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43
화산귀환-1743화(1744/1753)
1743화. 보이지 않습니다. (3)
나무를 깎아 만든, 정교하고도 생생한 신상(神像)이 어두운 천막 중앙에 놓여 있다. 신보다는 마귀, 마귀보단 고통받는 짐승을 닮은 모습이었다.
주변의 초가 흔들릴 때마다 신상으로부터 드리워진 긴 그림자가 천막 벽을 따라 크게 일렁거렸다. 그 광경은 마치 짐승이 어둠 속을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섬뜩했다.
기묘한 공간을 마치 노래하는 듯한 독송(讀誦)이 채운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여러 목소리 덕에 기이할 정도로 분위기가 음산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신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묘한 구절을 끊임없이 독송하던 그는 손에 든 기이한 형태의 제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숱한 짐승들이 뒤얽혀 있는 커다란 원형의 제기는 흡사 ‘제물’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신상 위에서 제기가 서서히 기울여진다. 이내 열일곱 줄기의 핏물이 흘러내려 신상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웅얼거림에 가깝던 독송이 진정한 노래로 화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한없이 경건하면서도 끝없이 음산하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괴이한 제례(祭禮)가 펼쳐졌다.
중앙에 서서 이 모든 걸 주관하는 이, 혈교주의 손이 더없이 신중하게 움직였다. 얼핏 피를 신상 위에 끼얹는 단순한 행위로 보이겠지만, 이 모든 것에는 엄연한 절차가 존재한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손끝에 머물렀다.
펄럭.
그리고 그 순간, 불어온 바람에 천막이 한차례 펄럭였다. 동시에 제기를 든 혈교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아아아아아아아!”
쥐어짜는 듯한 노랫소리가 절정에 이르고, 동시에 제기에서 흘러내리던 핏줄기도 잦아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흘려 낸 혈교주가 조심스레 손을 거뒀다. 경건한 동작으로 제례를 마무리한 후,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양 손바닥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모든 절차를 마친 혈교주가 뒷걸음질로 조심스레 물러섰다.
정교하다고는 하나 결국 나무로 만들어진 목상에 지나지 않는다. 딱히 오래된 느낌도 없고, 특별한 부분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혈교주는 그 신상에 정말로 자신이 모시는 신이 깃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끝까지 심혼을 다했다.
마침내 다 물러선 혈교주가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경건하던 그의 눈동자가 돌연 붉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저벅.
그가 발을 내디뎠다. 발길이 향한 곳은 천막의 한쪽 구석에서 경건하게 제례를 올리던 교도 쪽이었다.
혈교주가 제게 다가오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교도의 낯빛이 시커메졌다.
“교, 교주님……?”
“혈제(血祭)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혈교주의 두 눈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교도의 전신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혈제는 교의 가장 중요한 제례 중 하나다. 교도라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질문의 의미 역시 명백했다.
“참담히 내몰린, 자격 없는 자들이 그나마 신심을 증명하는 자리다.”
“요, 용서! 용서를…….”
콰득!
혈교주의 긴 손가락이 교도의 목을 움켜잡았다. 손끝이 목을 꿰뚫고 들어갔다.
“끄……. 끄르륵…….”
“그런데 그 신성한 자리를 한낱 바람 소리에 신심을 깨뜨리는 불민한 놈이 채우고 있군.”
목소리에 이렇다 할 감정이 비치진 않았지만, 혈교의 교도라면 그 속에 얼마나 큰 분노가 들끓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투두둑!
흘러나온 피가 발끝을 타고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교도가 제 목을 움켜쥔 혈교주의 손을 본능적으로 뜯어내려 바둥거렸지만, 혈교주는 마치 발아래의 벌레를 보는 사람처럼 무심했다.
우득.
끝내 혈교주의 손가락이 교도의 목뼈를 으스러뜨렸다. 교도는 혀를 길게 빼문 채 고개를 꺾으며 축 늘어졌다.
털썩.
숨이 끊긴 이를 내던진 혈교주의 두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새어 나왔다.
