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41
1641화. 짐승도 고마움은 압니다. (6)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흥분으로, 또는 죄악감으로.
손은 이미 더러운 피로 잔뜩 뒤덮였다.
하지만 호가명은 가슴에 단 한 점의 후회도 담지 않았다. 후회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품기에는 자신이 행한 일은 너무도 정당했으니까. 한 치의 거리낌을 느끼는 것마저 죄스러울 정도다.
거칠게 쏟아지는 숨을 갈무리하며, 호가명은 한때 왕사라 불렸던 고깃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호가명의 원독을 그대로 받아 낸 몸뚱이는 처참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흉물이 되었다.
저릿한 손끝의 감각, 차오르는 숨,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
복수의 맛은 생각만큼 개운하지도, 우려만큼 더럽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 숙제를 끝낸 것처럼 조금의 허탈함과 작은 만족, 서글픔 등이 뒤섞여 조용히 흐를 뿐.
어찌 되었건 그의 복수는 끝났다. 이게 그가 원한 형태였든, 그렇지 않든 이미 끝나 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남은 건…….
호가명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본 장일소가 서 있었다.
그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어떻지?”
기묘한 울림을 담은 장일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라는 걸 이룬 기분은 말이야.”
호가명은 무심결에 피로 젖은 제 손을 일별했다. 붉은 손이 주던 이질감도 벌써 무뎌졌다. 마음속으로 그 모든 걸 흡수하며 호가명은 담담히 답했다.
“잘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넘겨짚기로군.”
장일소가 조소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복수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어.”
“……그렇습니까?”
“복수란 건 잃을 게 있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의외로 쉽게 납득될 만한 대답이었다.
확실히 장일소가 옳았다. 잃을 것이 없는 이는……. 아니, 잃은 것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이는 영원히 복수라는 말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은 호가명에게 또 하나의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나 역시…….’
이제 다시는 복수라는 걸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더는 잃을 것이 남지 않았으므로.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장일소는 말없이 눈썹을 꿈틀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왜 절 도와주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호가명이 질문을 바꾸었다.
“만일 제가 저자의 제안을 받았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음?”
이 질문은 장일소의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거친 표정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확실히 앳된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당신은 그게 더 편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보가 아니면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지요. 재물, 권력, 편의……. 저자가 내어 줄 수 있었던 어떤 것도 당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호가명이 장일소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렇다면 제 목이라도 받아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당신을 실망하게 한 대가로?”
“……목?”
순간 장일소의 표정에 금이 갔다. 아니, 정확히는 허물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호가명을 보다 크게 웃어 버렸다.
“하하하하핫! 목? 목이라고?”
몸을 들썩이며 실컷 웃어 대던 장일소가 두 눈에 짙은 웃음과 경멸을 싣고 호가명을 보았다.
“그래도 머리는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멍청한 녀석. 네 싸구려 목 따위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지?”
호가명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아직 자기가 한림원이나 들락대는 고귀하신 양반 같은가?”
노골적으로 비웃는 말에, 호가명은 반사적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장일소의 말에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학사도, 벼슬길에 오른 이도 아니다.
그저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잡아 그 목을 베어야 할 쓰레기일 뿐이다. 얼마 전까지의 호가명이 가장 경멸하고 배척하던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이의 목이 장일소에게 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우문(愚問)이었군요.”
호가명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인정했다.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장일소에게 빚을 졌고, 이제는 이를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찌 되었건 이제는 당신이 대가를 받을 차례입니다.”
호가명이 깊게 심호흡하고 장일소를 마주 보았다.
상관없다. 그 대가가 아무리 가혹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이제 호가명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호가명이 철갑이라도 씌운 듯 차디찬 얼굴로 씹어뱉었다.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장일소의 기다란 눈매가 한껏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간만에 들어 보는 듣기 좋은 말이로군.”
이상한 사람이다. 호가명은 그리 생각했다.
처음 본 그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전형적인 낭인이었지만, 지금 그가 보는 장일소는 그때와 또 다르다.
저 느릿한 말투가 별다른 겁박 없이도 그를 압도하고 있다. 황궁에서 권력자와 고귀한 이들을 숱하게 봐 온 호가명을 말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대단하다 여겼던, 위대해질 거라 믿었던 이들에 비해 과연 이 사람이 부족한가?
진짜 누군가의 위에 설 자질을 지닌 이는 어쩌면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아닌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가장 갈구해 오던 이가 사실은 눈길 주기조차 꺼려지던, 세상의 가장 더럽고 추악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게 말이다.
그렇기에 호가명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십니까?”
이 사람은 어떤 것을 원할까? 장일소의 시선에, 그는 어떻게 보일까?
돌아온 대답은 호가명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네게 원하는 것이라…….”
장일소의 입가가 비틀린다.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순간 말을 잃은 호가명이 장일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이 뭔지, 사람이 뭔지도 모르는 멍청한 문사철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지. 너 따위는 거름으로도 못 써먹어.”
호가명의 얼굴이 살짝 꿈틀했다.
“하면…….”
