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78
1678화. 그냥 믿는 것뿐이야. (2)
물러난다. 아니, 무시하고 지나친다.
힐끔거리는 시선까지는 통제할 수 없지만, 어쨌건 천우맹은 이곳에 진을 친 이들을 무시하며 무당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여유롭게 보던 장일소가 빙그레 웃더니 제 앞에 앉은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흐음, 비정하기도 하지.”
“…….”
“정말 저렇게 가 버릴 줄은 몰랐네. 정파 놈들은 정이 넘친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잘도 지껄여 대네, 사파 새끼가.”
“사나워라.”
장일소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청명 앞에 놓인 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잔이 비었군.”
그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친히 청명의 잔을 채워 주었다.
술이 졸졸 쏟아지는 소리와 수많은 이의 발소리가 뒤섞여 주위로 번져 나갔다.
탁.
병을 다탁 위에 내려놓은 장일소가 손끝으로 술병을 살짝 밀어 건네었다.
“나도 한 잔 주렴.”
“…….”
“이렇게까지 했으니 나도 감투 하나 정도는 받아 가야 하지 않겠니? 천하의 화산검협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셔 본 유일한 사파인 정도면 그럴싸한 감투가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청명은 빙글빙글 웃는 장일소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다 병목을 잡았다. 그리고 비어 있는 장일소의 잔을 천천히 채우기 시작했다.
졸졸졸졸.
술이 이내 잔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울여진 술병은 제자리로 돌아갈 줄 몰랐다. 장일소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청명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비웃음 어린 듯한 얼굴로 장일소를 보고 있었다.
“요즘은…… 사파 새끼들도 잔에 따른 술을 처먹는 모양이지? 나 때는 바닥에 흘린 술도 좋다고 핥아 처먹었는데.”
청명의 입가가 지독하게 비틀렸다.
“자, 마셔 봐. 네 말대로 흔치 않은 일이니 영광인 줄 알고.”
장일소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분노한 홍견이 일제히 쏟아 낸 어마어마한 살기가 청명에게로 향했다.
격하고 살벌하다 못해 유형화된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청명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대충 높게 묶어 놓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한편, 조걸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는 윤종, 혜연과 남궁도위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청명의 모습이 점차 작아진다. 안정을 찾지 못하니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청명을 저기 혼자 두고 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다.
그럼에도 조걸이 평소처럼 즉각 반발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부당주라는 직책이 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명이 떨어진 이상 따른다.
그것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이들에게 제 명에 따라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
앞서 치고 나가는 백천에게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하지만 조걸은 입을 여는 대신, 검 손잡이만 콱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사숙,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조걸 대신 윤종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꾹꾹 억누른 듯한 목소리였다. 그 역시 백천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대답이 없었다. 윤종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사숙!”
“괜찮을 거다.”
“그렇지만……!”
“생각 없이 굴 놈이 아니다.”
백천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장일소 놈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면 반드시 패한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무수한 희생을 바탕으로 얻은 결론이었잖으냐?”
윤종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만 두고 가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 순간,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백천이 반사적으로 획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들썩이는 홍견과, 그 앞에 태연히 앉아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인다.
백천은 침묵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지금은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
그저 믿는 거다. 녀석이…… 녀석이 다름 아닌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사실을.
기다란 손가락 끝이 다탁에 흐른 술을 가볍게 훑었다. 술이 맺힌 손끝은 이내 붉은 입술로 향했다.
장일소가 술을 천천히 핥더니 말했다.
“아깝게……. 좋은 술이라고 말했거늘. 이래서 곱게 자란 것들은 못써.”
가볍게 푸념한 장일소가 이를 갈아붙이고 있는 홍견을 흘끗 보았다.
“쯧. 버릇없이.”
그 단순한 말 한마디에, 홍견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너희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니. 적당히 하렴.”
홍견이 일제히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눈으로 그들을 힐난한 장일소는 청명을 향해 염치없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미안하구나. 훈련한다고 했는데, 워낙에 거친 아이들이라.”
“주인을 닮은 거겠지.”
“흐음.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
청명이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셨다.
탁.
빈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장일소가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물었다.
“이유나 들어 보자.”
“이유?”
장일소가 되묻자 청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이유가 뭐지? 굳이 내 발목 하나 잡겠다고 이런 짓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난 그저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란다.”
“…….”
