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75
1675화. 바라던 상황 아닌가? (5)
손그림자가 세상을 가득 뒤덮는다.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것만 같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해일에 휩싸이는 순간, 손써 볼 틈도 없이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아득하리만치 큰 절망감.
하지만 허공은 지독한 광경 속에 오롯하게 서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환상이다.’
허초란 결국 사람을 미혹하고 속이는 것. 환상은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사람을 침해하지 못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지독한 환상 속에 몸을 감춘 채 그를 노리고 있을 진짜 독니를 찾아내는 것.
어찌 보면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무당의 심법은 세상의 모든 사특한 것을 파훼하는 정종(正宗) 무학. 사파의 무학과는 완벽히 상극에 있는 무학이므로.
타아아앙!
실제로 그가 뻗은 송문고검은 숱한 장영 속에 숨은 천면수사의 손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하지만 그 손은 뒤로 밀려나기 무섭게 다시금 수많은 장영을 뿜어낸다. 호수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도 그 자리로 금세 다시 물이 차오르듯.
끝없는 반복이다.
그의 검은 적의 허초 사이에 숨은 실초를 꿰뚫을 수 있고, 그의 눈은 수많은 거짓 사이에 놓인 하나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단 한 번의 승부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수없이 뻗어오는 환상 속에서 그 실체를 단 한 번이라도 놓친다면, 그 타격은 허공의 몸에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
퍼어어어억!
바로 지금처럼.
으드득.
허공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수십 번의 공격 중에 고작 한 번 적의 실체를 놓쳤을 뿐이다. 그렇게 놓친 손이 지금 그의 가슴을 강타하고 진득한 사기를 밀어 넣었다.
가슴을 인두로 지진다면 이토록 고통스러울까 싶었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더 허공을 괴롭게 하는 건, 이 끝없는 반복에 대한 염증……. 아니, ‘공포’라 불러야 할 감정이었다.
퍼어억!
순간적인 흔들림이 그의 이성을 뒤흔든 것일까.
연이어 놓쳐 버린 장영이 어깨와 허벅지를 연달아 강타해 왔다.
“큭!”
허공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휘청 물러섰다.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곧 절벽에 오를 적들의 운신 범위가 넓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가격당한 부위에서 밀려오는 통증은 집요하지만 ‘미약’했다.
허공의 호신강기가 아무리 정순하다고는 하나, 저만한 고수가 날린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이렇게 무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가격당한 부위는 흡사 대련 중에 맞은 듯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 말인즉, 실체라 불러야 할 장력에조차 힘이 거의 실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힘이 실리지 않은 껍데기뿐인 공격을 허초라 한다면, 힘이 거의 실리지 않은 미약한 장력은 뭐라 불러야 하는가?
허와 실을 어찌 구분해야 하는가?
허공은 지금 바로 그 간극에 놓여 있었다. 진(眞)과 가(假), 실(實)과 허(虛)의 모호한 구분 속에.
“답답해 보이는군.”
그때, 휘몰아치던 장력이 씻은 듯 사라지며 여유만만하게 뒷짐을 진 천면수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오만한 모습이라 하겠지만, 허공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저건 오가는 공방 와중에 그 손에 새겨진 작은 상처의 흔적조차 내보이지 않는 용의주도함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 철두철미함에 허공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대단한 검술이군. 인정하지. 과연 무당이라 해야 하나.”
“…….”
“하지만…… 산속에 너무 오래 있었군.”
으득.
허공이 이를 갈아붙이며 물었다.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룰 생각은 없는 건가?”
“이보다 더 정정당당한 승부가 있나?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공략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승리를 쟁취한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정정당당이다.”
“…….”
“기뻐해도 좋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다는 건 너를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허공이 짧게 심호흡했다.
이게 정말 일대일로 겨루는 정당한 승부였다면 허공 역시 급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런 승부가 아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저자를 이곳에서 떨구고 절벽을 오르는 이들을 저지해야 한다.
처음부터 천칭의 축은 저자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지금의 허공에게 그 저울을 다시 자신 쪽으로 기울일 능력이 있을까?
허공은 이를 악물고 검을 움켜쥐었다.
‘아니.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해야 한다!’
과거였다면 어려운 일이라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데 객기를 부려서 화를 입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하지만 허공도 이제는 안다. 세상에는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해내야 하는 일이 있음을.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지 못한 게 통탄스러울 뿐이다.
스슷.
허공의 발이 느릿하게 앞으로 움직였다. 이를 본 천면수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성질도 급하시지.”
천면수사로서는 이리 느긋하게 대화만 나눈다 해도 나쁠 게 없다. 절벽을 올라온 이들과 합세한다면 허공쯤은 딱히 힘들일 것도 없이 목을 따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허공의 입장은 완전히 반대이리라.
“무의미한 짓을 반복할 셈인가? 자네의 검술로는 내 장력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알 때도 됐을 텐데?”
그 말에 허공이 피식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무당의 공은 정공 그 자체, 무리하지 않고 단단한 검술로 상대의 실기를 기다리는 검술이다. 실체를 단번에 파악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상대가 급하지 않다면 지지는 않을지언정 시간을 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깨달은 게 하나 더 있었지.”
그 평생 잊지 못할 비무에서.
타앗!
허공이 땅을 박차며 천면수사에게 쇄도했다.
“검술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화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천면수사의 전면으로 장영이 폭발적으로 번져 나왔다. 일순 눈앞이 아득해질 만한 광경. 하지만 허공은 지금까지의 대처와는 달리, 검을 머리 뒤로 크게 내뻗었다.
