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39
1639화. 짐승도 고마움은 압니다. (4)
얼마나 얻어맞았을까?
고통이 점점 멀어지고, 세상이 점점 아득해진다.
하지만 딱히 분노도, 절망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가족들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만 어렴풋이 들 뿐이었다.
이렇게 죽는다면 차라리 자비로운 게 아닐까? 더는 내장이 까맣게 타 버리는 듯한 심적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서걱.
그의 얼굴을 무언가가 베고 지나갔다.
“겁도 없는 놈…… 감히 그 혓바닥에 당주의 이름을 올려?”
눈앞이 뭉개진 듯 흐렸지만, 광기에 찬 눈빛만은 똑똑히 보였다. 절대적인 성역을 침범당한 듯한 분노를 보고 있으니,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괜히 웃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벌써 죽으면 안 되지. 정신 차려. 내가 네놈에게 백귀당(白鬼當)의 손속이 얼마나 잔인한지 똑똑히 알려 주마.”
호가명의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 감각이 무뎌져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입 안에 잔뜩 고인 피를 어떻게든 뱉어 내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잘못 맞은 모양인지 물속에서 바깥 소리를 듣는 듯이 멍멍했다.
“뭐야?”
“이 애송이 놈이 당주를 찾는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제를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이…… 이 멍청한 새끼가!”
“예?”
“당주께서 당신을 찾아온 이는 누구든 일단 살려서 데려오라 명하신 걸 잊었느냐?”
호가명이 퉁퉁 부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지옥의 악귀나찰처럼 그를 고문하던 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와중에 호가명의 목에 닿은 칼은 여전히 그대로라 손이 떨릴 때마다 목 피부에 붉은 선이 이리저리 생겼다.
“그, 그랬었…….”
“이 망할 자식이!”
퍼억!
질책하던 이가 결국 분노하며 사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사내를 보며 이를 갈아붙이기까지 했다.
“죽으려면 혼자 뒈질 것이지, 이 병신 같은 놈이!”
그렇게 사내를 향해 노기를 뿜던 이가 고개를 돌려 호가명을 살폈다. 이리저리 상태를 확인하는 얼굴엔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은 붙어 있군.”
그는 피투성이가 된 호가명을 주섬주섬 제 어깨에 둘러업고 걸음을 옮겼다.
쿵.
그 잠깐 사이에 정신을 잃었던 건지, 바닥에 내던져지는 충격에 깨어났다. 호가명이 힘겹게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사위가 깜깜했다. 밤이라서? 아니면 빛이 들지 않는 실내인가?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디짙은 어둠과 그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등잔 불빛들뿐이었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고서야 그는 자신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알 수 있었다.
넓은 실내였는데, 흔한 가구나 집기조차 없어서 곳간 혹은 창고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듯했다. 그렇게 삭막한 방에 수십여 명의 사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깨진 술병이 굴러다니고, 뭔지 모를 매캐한 향이 코를 찔렀다. 눈이 풀려 벽에 기댄 이들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술병을 놓지 못하는 이들까지.
퇴폐적이다 못해 음울한 광경이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니, 애초에 자신의 두 눈으로 보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 앞에 호가명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때, 귀를 확 잡아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그 목소리에서 처음 받은 느낌을 말하자면, 기이했다.
밝은 듯 어둡고, 높은 듯 낮았다.
그리고 그 모든 특징을 떠나…… 거칠었다. 아주 짧은 말을 내뱉은 것뿐임에도 마구잡이로 벼려진 짐승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사나움이 스며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흉포함이었다.
“당주를 뵈러 왔다고 합니다.”
“나를?”
널브러진 사내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호가명은 부어터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 감상은 ‘가녀리다’였다. 그런 말이 어울리는 체구까지는 아님에도, 목소리에서는 분명 흉포함이 느껴짐에도 말이다. 살짝 마른 체형의 그 남자는 아주 느긋하게 그를 향해 걸어왔다.
휘적대는 걸음걸이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등잔불에 드러난 사내의 새하얀 얼굴이었다.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유생으로 살아온 호가명보다 더욱 유생다운, 하얀 얼굴이었다.
그 희다 못해 창백한 얼굴에 자리한 기다란 눈이 호가명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시체도 말을 할 줄 아나 보군.”
“그, 그게…… 아직 살아는 있습…….”