“치워라.”
“예!”
“더러운 피 한 방울도 이곳에 남기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혈교주는 부복한 이들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피에 반쯤 젖은 신상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 신상을 응시하던 그가 몸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채 몇 발짝 내딛기도 전에 한 사람이 빠르게 따라붙어 왔다.
“교주.”
혈교주가 슬쩍 옆을 일별했다.
교에는 오직 세 명의 장로만이 존재하는데, 그중 삼장로였다. 낯빛이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긴 기다림 끝에 혈제(血祭)를 지낸 건 감축할 만하나,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 것이오.”
혈교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제물 말씀이십니까?”
“알고 있구려.”
패군 장일소는 양민에게 손대는 걸 금지했다. 적진에서 싸워야 하는 만큼, 굳이 나서서 민심을 이반시킬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참으로 하찮은 이유지만, 어찌 되었건 패군의 이름으로 그러한 명이 내려온 건 분명했다.
문제는 혈제에 사용되는 피는 오로지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심장에서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제례를 지내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번 일은…….”
혈교주가 문득 고개를 돌려 삼장로를 노려보았다.
“그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마저 빼앗긴 신께, 제물조차 바치지 않았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신께선 이해하셨을 것이오. 자비로우시니까.”
“사람이 그 자비를 이용하는 것이겠지요.”
“교주.”
“더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지낸 제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삼장로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는가.
삼장로가 무거운 마음을 애써 털어내며 말했다.
“사패련의 동태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오.”
혈교주의 눈가가 꿈틀했다.
“잊지 마셔야 하오. 이건 우리가 중원의 백토(白土)를 다시 밟을 유일한 기회요. 이번에 사패련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긴긴 시간 침묵해야 할 것이오.”
“사패련이 승리하지 못해서?”
“……교주?”
“사패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니, 힘이 아니라 용기가 부족했던가?”
“교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먼저 가겠습니다.”
혈교주가 획 시선을 끊으며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가슴에 들끓는 울화가 결국 한마디를 더 내뱉게 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얻는 게 승리이든 패배이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그건 무슨 말이오, 교주?”
혈교주는 대꾸 없이 다시 발을 내디뎠다.
‘늙은이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신심으로 무장했다는 자들이 재앙(災殃)에 맞설 용기가 없어 백토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그 덕에 그들의 신은 온당히 있어야 할 곳을 잃었고, 응당 받아야 할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혈제라고 해 봐야 말라비틀어진 병자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소금물을 떠먹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마저 두려워 떨어야 한단 말인가.
한때 천하를 오시했다던 혈교다. 한데 지금은 그 잔재라고 할 만한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분노가 치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어째서 삼장로가 저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어디서부터 뒤틀렸지?’
사패련과 처음 손을 잡았을 때, 교의 계획은 지금과 달랐다.
사패련은 강남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장강을 중심으로 천우맹과 대립할 터. 그렇다면 교는 사패련을 돕는 대가로 교의 영역을 얻는다.
그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쯤 교는 중원 입성이라는 기나긴 염원을 이뤄 냈을 것이다. 정과 달리 사는 그들과의 공존이 가능하니까.
‘장일소…….’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 패군 장일소가 장강을 넘어 강북으로 진격하면서부터다.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된 이는 그것을 악착같이 지키려 든다. 그게 보통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달랐다. 굶주린 아귀처럼 가진 걸 내던지고 적의 땅을 탐했다.
그 결과 ‘공존’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중원의 사도(邪道)는 씨가 마를 것이고, 교는 다시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들만으로 정도 전체를 상대할 수 없는 이상은 말이다.
원치 않았건만 어느새…… 교는 사패련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요사하게 웃는 장일소의 얼굴이 혈교주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알았으리라.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리는 없으니. 가히 교 전체가 장일소의 손에 놀아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장로들이 저토록 장일소를 경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 선택해라.
혈교주가 나직이 웃었다.