“원하는 것과 받을 대가는 다르지. 나는 네게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지, 네게 원하는 게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어려울지 모르나, 호가명은 그 미묘한 차이를 곧장 이해했다.
“그럼 저는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호가명이 묻자 장일소가 빤히 그를 주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불타는 장원이 들어왔다. 밝은 눈동자가 타오르는 불빛에 물들어 핏빛으로 붉어 보였다.
“내 개가 돼라.”
“…….”
“지겨워졌거든, 이제. 저 더럽고 냄새나는 뒷골목이나 손아귀에 쥐고 아등바등하는 짓거리도.”
호가명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장일소는 왕사를 죽이는 일에 동조했다.
아무리 황실의 힘이 먼 땅까지 구석구석 제대로 미치지 않는다고 해도, 한동안은 추적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건 지금 장일소가 가진 모든 기반을 잃는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장일소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건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나는 더 큰 것을 원한다. 고작 이따위 장원 하나를 불태우는 게 아니야. 태우려면 더 큰 것을 태워야지.”
불에 타고 쓰러져 가는 장원을 응시하던 장일소는 금세 그 광경에 흥미를 잃고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호가명은 제게로 향한 그 가라앉은 시선에서 처음 장원을 보던 눈과 비슷한 열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딴 머저리들로는 안 돼. 최소한 머리는 돌아가는 인간이 필요하지.”
장일소의 눈이 거칠게 이글거렸다.
“나와 같이 더러운 진창을 굴러라. 살아서 지옥을 겪어라. 그리고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라. 그게 네가 치러야 할 비싼 대가다.”
“…….”
“거절 같은 건 용납하지 않는다. 네 목숨값은 이미 지불했으니까.”
호가명이 실소를 흘렸다.
원하는 것은 없다. 그래, 원하는 게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의 눈에 지금의 호가명은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샌님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이 손에 묻힌 피로 최소한의 자격은 얻었을 터. 저자가 말하는 진창에서 발버둥 치다 보면 언젠가 훗날의 호가명은 저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가 될 것이다.
원하는 건 없지만, 받아야 할 대가는 있다는 건 그런 뜻이겠지.
“알아들었나?”
거칠게 끓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호가명은 그 안에 어린 아주 작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는 너무 작아서, 어쩌면 호가명만이 알아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호가명은 알게 되었다. 이 사내는 지금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꽤 간절히 자신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장일소를 응시하던 호가명이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제게 바라는 것은?”
“살아남을 것.”
장일소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미 준비해 둔 대답이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냉철할 것. 언제 어디서고, 어떤 순간에도.”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장일소의 눈빛이 성난 맹수처럼 포악해졌다.
“조건? 네가 조건을 입에 담을 입장이라 생각하나?”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잡아 뽑아 버릴 것만 같은 살기가 쏟아졌다.
온몸에 전율을 주는 흉포함 앞에서도 호가명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여유를 가지십시오.”
장일소의 움직임이 뚝 끊긴 듯 멈추었다. 끓어오르던 기세도 으르렁대던 살기도 환상처럼 사라졌다.
장일소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호가명을 훑어보았다. 호가명이 차분히 말했다.
“사람들은 이를 드러낸 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전부라고 여기니 말입니다. 하지만 위기에도 웃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아직 무언가 숨겨 둔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
“당신이 정말 위에 서고 싶다면, 더 많은 것을 쥐고자 한다면, 여유부터 가지십시오. 더 웃고, 더 내려다보고, 더 오만해지십시오. 가지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가진 자처럼.”
호가명이 장일소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 언제고 당신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겁니다.”
호가명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살아남을 것, 그리고 냉철할 것. 기억하겠습니다.”
호가명이 고개를 숙였다. 제 앞에 무릎 꿇은 그를 내려다보던 장일소가 시선을 돌렸다. 불타는 장원, 검은 하늘, 그리고 제 앞에 오롯이 무릎 꿇은 남자.
“하…….”
그의 입술이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더없이 요사스럽고 여유만만한, 말 그대로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그러고도 한참 키득대던 장일소가 되뇌었다.
“가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가진 자처럼…….”
장일소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흉흉하던 살기와 흉포함 대신 여유를 한껏 싣고, 그의 눈이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었다.
“명심하지. 죽는 순간까지.”
호가명 역시 옅은 미소를 흘렸다.
이것은 그가 치러야 할 대가이자 서로 지켜야 할 거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건 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불타는 세상과 그 앞에 홀로 선 한 남자를 호가명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더없이 오연하고 위태로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과거가, 살아온 삶이, 그가 알던 모든 것이 타오르는 불길에 휩쓸렸다. 이윽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각오 단단히 하렴. 지독할 거란다.”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한…….”
“음?”
“즐겁겠지요.”
장일소가 말없이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호가명 역시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지독히 어두운 밤, 타오른 불씨가 바람에 흩날려 두 사람을 휘감듯 내려앉았다.
장일소의 입이 담백하게 열렸다.
“가자꾸나, 가명아.”
“예, 당주님.”
겨우 내디뎌진 한 걸음. 이는 오랫동안 길게 이어질 동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