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61
1661화. 그곳이 어디든. (1)
“자, 장문인!”
가파르게 치솟은 천주봉(天柱峰), 그 위로 성벽처럼 지어진 무당의 전각에서 아래를 바라보던 허산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 저거⋯⋯.”
긴 도포 소맷자락 안에 감춰진 손이 잘게 경련했다.
천주봉은 천하에 이름 높은 무당파가 위치한 곳이자, 무당산의 최고봉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당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런빛 섞인 회색 절벽과 푸르른 소나무, 그리고 이를 타며 도는 새하얀 운무까지. 그렇게 익숙하디익숙한 정경에, 지금은 더없이 낯선 색이 범람해 오고 있다.
무당산을 뒤덮은 상록수(常綠樹)의 초록빛 아래로, 지금껏 없었던 붉은빛이 날름거리며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점차 검은 연기가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산자는 마치 말도 안 되는 꿈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망연했다. 만세토록 푸르기만 할 듯했던 무당산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새하얀 천에 핏물이 스며들 듯이.
“화, 화공을⋯⋯.”
곁에서 함께 지켜보던 장로들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가셨다. 상상도 한 적 없다. 감히 이 무당산에 불을 지르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말이다.
“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매복은? 매복은 이제 어찌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런 상황에 매복이 무슨 소용인가! 나무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까지 모조리 다 타 버릴 텐데, 시커먼 민둥산 어디에 숨을 곳이 있다고 매복을 하나! 당장 물려야지!”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뒷말은 차마 이어지지 못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아는 것이다. 무당을 수호해 온 소나무 숲이, 깊은 계곡과 천혜의 동굴들을 가려 주던 울창한 수림이 사라진다면 이곳은 그저 적당히 높기만 한 뻔한 산이 되고 만다는 걸.
그리고 무학을 익힌 자들에게 그토록 뻔한 산의 경사 따위야 평지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장로들조차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장문인!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이를 어찌합니까!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수로 말입니까?”
“뭐라도 해야지! 물을 들고 나르든! 불길이 번지지 못하게 땅을 파든! 뭐라도⋯⋯!”
사방에서 이런저런 악다구니가 들려왔지만, 정작 허산자의 두 눈은 점점 커져 가는 불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흡사 악마의 혀처럼 무당을 유린하기 위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멍하니 시선만 던지던 허산자가 앓듯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 어떻게 이리 빠를 수가⋯⋯.”
“자, 장문인?”
“어찌⋯⋯.”
허산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화공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토록 당황할 만한 수법은 또 아니다.
무인 사이의 전쟁이니 평범한 전쟁에 비할 수는 없어도, 어쨌거나 전쟁은 전쟁이니 말이다. 화공이란 전쟁 중에 언제든 나올 수 있는 계책 아니던가.
그럼에도 지금 허산자가 이토록 크게 당황한 이유는, 불길이 번지는 속도와 범위가 그의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공이라는 걸 깨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온 세상이 불길에 먹히고 있는 듯하다.
산이란 본디 정상이라는 작은 점 하나에서 길게는 수백 리까지 뻗어 나가는 게 아니던가? 한데 그 땅과 이어지는 무당의 경계에 한 점 남김없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거대한 불길의 동아줄이 무당산을 칭칭 휘감은 듯한 형세다.
그럼 저 불길은 대체 얼마나 길고 넓은 곳을 불태우며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까.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엄두가 나지 않는 광경이다.
“대체⋯⋯.”
심장이 절로 옥죄어 왔다.
저 시뻘건 불길이 무당을 옥죄어 오는 것처럼.
❀ ❀ ❀
“불을 놔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불이 번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일단 모조리 태우란 말이다!”
거대한 대도(大刀)를 한 손에 든 이가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불붙은 봉을 든 이들이 부리나케 여기저기로 달려 나가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마른 나무에 불붙은 몽둥이를 마구잡이로 쑤셔 댔다.
“기름을 잔뜩 발라라! 마른 낙엽을 모아 불쏘시개로 쓰고, 태울 것이 없으면 옷이라도 태워라! 모조리 불 질러!”
휘이잉!
그때, 산을 타고 불어온 건조한 바람에 불길이 크게 일었다. 그러자 견디기 힘든 열기가 앞으로 달리던 이들을 덮쳤고, 그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기겁하며 물러났다.
이 광경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대도를 든 이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들 중 하나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칠고 포악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하는 거냐? 왜 물러나! 저 앞에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이 보이지 않느냐?”
“보, 보입니다! 하, 하지만 지금은 바람 때문에 불길이⋯⋯.”
“불길이 왜? 화상이라도 입을까 봐 겁이 나나? 응?”
콰득!
그 순간, 붙들렸던 이의 등에 대도가 한 치쯤 박혀 든다.
“선택해 봐. 불에 타 죽는 게 나을지, 등에 바람구멍이 뚫리는 게 나을지.”
“히, 히익!”
“왜? 내가 대신 선택해 줄까?”
그 말에 모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휘몰아치는 불길이 금방이라도 몸을 새까맣게 살라 먹을 것 같지만, 당장 등 뒤에 번뜩이는 칼보다 두렵지는 않았으니까.
대도를 든 이가 다시 한번 우렁차게 윽박질렀다.
“물러나는 놈은 내 칼에 죽는다! 빠르게 불을 질러라! 보이는 게 모조리 불탈 때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서둘러!”
무당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거대하고 긴 산맥. 그 곳곳에서 지금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불이! 불이⋯⋯!”