그런 장일소조차도 예상할 수 없었으리라. 이건 말 그대로 천재(天災)니까. 마른하늘에 내리치는 벼락을 미리 짐작하는 일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혈교주 역시 마찬가지. 그저 울부짖고 신음할 뿐이다.
선택이라…….
지금 바로 멸망하든가, 개가 되어 잠시 잠깐 살아남든가.
그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걸 과연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결과는 다르지 않을진대.
혈교주의 안광이 다시금 번뜩였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그리고 그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개를 자처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자리를 빼앗긴 신께 그가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심일 테니.
혈교주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물론 그럼에도 이런 처지가 달가울 리는 없다. 쌓일 대로 쌓인 분노는 어디든 표출될 곳을 찾고 만다. 신실함을 잃었다는 이유를 들어 교도 하나의 목숨을 거둔 것도, 어쩌면 그저 머리까지 치민 화를 풀 곳을 찾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교주님.”
그때, 검붉은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교도 하나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패군이 움직였나?”
장일소를 떠올린 혈교주의 눈빛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교의 운명을 바꿔 줄 수 없음이 확실해진 지금은 더더욱.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두렵다. 혈교를 지금의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장일소의 광기다. 심지어 마공을 익힌 자들에게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끝을 모를 광기.
이미 교는 그 광기에 휩쓸려 신음하고 있다.
“아닙니다.”
“그럼?”
“천우맹의 일입니다만…….”
교도가 자신이 들은 바를 빠르게 설명했다. 이를 모두 들은 혈교주의 눈빛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자인가…….”
“예.”
“공교롭군.”
혈교주가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례에 사용된 열일곱 동남동녀의 피, 거기에 교도의 피마저 묻어 있다.
“아직 허기가 여전하신가 보군.”
“……예?”
“가장 좋은 제물은 교적(敎敵)의 피다. 교를 모욕한 자의 심장은 잃은 분의 허기를 잠시나마 달래 드릴 수 있겠지.”
피에 젖은 혈교주의 손가락이 살짝 까딱였다.
“직접 나서려 하십니까?”
“여흥으론 적당할 거다.”
“하지만 패군이…….”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결국 혈교주가 움직인다면 자리를 지키라는 패군의 명을 어긴 셈이 되리란 염려일 것이다.
혈교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게 명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한 분뿐이다.”
“주제넘었습니다.”
붕대로 뒤덮인 혈교주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교는 교적을 용서하지 않는다.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반드시 심장을 뽑아낸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다. 세상에 수천만의 사람이 있으면, 그 수천만의 혈향(血香)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먹는다면 그깟 애송이 하나 못 찾을 리 없다.
그리고 이건…… 그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일과도 맞닿아 있다.
혈교주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홀로 우뚝 솟은,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이 보인다.
사패련의 련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화스러운 천막. 그 모습을 응시하던 혈교주의 입가가 살짝 꿈틀했다.
“교도들을 소집해라.”
혈교도의 눈이 커다래졌다. 교주가 직접 나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교도들이 함께 움직이면 일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못 들었나?”
“아, 아닙니다. 지금 바로 소집하겠습니다.”
교도가 빠르게 사라졌다. 혈교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바라는 것을 행하라. 네 뜻대로.
잔기침 같은 웃음이 기분 나쁘게 새어 나왔다.
바라는 것이라…….
그가 뭘 바라는지 알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지만 우스운 건 그 뜬구름 잡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혈교주가 확실히 안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고맙군.”
이리 등을 떠밀어 준다면 한바탕 칼춤을 추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곧 모두가 알게 되리라.
거짓된 평화를 누리던 이들도, 허황한 위세를 업고 날뛰는 이들도 모두 느끼게 될 것이다.
제자리를 빼앗긴 이의 분노를.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이의 존재를. 그리고…… 그 뜻을 지켜 온 이들의 깊은 원념을.
백천이라고 했던가?
“시작은…… 그 교적의 피부터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혈교주의 두 눈이 검붉은 빛을 토했다. 잃을 것 없는 이의 불길하고 음울한 광기였다.
화산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