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94
따악.
소매 속에 감춰졌던 손가락이 마찰하며 높은 소리를 냈다.
호가명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군사! 방금은…….”
“호들갑 떨 것 없다.”
동요 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불길을 타 넘는 과정에서 사고가 생긴 모양이다. 덕분에 원래 계획과는 조금 틀어진 모양새가 되었지만…….
“남은 병력도, 준비해 둔 폭약도 충분하다. 저 정도 손실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예!”
호가명이 굳은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절벽의 진동이 가라앉고, 이내 태양궁의 정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가명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폭약의 위력이 높군.’
그래 봐야 임읍이라고 여겼다. 변방의 오랑캐들이 얼마나 대단한 폭약을 준비할 수 있겠냐 생각했건만…… 의외로 저들이 공수해 온 폭약의 질이 꽤 좋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남은 폭약만으로도 저 절벽 따위는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태양궁도들의 충성심 역시 예상외로군.’
제 동료가 가루가 되어 버린 상황이건만 여전히 임무를 수행하려 든다.
‘어찌 됐든 왕족이라는 건가?’
호가명이 머릿속으로 태양궁주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든, 일단 수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군사. 저들이 상황을 알아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하, 하면?”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산을 되레 올라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호가명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이미 산 뒤로 병력을 배치해 놓았다. 절벽에 진입하지 않은 이들이 저들의 탈출을 막을 것이다.”
부관은 질린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병력을 산 뒤로 돌려 절벽 정상을 포위한 전략이 무당을 포위하기 위해서가 아닌, 결국엔 저 정상에 도달할 화산이 빠져나갈 길을 막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절벽을 내려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절벽이 무너지는 건 이미 정해졌다. 아래로 향하는 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들에게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관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하지만 설마 저리 쉽게 걸려들 줄은……. 과연 군사님의 전략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까?”
“……예?”
부관이 의문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나 호가명은 굳이 그 의문을 해소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뛰어난 전략이라…….’
호가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저 저기에 매화검귀가 없는 것뿐이겠지.’
매화검귀가 저곳에 있었다면, 저 절벽을 보자마자 그가 짠 전략 따위는 단숨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자니까.
병법?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병법으로 따지자면 매화검귀보다 녹림왕 임소병이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화검귀에게는 임소병도 호가명도 해석해 내지 못할 것을 읽는 능력이 있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나 화산은 아니지.’
호가명도 화산이 뛰어나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그래 봐야 따르는 자에 불과하다. 따르는 자들은 자신이 어렵사리 해낸 것들을 영광으로 삼고, 그 영광을 재현하려 들 뿐이다.
그런 이들을 유인하기란 너무도 쉽다. 수월하지는 않지만 해낼 수는 있는, 과거 그들이 성공했던 길을 적당히 보여 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달려들 수밖에 없게 된다. 적당한 위기감과 적당한 사명감, 그리고 스스로 이룬 것에 대한 과신을 떠올리게끔 해 주면 된다.
그렇기에.
“매화검귀가 없는 화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깔끔한 처리를 위해서는 이쪽도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천우맹에서 화산이라는 상징을 도려내고, 매화검귀의 손발을 잘라 내는 데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할 만하다.’
호가명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번뜩였다.
어렵지 않다.
인정하면 된다. 그가 저 매화검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평생 병법만 갈고닦아 온 그가 검을 쓰는 무인에게 뒤처진다는 건 인정하기 쉽지 않으나, 그것만 인정해 버리면 방법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군사. 생각보다 일찍 우리의 전략이 드러났는데, 천우맹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곧 무너질 절벽에 올라 응전이라도 한다는 건가? 화산의 무덤에 순장되기 위해?”
“물론 그건…….”
“오히려 바라는 일이다. 다만 아쉽게도 저들이 그렇게까지 멍청할 것 같지는 않군.”
호가명의 시선이 절벽 아래 방향으로 내려갔다.
“나 역시 저들이 떠들어 대던 협의가 완전히 거짓이라 여기진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무언가라 할지라도 믿고 따른다면 실체는 있다 해야겠지.”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이 과연 협의를 논할 상황인가는 살펴보아야지. 과연 개죽음도 협의라 하는가?”
“아…….”
그 말에 부관이 작은 탄성을 흘리며 절벽을 다시 돌아보았다.
확실히 호가명의 말대로 지금 저 절벽을 오른다는 건 가망도 없는 일에 제 목숨을 내던지는 짓거리나 다름없다. 그건 협의나 의리가 아닌 ‘광기’의 영역이다.
그리 대책 없는 인사들이었다면 강호에 이름 높은 문파의 수장이 될 수는 없었을 터.
“제 사형제들을 너무 믿었군, 매화검귀.”
호가명의 입가가 살짝 꿈틀했다.
매화검귀가 없는 천우맹은 얼간이 모임에 불과하고, 장일소가 없는 사패련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중 사패련이 조금 나을 뿐. 그 작은 차이가 이곳의 운명을 갈랐다.
“이제…….”
호가명이 다시 지시를 내리려는 찰나였다.
