 나섰다.
“아, 아니. 가주님, 이게!”
“어쨌거나 장문인들께서 수결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설마 그분들이 정말 화산검협의 협박을 감당하지 못해서 수결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현종은 차마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심증은 있지만, 그렇다고 ‘예’라고 대답해 버리면 천우맹과 함께하는 문파의 수장들을 모조리 무시해 버리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수결이 찍혔다는 것은 그분들 역시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당군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 지금쯤 다들 찾아와 맹주님께 항의를 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끼이익.
당군악이 맹주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
탁.
그리고 열렸던 문이 열린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닫혔다.
철컥.
당가의 가주라는 직함이 부끄럽지 않은 신묘한 손놀림으로 신속히 문을 걸어 잠가 버린 당군악이 살짝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다.
“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니, 잠시. 방금 밖에 분명…….”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분명 무언가…….”
“없었습니다.”
“…….”
현종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분명 잠깐 열린 문틈으로 도열해 이를 갈고 있는 장문인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은데…….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못 본 걸로 하자.’
봤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봤다고…….
“후우.”
현종의 시선이 다시 수결이 찍힌 연판장으로 향했다. 과정이야 매우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하튼 이곳에 수결이 찍힌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당군악의 말대로 저 장문인들이 정말 힘이 없어서 순순히 시킨 대로 수결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심 불만이야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일단은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지지가 현종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야 이놈아.”
“예?”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냐?”
“어쩌긴요.”
청명이 담담하게, 하지만 또한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기려고 하는 거죠.”
“…….”
현종이 할 말을 잃고 그런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기기 위해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청명으로서는 그 외에 더 덧붙일 말이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이기기 위해, 희생을 줄이기 위해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는 것뿐인데, 그 외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더 많은 이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청명이 아니라, 아직 체면과 책임, 그리고 타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종 자신이었다.
“끄으응.”
현종이 앓는 소리를 흘리고는 당군악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군악이 피식 웃는다.
“웃으시깁니까?”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이 일은 온전히 맹주님께서 택하셔야 할 문제 같습니다. 그러니 군사나 다른 문주들도 딱히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일 테고요.”
오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가주님의 생각은 여전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파격적이라 꺼려지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결정할 위치였다면, 저는 고민하지 않았을 겁니다.”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당군악이 살짝 침음을 흘렸다.
이유는 벌써 몇 번이나 말해 왔으니, 지금 현종이 원하는 건 조금 더 진솔한 그의 속내일 것이다.
“세상일에는 수많은 연유가 있습니다.”
“예.”
“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연유와 근거가 무의미해지기도 하지요. 단 하나의 단어 앞에서는 말입니다.”
“단 하나의 단어라 하시면……?”
“대의(大義).”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연유와 근거라는 건 제대로 된 대의를 세우지 못한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요. 저는 화산검협이 논한 대의 앞에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종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의라…….”
현종이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런 현종의 고민을 방해하지 않았다.
“……청명아.”
마침내 눈을 뜬 현종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겠지만, 천우맹의 맹주된 사람으로서 이건 허락할 수 없다. 천우맹의 맹도들은 화산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온 이들이 아니다.”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당주는 책임이 있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아직 미숙한 이들을 앉힐 수는 없다. 각 당의 당주는 천우맹에 뜻을 같이한 문파의 문주들 중에서 뽑을 것이다.”
청명과 당군악의 입에서 어찌할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오려는 순간, 현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이건 어떠냐?”
“……예?”
“네가 추천한 이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을…….”
현종의 시선이 백천과 윤종, 그리고 조걸에게로 향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현종의 눈빛에 어린 것은 우려가 아니라 신뢰였다.
“각 당의 부당주로 임명하여, 당주들을 보필하게 하자꾸나. 그럼 네가 원하는 빠른 판단이 가능해지지 않겠느냐?”
“아?”
“오…….”
청명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주가 될 이들도 이 연판장에 수결한 문주들 중에 나올 터, 그렇다면 그들도 부당주가 된 이들의 판단을 딱히 제지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번거로운 과정이 생긴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가 하려는 일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확실히……. 그럼 각 문의 불만도 어느 정도는 잠재울 수 있겠군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당군악이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수결을 받아 오지 않았다면 오검이 당주들에게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형식상이든 무엇이든 이미 오검이 당을 이끄는 데 동의해 버린 이상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건 당주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는 권한을 조금 내려놓는 대신에 책임도 조금 가벼워지는 결과가 된 것이다.
당군악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다른 이의 입에서 이런 의견이 나왔다면 매우 정치적인 한 수라 평했겠지만, 현종에게 그런 마음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저 어떻게든 맹과 뜻을 함께한 이들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결과적으로는 절묘한 묘수를 도출해 낸 것이다.
“어떠냐?”
“흐으으으음.”
청명이 잠시 제 볼을 긁적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좀 구차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큰 문제 없을 것 같네요. 대신!”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당주가 될 사람은 제가 뽑게 해 주세요.”
“엥? 왜?”
“제가 잘 뽑을 수 있어요.”
청명의 입가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수결할 때 표정을 대충 봐 뒀거든요.”
“표정?”
“네, 뭐. 곱게 찍는 사람도 있었고, 반항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곱게 찍은 사람 중에서 당주를 임명하면…….”
“반항했네, 이 자식아! 아깐 아니라더니!”
겨우 제자리에 돌려진 현종의 벼루가 다시 허공을 날았다. 청명이 몸을 훅 꺾어 벼루를 피해 내고는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반항이 그 반항이 아니고…….”
“지금 네가 하는 게 반항이지! 이리 와! 오지 못하겠느냐, 이 망둥이 같은 놈아!”
길길이 날뛰는 현종과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표정을 미리 봐 뒀다고?’
굳이 수결을 찍겠다고 나서서 일을 크게 벌인다 싶었더니, 저 능구렁이 같은 도사 놈은 현종이 이 답을 내어놓을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수결을 찍는 과정은 당주가 되어도 오검에게 협조할 이들을 미리 선별하기 위함이었겠지.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시작한 일일까?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행자인가.”
당군악의 고개가 다시 한번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청명은 뛰고, 현종은 쫓고, 당군악은 끄덕였다. 상황은 복잡했지만, 어쨌든 답은 나왔다.
하지만.
이 촌극 같은 상황, 그리고 그 일련의 결정에 전혀 끼지 못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
“…….”
“저희 의견은……?”
하지만 그 허탈한 목소리는 방 안의 소란에 묻혀 아스라이 흩어졌다.
“아니, 그…….”
조걸의 손길이 무의미하게 허공으로 뻗어진다.
아니……. 이런 걸 결정할 거면 당장 당주의 등쌀과 아래에서 찔러 오는 눈빛에 시달릴 당사자들의 의견을 조금이라도…….
턱.
윤종과 백천의 손이 조걸의 어깨에 얹어졌다.
“그냥 포기해라.”
“이왕 이리된 거 마음이나 편히 먹자꾸나.”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부당주가 되어 저보다 배는 넘게 산 이들을 통솔하게 생겼다.
“……왜 매번 이런 식입니까?”
“어쩌겠느냐. 적응해야지.”
“…….”
백천과 윤종, 그리고 조걸.
세 사람의 입에서 일제히 서글픈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