용기로, 객기로, 그도 아니면 두려움에 굴복해 앞으로 나서며 불을 내지르던 이들 중 몇은 휘몰아치는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화염에 휘말렸다.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타오르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졌지만, 돕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덩달아 그 불길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채 수분이 다 마르지 않은 나무들이 거친 불길에 휩싸이며 매캐한 연기를 뿜었다. 사위가 뿌옇게 물들 정도였다. 질식할 것 같은 연기와 살을 녹일 듯한 열기를 뿜는 불길.
지옥을 옮겨 놓은 듯한 그 광경 속에서 무엇보다 지독한 건, 적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려 드는 인간의 광기였다.
“더! 더 질러라! 더! 저 도사 놈들을 모조리 태워 죽여 버려라!”
❀ ❀ ❀
절망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불길이 번져 오는 양상은 괴이하기까지 했다. 해일처럼 마구 밀려드는 것도 아니고,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직 여기까지는 불길이 닿지 않았다고 여긴 곳에서 돌연 점점이 붉은빛이 피어나나 싶으면, 이내 시뻘건 화염이 맹렬하게 그 주위를 집어삼킨다. 그리하여 다른 화염과 합쳐진다.
“사, 사형! 뒤쪽입니다! 등 뒤에서 불이⋯⋯!”
“뭐? 뒤?”
돌아본 진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까지 화마(火魔)는 분명 전방 멀찌감치에서 그들을 덮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수는 분명 그들의 발치에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체 어느새 등 뒤로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단 말인가. 분명 이쪽까지는 화마가 번져 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어찌합니까? 물러납니까?”
“매, 매복을⋯⋯.”
“사형! 여기 이렇게 있다가는 다 죽습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사제인 진문의 닦달에 진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산불에 타 죽는 이들이 뻗어 오는 불길을 멍하니 보다 집어삼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어느새 뒤에서 불이 날름거리고, 달려가다 보면 앞에서 또 있을 리 없는 불길이 치솟는다. 이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 보면 금세 사방에서 피어오른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산에서 살았다 한들 그런 걸 어찌 알며 살아가겠는가.
아니, 오히려 평생을 산에 살았기에 알지 못했다. 불길이 물어뜯고 지나간 산은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그 말인즉, 평생을 하나의 산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들은 단 한 번도 이런 지독한 산불을 경험한 적 없다는 뜻과도 같다.
“사형!”
“무, 물러난다! 일단은⋯⋯ 일단은 후퇴한 후에 다시! 다시 명을 받는다!”
진위로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당을 노리는 적과 싸우기 위해 이곳에 매복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위협하는 건 사패련의 적도들이 아니었다.
평생 검을 수련하고 도를 좇은 이들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불길과 싸우는 법 같은 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진위의 판단은 결코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없이 안타까운 사실은, 원래 상대해야 했을 적들 역시 여전히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자! 여기서 빠져나가야⋯⋯.”
진위가 몸을 감추었던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킨 찰나, 코앞에서 휘몰아치던 불길을 뚫으며 수십의 적도들이 뛰쳐나왔다. 숲이 쩌적쩌적 타들어 가는 소리를 뒤덮으며 끔찍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그들은 몸을 일으킨 진위의 조를 발견하고 즉각 공격해 왔다.
“맞서라!”
송문고검을 뽑아 들며 진위가 이를 악물었다. 검을 겨누기 무섭게 진문이 다급하게 외쳤다.
“사형! 하지만 불길이 점점⋯⋯!”
“물러나다가는 외려 죽는다! 싸워라! 지금은 싸워야 한다!”
“불길이 덮쳐 오고 있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여기서 시간을 끌면 다 타 죽는다고!”
이곳의 매복조는 고작 셋.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 무당의 검수들이다. 스무 명 남짓의 사파인에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점점 사위를 사르며 죄어 오는 불길과 숨통을 할퀴는 매운 연기가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고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다, 달아나! 당장!”
“싸워야 한다니까! 등을 보이지 마! 위험⋯⋯!”
“흐아아아아아아!”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사파인의 도가 사제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진위는 반사적으로 검을 뻗어 도를 막았다.
그 순간, 우수수 쏘아진 다른 도 여러 자루가 진위의 배를 뚫고 들어왔다.
콰드득!
“끅!”
진위가 천천히 제 배를 뚫은 놈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파 놈들이 불길을 뚫고 나오느라 전신에서 허연 연기를 뿜어내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진위가 일거에 검을 휘둘러 배에 도를 박은 사파인 셋의 목을 쳐 날렸다. 진문이 황급히 외쳤다.
“사형!”
“쿨럭!”
도가 뽑혀 나가며 진위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피가 섞여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내장은 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급하게 끌어 올린 내력이 그나마 도를 밀어 낸 덕이다.
하지만 그뿐. 몸에 상처가 생겼단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물러나⋯⋯. 물러나야⋯⋯.’
진위가 휘청이는 몸을 바로 세우려던 그때였다.
“흐아아아아아아아!”
“죽여라아아아아!”
붉은 화염에 휩싸인 소나무들이 일제히 크게 휘청인다 싶더니, 또 다른 사파인 수십이 거센 함성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앞, 뒤, 옆을 논할 것도 없이, 말 그대로 사방에서.
진위의 두 눈이 순간 갈 곳을 잃고 뒤흔들렸다.
“사형!”
“맞서라! 길을, 길을 열어야 한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물러서야 합니다!”
“우는소리 하지 말고 검을 들어! 뚫지 못하면 죽는다! 어떻게든 길을 열어!”
진위의 핏발 선 눈에 독기와 살기가 솟구쳤다.
여긴 장강이 아니다. 무당산이다.
이곳에서만큼은 절망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맞서라아아아아아아!”
진위가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패기 넘치는 고함은 이내 화마가 빚은 소음에 휩쓸리며 흔적도 없이 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