“아아, 그래?”
얼굴이 흰 사내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이윽고.
푸욱!
“아아아아아아아악!”
어느새 사내의 손에 쥐어진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비도가 호가명을 둘러업고 온 이의 배에 가차 없이 틀어박혔다.
“가만히 있으렴.”
“다, 당주! 용서를! 제, 제발!”
“용서해 주고 있잖아. 용서하지 않았다면 목에 박혔겠지?”
하얀 얼굴 사내의 두 눈에 흉포한 빛이 번득였다. 튀어 오른 피가 그 하얀 얼굴을 점점이 물들였다.
“꿈틀거리지 마. 더 짜증 나면 못 참고 목을 잡아 뜯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 비명도 지르지 마. 내 귀가 더러워지잖아.”
기어이 비도로 배를 무참히 헤집어 놓은 흰 얼굴의 사내는 쓰러지는 이를 보며 경멸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커, 커억……. 죄송합…….”
하얀 얼굴의 사내는 이내 쓰러진 이에게 흥미를 잃은 듯 다시 호가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새하얀 얼굴에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 어렸다.
“재미있는 일을 들고 왔을지도 모르는데…….”
손에 묻은 피가 더럽다는 듯 털어 낸 그가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이 흡사 피 냄새를 맡은 늑대 같기도 했다.
“이래서야 차라리 도사를 불러 초혼을 하는 게 낫겠군. 그냥 가서 묻어 버…….”
그 순간, 호가명의 몸이 움찔했다. 동시에 사내의 눈에도 흥미롭단 기색이 스쳤다.
“음?”
누가 봐도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언제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호가명은 부들부들 떨며 어찌어찌 몸을 세워 내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 정좌하고 하얀 얼굴의 사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 순간 엿보인 독기와 집념에 흥미가 갔음일까? 하얀 얼굴의 사내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재미있군. 나를 만나러 왔다고?”
호가명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누구지?”
“……호가명.”
“호씨라…….”
잠시 읊조려 보던 흰 얼굴의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인근의 호가(扈家)라면 유명한 곳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적 떼의 침입을 받아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참살당했다는 그 호가(扈家)인가?”
“…….”
“아, 그렇지. 이건 겉으로 알려진 소문이고, 진실은 그 돼지 같은 왕사(王師) 놈이 수작질을 부려서 가문의 주춧돌을 불태워 버렸다고 했던가? 그래……. 이전에 왕사의 전횡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호가명의 어깨가 짧게 떨렸다.
“맞나?”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의 고통이 힘겨워서인지, 아니면 마음의 한이 너무 커서인지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실로 버거웠다.
“그렇다면 네놈은 그 호가의 가주, 호경(扈鏡) 선생이 애지중지했다는 자식놈이겠군. 북경으로 유학을 갔다던.”
흰 얼굴의 사내가 쿡쿡 소리 내어 조소했다.
“그래. 그 대단하신 분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지?”
호가명의 눈이 새파란 독기를 흘렸다.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
하얀 얼굴이 살짝 비틀렸다.
“원하는 건…… 복수.”
“복수라……. 네 가문을 짓밟은 왕사 놈에게?”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대가는?”
“대가는 재물. 상상도 못 할 재물을 안겨 주겠다.”
“재물이라……. 그것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말이지?”
호가명은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이 호가명이라 했던가?”
“그렇…….”
“호가명.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백안……귀, 장일소.”
“호오?”
“들었다. 이 귀주에 오직 하나……. 대가만 정확하다면 무엇이든 해 주는 이가 있다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목적을 가리지 않고 도의와 인정을 비웃는 귀신이 있다고.”
하얀 얼굴의 사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잘 아는군.”
퍼억.
그 순간 호가명의 몸이 뒤로 나뒹굴었다. 호가명을 걷어차 버린 장일소가 귀기 넘실대는 얼굴로 다가왔다.
“돼지 같은 놈.”
저벅. 저벅.
쓰러져 경련하는 몸 앞으로 바짝 다가온 그는 땅에 뻗어 있는 호가명의 손을 그대로 짓이겼다.
우드득. 우드드득.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겼다. 호가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경련했다. 포악한 기운이 서린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잘 맞혔지만, 하나는 틀렸어.”
“끄…….”
“재물? 그따위 것을 대가로 지불하겠다고? 그딴 것을?”