“군사! 저기!”
난데없는 외침에 살짝 놀란 호가명이 상념을 끊고 절벽 쪽을 바라보았다.
절벽의 아랫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붉게 물든 절벽,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새하얀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아주 가늘었지만, 또 환히 빛났다.
호가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군사. 저건…….”
“하. 인간의 광기란 알 수가 없군.”
호가명이 코웃음 치듯 말했다.
“내버려 둬라. 혼자 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위태로운 하얀 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콰각!
남궁도위의 발이 연이어 절벽을 박찼다.
“도위야아아아아아!”
등 뒤에서 남궁명과 남궁세가 가솔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남궁도위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핏발 선 그의 눈은 절벽을 횡으로 내달리고 있는 남해태양궁의 궁도들만을 좇고 있었다.
조금 전 폭발이 저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참사였는지 잠시 동요하는 듯했으나, 이내 정비를 마치고 다시 절벽 중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턱 근육이 불거질 정도로 이를 악문 남궁도위가 내력을 모조리 끌어냈다.
그의 몸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절벽을 타올랐다.
그렇게 절벽을 박치며 나아가는 중, 폭발의 충격으로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가 부스러지며 발이 훅 미끄러졌다. 속도를 한껏 내던 몸이 순간 아래로 휘청였다.
“소가주니이이임!”
수직을 넘어 역경사의 절벽이다.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수도 있다.
콰각!
남궁도위가 손을 내뻗어 절벽 면에 힘껏 박아 넣었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내력을 싣지 못해 손가락이 부러진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남궁도위는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몸을 끌어 올리며 위로 쇄도했다.
쾅!
다시 절벽을 박찼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남궁도위는 절벽을 타올랐다.
남궁세가의 검은 천하에 이름 높다. 하지만 경공은 그 드높은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이건 남궁도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족한 경공으로 가파른 절벽을 전력으로 타고 오른다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는 행위다. 절벽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자살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남궁도위의 머릿속에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가주될 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도, 그 자신의 안위도, 자신이 위험에 몸을 내던짐으로 인해 초래하게 될 결말마저도 모조리 비워 냈다.
‘그들은 생각했던가?’
파앗!
남궁도위의 발이 비호처럼 빠르게 절벽을 박찼다.
몸이 흔들릴 때면 검을 내리찍어 절벽에 박아 넣고 다시 절벽 면을 박찼다. 점점 속도가 붙은 그의 몸은 이제 돌아오지 못할 화살처럼 맹렬하게 쏘아졌다.
“타아아아아압!”
뒤가 없는 것처럼 내력을 끌어 올린 남궁도위의 입에서 악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쿠릉. 쿠르릉.
땅이 무너지고 세상이 뒤집힐 듯하던 흔들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옥 같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누군가가 가까스로 그 정적을 깨며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당혹감이 피아 구분 없이 삽시간에 번져 갔다.
서로를 향해 노한 짐승처럼 달려들던 이들이 어느새 공격을 멈춘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당군악은 입술을 짓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설마…….’
그의 눈이 절벽 끝으로 향한다.
이 흔들림과 굉음만으로도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방금 그건, 무슨……!”
“뭐, 뭔 일이냐고!”
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사패련의 이름을 가진, 적어도 이곳에서 사패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이들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당군악은 이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고작 우릴 죽이기 위해 여기 있는 모두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건가?”
그 물음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그의 앞에 선 이를 향한 것이었다.
천면수사 담여해.
그는 하오문의 수장인 동시에 사패련의 이인자를 다투는 이다. 가진 명성과 실력을 고려해 볼 때, 저 호가명보다 위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터.
하지만 지금 그는 바로 이곳에 있었다. 다름 아닌 지옥의 한가운데에.
“아무리 그대가 신법으로는 천하에 적수를 찾기 어려울 수준이라고 하나,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을 텐데? 설마 이런 무모한 짓을 그대가 받아들일 줄이야.”
당군악은 말을 이으며 천면수사의 모든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천면수사의 반응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폭발이 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들이 빠져나갈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면, 최소한 담여해에게선 여유를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언제 지옥도로 화할지 모르는 이 공간에 한 줄기 빛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장일소에 대한 충심이 내 생각 이상…….”
하지만 당군악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절벽 끄트머리를 빤히 보던 담여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기 때문이다. 담여해는, 당군악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가명.”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에 공포와 분노, 절망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이……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무시무시한 살기가 담여해에게서 터져 나왔다.
‘천면수사조차 몰랐던 건가.’
희생이 아닌 미끼였다. 천하의 하오문주마저 미끼로 삼아 버렸다는 의미다. 사패련의 이인자나 다름없는 이를.
“……이건 걸려들 수밖에 없군.”
함정이라 부를 수도 없는 함정. 제 팔을 끊어 상대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짓거리를 무슨 수로 피해 가겠는가?
“호가명! 장일소오오오오오오!”
그때, 천면수사의 입에서 악에 받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이 개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으아아아아아아!”
그 절규는 절망의 빛이 되어 절벽 정상으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