그러고는 내리친다.
파아아아아앙!
일도양단(一刀兩斷). 검을 타고 휘몰아친 검고 흰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내뿜어졌다.
세상을 백색으로 물들이며 퍼지던 천면수사의 장력이 그 가공할 검기에 닿으며 환상이었던 것처럼 부스러졌다.
실과 허를 구분하지 않는다. 실이든 허든 부수어 버린다면 애초에 구분 따윈 무의미하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조화를 담았다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이 그 이름이 무색하도록 마치 사파의 검처럼 과격하게 펼쳐진 셈이다.
“헛?”
그 과격한 기세에 천면수사도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경호성을 흘리며 몸을 뒤로 띄웠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허공이 이를 악물고는 빈 허공을 박차며 천면수사에게 따라붙었다.
퍼어억! 퍼억!
미처 다 흩어지지 못한 장력의 잔기(殘氣)가 몸을 두드렸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힘을 싣지 않은 장력이 아니던가.
“놓치지 않는다.”
검이 다시금 섬전처럼 뻗어 나간다. 순간, 눈빛을 냉정히 가라앉힌 천면수사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사파제일수인 동시에 사파제일신(邪派第一身)으로도 불리는 이다. 과연 그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눈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공 역시 허공이다.
파아아아앗!
급격하게 방향을 튼 검이 아무것도 없는 머리 위로 내질러졌다.
서걱.
감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검이 무언가를 베어 내는 소리만큼은 확연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퍼억!
그와 동시에 등에서 강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몸을 억지로 뒤트느라 허점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상처 입어도 괜찮다는 각오가 없이는 저자를 잡아 내는 게 불가능했다.
“하아아아압!”
그가 입에서 울컥 뿜어진 피까지 기합과 함께 쏟아내며 검을 치켜들었다. 맹렬히 솟구친 두 가지 기운이 검 끝에서 합일(合一)하고, 검신이 그대로 내리쳐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기운이 암석 표면을 부수고 뻗어 나간다. 심지어 절벽 뒤로 자라난 노송을 몇 그루나 뿌리째 뜯고서야 이어진 산자락에 처박히며 멈추었다. 주위에 거대한 상흔이 남았다.
“후욱!”
허공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천면수사가 모습을 드러내며 땅에 내려섰다. 두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종아리 부근에 난 작은 상처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채기 같지만, 그 상처는 그의 근육을 적어도 반 치는 갈라 놓았다.
뒷짐 진 천면수사의 손이 살짝 꿈틀했다.
다리에 입은 상처는 손에 입은 것과는 다르다. 그의 손이 적을 농락하는 도구라면, 다리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 바로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공격으로 목숨줄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무당이 이리 과격한 문파인 줄은 몰랐는걸?”
천면수사가 중얼거리자 허공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건 무당 무학의 운용이 아니다. 상궤에서 벗어난 운용에는 평소의 배가 넘는 내력을 소모하게 된다. 안 그래도 내력 소모가 심한 혜검을 뒤틀어 운용한다는 건 정신 나간 짓이나 다름없다.
아니나 다를까 단 두 번의 칼질만으로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 그리고 이건 무당의 검이 추구하는 바와도 다르다.
하지만 허공은 또한 알고 있었다.
“검은 검일 뿐이다.”
“음?”
“중요한 건 내가 무당의 도인이라는 것이지, 어떻게 검을 휘두르느냐가 아니다.”
헐떡이던 허공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리며 웃음 같기도 하고 짜증 같기도 한 표정이 어렸다.
“마치 사파와 같은 검을 쓰면서도…… 누구보다 도인다웠던 이도 있었으니까.”
“…….”
“검은 내 뜻을 관철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에서 같은 검을 써야 한다면 외려 나는 그 검에 끌려가는 이가 될 뿐이다.”
“네 검론 따위는 제자들에게나 설파하는 게 나을 것 같군. 아, 물론 이 전쟁 뒤에도 네 제자들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
“나를 죽이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군. 그리 말하는 걸 보니.”
“……그새 입이 좀 매워졌네.”
천면수사가 피식 웃었다. 허공은 다시 검을 움켜잡았다.
억울함을 성토할 필요도 없다. 저자가 원하는 대로 싸워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전투를 이끌어 가면 된다. 그 꼴 보기 싫은 놈이라면 분명 그리 말하겠지.
웃긴 일이다.
더없이 높은 검의 경지에 오르는 일이 누구보다 검을 무시하는 것과 닿아 있다니.
“물극필반(物極必反)인가.”
허공의 엄지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끌려가는 게 틀린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한다. 무력하게 다가올 패배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간…….”
허공이 다시금 땅을 박차며 쇄도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천면수사가 힐끗 옆을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너 혼자 힘을 낸다고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이윽고 허공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비탈을 봉쇄하러 갔던 그의 사질들이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사숙!”
“여긴 더 막을 수 없습니다!”
허공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잔뜩 지치고 다친 모습으로 백안암 위로 올라와 어떻게든 다시금 진영을 갖추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이 더없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이 절벽 위를 내어준다고?
저 수많은 적을 상대로?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고 비탈을 포기한 건가?
숱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지금 허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눈에 가득했던 의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로 허망함이 밀려들었다. 그의 시선이 천면수사에게로 돌아갔다.
천면수사가 친절하게, 하지만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게 또 전쟁이지.”
“…….”
“이제 슬슬 끝을 낼 시간이다. 네 이름 따위는 기억해 주지 않을 테니, 원통하게 죽어라.”
허공의 얼굴에 마침내 숨길 수 없는 절망감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