고통에 겨운 호가명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장일소는 동정 하나 내비치지 않고 엎어진 호가명의 머리채를 불쑥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고 말 것처럼.
“내가 우스워 보인 모양이군. 그깟 돈 몇 푼 던져 주면 내가 네 개가 될 거라 여겼나?”
퍼억.
호가명이 날아가 사정없이 벽에 처박혔다. 다시 다가온 장일소가 이번에는 그의 발목을 내리밟았다.
우드드득!
“끄으……아아악!”
호가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까뒤집었다.
“거래란 건, 서로 흥미가 당길 만한 걸 들고 왔을 때나 성립이 가능한 거다. 네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걸 가져올 게 아니라.”
“끄…….”
“멍청한 새끼.”
우득!
발목을 그대로 부러뜨려 버린 장일소가 옆으로 툭 쓰러지는 호가명을 힐끔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좀 재미있는 일이라도 들고 왔나 했더니.”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장정들은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 익숙하고도 두려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저놈은 어찌할까요, 당주님?”
“적당히 치워.”
“예.”
명을 받은 이가 바로 움직이려다 순간 그 자리에 멈칫했다.
적어도 이 안에서 장일소의 명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지금 수하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장일소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이윽고 색 옅은 그의 눈에 묘한 감흥이 서렸다.
엉망으로 짓밟혀 의식도 없을 거라 여겼던 호가명이 그 와중에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기어이 앉은 호가명이 제 무릎을 모아 천천히 정좌했다. 그러나 뒤틀려 꺾인 발목 때문에 자세가 나오질 않으니, 손을 뻗어 꺾인 부위를 콱 움켜잡았다.
우두둑!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꺾인 발을 제자리로 돌린 호가명이 완벽한 정좌를 취하고는 고개를 천천히 조아렸다.
잠긴 목소리가 공간을 메운 정적을 서서히 밀어내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원하는 것을…….”
장일소의 두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몸뚱이든…… 영혼이든, 그게 무엇이든…….”
호가명의 머리가 땅에 닿았다.
“어리석은 저는 무엇을…… 무엇을 내밀어야 당신과 거래가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호가명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장일소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당신께서 제 복수를 이뤄 주시겠습니까?”
이곳에 선 이들은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평범한 이들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거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호가명의 눈빛은 그런 이들조차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처절했다.
“부탁드립니다.”
호가명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며 침묵하던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듣기로 너는 황자의 총애를 받는다 들었는데? 지금은 황자가 왕사를 어찌할 수 없다 해도, 곧 그의 힘이 왕사를 찍어누를 수 있게 될 텐데?”
“…….”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이뤄질 일을 이렇게 모든 걸 버려 가며 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 말에 호가명이 장일소를 똑바로 바라본다.
“……지금은 아니다.”
“음?”
“언제고, 여력이 생기면, 충분한 힘을 키운 뒤에.”
으드드득.
호가명이 거세게 이를 갈았다. 턱에 힘줄이 투두둑 불거질 정도였다.
“그런 값싼 동정으로 이룬 복수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어떤 울부짖음보다 절절한 목소리가 장일소의 귀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면, 내 살점을 뜯어 던져서라도 이룰 것입니다. 내 손으로 할 수 없다면, 악귀가 되어서라도 놈을 물어뜯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안 된다면!”
핏발이 선 눈이 장일소를 똑바로 응시했다.
“놈을 가장 고통스레 죽여 줄 이를 찾을 수밖에.”
호가명의 머리가 다시 조아려졌다.
“부디. 부디…….”
“…….”
장일소가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과 변화 없는 차가운 눈으로.
“너절한 이유로군.”
“…….”
“간절하면 들어줄 거라 믿는 건 버러지 같은 놈들의 자기 위안이지.”
호가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리고 고개를 든 호가명은 보았다. 장일소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것을.
놀랍게도, 그 웃음은 이곳의 그 어떤 것과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저 천진해 보였다.
“받고 싶은 게 생겼다. 받아들이지, 이 거래. 대신…….”
장일소의 두 눈이 요사한 빛을 뿜으며 웃음기에 물들었다.
“그 대가는 무척 비싸게 치러야 할 거란다, 샌님.”
무척이나 환한 그 눈동자에 얼빠진 호가명의 모습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