“이런, 이런.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장일소가 난처하다는 듯 과장된 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한번 의심을 사기 시작하니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영 믿어 주질 않거든. 참 답답한 노릇이야.”
“자업자득이란 말도 모를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는걸.”
“……끄응.”
장일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의도로,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앉아 있든, 지금 장일소의 태도가 오래된 친우를 만난 듯 자연스럽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날 세울 것 없단다.”
장일소가 부드럽게 말하며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청명이 채운 잔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음미하듯 술을 마셨다.
“어차피 너도, 나도 서로에게 속내를 모두 털어놓을 순 없지만…… 한 번쯤 이렇게 너와 마주 앉아 보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니까.”
청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장일소를 응시했다.
“겸사겸사 나를 이 자리에 묶어 두기도 하고?”
“그건 뭐,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잖니.”
“그리고 기회가 되면 목에 칼도 박아 넣고 싶겠지.”
“하하하핫!”
장일소가 파안대소했다.
“내가 그렇게 욕심이 과하진 않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과히 먹으려 들면 체한다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기름한 두 눈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청명은 안다. 부드럽게만 보이는 저 눈빛 속에 숨은 잔혹함을. 잘 벼려진 날을 지켜보는 것 같은 묘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청명이 술병을 잡았다.
쪼르륵.
명주실처럼 길게 늘어진 술이 장일소의 빈 잔을 느릿하게 채워 간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흔쾌히 앉아 줄 줄은 몰랐는걸? 꽤 설득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마찬가지니까.”
청명이 다소 무심한 어투로 혼잣말처럼 답했다.
“상종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 역시 네놈과 한 번쯤은 대화라는 걸 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호오?”
“그리고 또 마찬가지니까.”
“음?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청명이 술병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장일소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네가 나를 여기에 묶어 두기만 하면 무당 따위는 거저먹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나도 너를 여기에 묶어 두기만 하면 사패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장일소의 눈꼬리가 조금 휘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건방 떨지 마.”
“…….”
“그러니 손해가 없다고 여긴 것뿐이야.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너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저곳으로는 달려가지 못할 테니까.”
“이런, 이런.”
장일소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묶어 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묶어 둔 거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하하.”
장일소가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얼굴은 아까와 달리 조금 일그러진 듯했다.
“이래서……. 그래, 이래서 네가 재밌다는 거란다. 다른 머저리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하지만 글쎄……. 그게 과연 네 생각대로 될까?”
장일소의 시선이 청명의 얼굴을 떠나 바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을 기어코 부여잡고 있는 허도진인이 있었다.
“사람이란…… 때로는 과대평가하기 마련이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
“그래서 눈이 흐려지는 거란다.”
그 말을 들은 허도진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통스럽겠지.
천참만륙을 내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적에게 되레 당하고, 이리 쓰러진 채 조롱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니 마음 같아서는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패자에게 굴욕이란 피할 수 없는 형벌이다. 지금의 허도는 그저 이 굴욕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는 어떨까? 너는 과연 네가 이끄는 이들을 냉정하게 보고 있을까?”
표정 없이 듣고 있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냉정 같은 소리 하네. 이미 과하게 했어, 그런 건.”
청명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냉정히 바라보고, 도움이 안 된다 힐난하고, 혼자서 악을 써 대는 거.”
“…….”
“그래. 마치 지금 너처럼 말이야.”
장일소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이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그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럼, 지금 네가 하는 건 뭐지?”
장일소가 물으니 청명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끝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천우맹이 있었다.
“그냥…….”
청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누군가가 들으면 대책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과거였다면 절대 그의 입으로 내놓았을 리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패 끝에 마침내 도달하고 찾아낸 대답이었다.
“그냥 믿는 것뿐이야.”
“……저놈들을?”
청명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들을. 그리고 내가, 우리가 해 온 것들을.”
장일소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늘 여유만만하던 표정에 금이 간 것이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뭐라 해야 할까.
황당함? 분노? 아니, 사실은 절망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표정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결국 하나뿐이리라.
“이거…… 실망인걸?”
장일소의 붉은 입술 새로 흰 이가 드러났다.
연신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부드럽던 목소리도 이젠 없다.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네 입에서 그딴 말이 나올 줄이야.”
“…….”
“그래도 조금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 조소 어린 살기 앞에 청명도 이를 드러냈다.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폭탄처럼.
화산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