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51
화산귀환 1751화. 나 역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니까. (1)(1752/1753)
1751화. 나 역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니까. (1)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피 묻은 손이 애처롭게 허공을 휘저었다.
“끄륵……. 끄으으으…….”
허공을 의미 없이 휘젓던 손은 가슴에 박힌 검을 더듬더듬 움켜잡았다. 질기디질긴 손바닥 피부가 갈라지며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으나, 가슴이 뚫린 마당에 손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으…….”
악에 받쳐 있던 두 눈에 이내 절망이 스쳤고, 혈교도의 육신에서 남은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스르르륵.
생명이 끊긴 육신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언제 보아도 유쾌할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혈교도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청명은 일말의 동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단순히 상대가 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처럼 생기고, 사람처럼 말한다고 해서 사람은 아니다. 청명에게 이들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격을 스스로 저버린 존재였다. 그렇다면 인간 대접을 해 줄 필요가 없고, 연민 또한 가질 필요 없다.
콰각!
가슴에 박혔던 검이 거칠게 빠져나왔다. 얼굴에 튄 피를 건성으로 훔친 청명은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흘끗 일별했다.
그의 검에 난자당한 혈교도의 시신들이 사방에 엉망진창으로 나뒹굴고 있다. 저도 모르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영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꽤 흔했다. 양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혹은 둘이서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적들을 베어 넘기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생에서는 이럴 일이 그리 흔치 않았다. 그 이유는…….
문득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뭘 노렸던 거지?’
습격이라기에는 두서가 없다.
청명이 상당한 수의 혈교도를 죽이기는 했다. 게다가 그가 없는 곳에서도 지원 온 이들이 합류하여 혈교도들을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선 피해가 발생했을 터. 어쩌면 청명의 예측을 넘어서는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들 역시 이번 소요로 피해가 상당할 것이다. 냉정히 말해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들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 자신들의 전력을 이렇게 소모할 필요가 있었을까?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기시감을 느낀 게, 단순히 이런 광경이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로군.’
깊은 노림수 따위는 없는, 그저 살육을 위한 공격이다. 대가로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몰인간성 역시 닮았다.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 어느 지점에선 닮았다. 그가 아는 이들,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들의 행태와 말이다.
청명이 산 아래를 일별했다.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 버린 혈교도들의 흔적을 눈을 좇다 이를 악물었다. 힘을 준 턱의 근육이 불거져 나왔다.
‘지나친 생각이야.’
놈들은 중원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은 중원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겠지. 어쨌든 그놈들이 진정 다시 중원을 목표로 잡았다면, 세상이 이리 평화로울 리 없다.
그렇다.
사패련이 강북을 노리고, 어쩌면 사도 천하가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조차도 청명에게는 평화롭게 느껴졌다. 적어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는 않으므로.
청명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아직은 일러.’
아직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았다.
* * *
“다시.”
혈교주의 싸늘한 눈빛에, 보고하던 교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러니까. 놈들에게 교의 이적이 토,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적이?”
“예. 사, 상처가…….”
붕대 사이로 드러난 혈교주의 두 눈이 한층 더 가느스름해졌다. 이거 보라는 듯 교도가 내민 상처를 살피는 것이었다.
자상으로 쭉 갈라진 피부가 시커먼 속살을 흉하게 드러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척 심각하게 여겼을 것이나, 사실 이는 혈충이 움직였다면 이미 깔끔하게 들러붙고도 남았을 상처에 불과했다.
“어느 놈들이냐?”
“한 놈은 화산파 놈이었습니다.”
“매화검귀?”
“아닙니다. 다른 이였습니다. 상대가 매화검귀였다면 애초에 상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혈교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듣기 좋은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명한 말이다. 정파 놈들이 듣는다면 용기가 부족하다는 둥 개소리를 늘어놓을지 모른다. 하나 이쪽은 적어도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만한 머리를 갖추고 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하나다.
“선기를 쓸 수 있는 놈이 매화검귀 말고도 더 있다는 거로군. 아니, 어쩌면…….”
혈교주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 마주했을 때는 딱히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매화검귀만 없었더라면 그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새 선기를 쓸 수 있는 이가 생겨났다고? 선기라는 게 그리 단기간 내에 배울 수 있는 것이던가?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여럿이 되는 법이지.”
“예?”
“화산이라…….”
확실히 껄끄럽다.
혈교주가 잠시 무당산을 주시했다. 새까맣게 타올랐던 산이 그새 듬성듬성 푸른빛을 내비친다. 질기디질긴 저놈들처럼.
“그래서?”
“……이대로는 피해가 커진다고 판단하여 후퇴를 명했습니다.”
“이유는?”
혈교도가 어깨를 움찔 떨며 말했다.
“함부로 교도를 낭비하지 않는다. 교주께서 제게 주셨던 명인지라…….”
혈교주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로군.”
“감사합니다.”
“다만 궁금한 건, 그게 정말 내 명을 따른 결과냐는 거지.”
“예?”
우드득.
혈교주의 손이 별안간 혈교도의 상처에 파고들었다.
“끄, 끄아아아아아아! 교주! 아아아아아악!”
상처를 벌리고 마구잡이로 헤집는 지독한 고통에 혈교도가 눈을 까뒤집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혈교주는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상처에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우드득!
잠시 후, 혈교주가 상처에서 손을 뽑아내었다. 그 손에는 가느다란 지렁이 같은 촉수 다발이 쥐여 있었다.
그가 검붉은 피로 젖은 하얀 촉수를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군.”
죽은 건 아니고, 그저 반응이 없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리지야 않겠지만.’
혈충(血蟲)은 교에서도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한 생물이다. 그저 과거부터 교를 통해 전해지던 신물일 뿐.
“좋지 않군.”
그러다 보니 그들이라고 혈충을 무한정으로 늘릴 수는 없다. 혈충을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은 교의 발아래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상황이 더 좋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다.
‘……최근 들어 혈충의 제조에 연이어 실패하고 있지.’
과정에 있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결과가 명백히 이전과 같지 않다. 이는 교의 미래에 시시각각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마당에 혈충의 이적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늘어나기까지 했다니. 더 물러날 곳 없는 절벽 끝에서 적의 칼로 위협당하는 기분이었다.
“으……. 으으…….”
혈교주는 아직도 고통에 신음하는 교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고 싶다는 욕망과 교에 대한 충심을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죄, 죄송…….”
“부상자들을 이끌고 복귀해라. 교의 축복이 지워진 이들은 따로 모아 두도록.”
“이행하겠습니다. 한데…… 교주님께서는?”
지독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교도의 눈에는 불만의 기색일랑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붕대로 가려진 혈교주의 얼굴이 잠시 꿈틀했다.
“네가 알 것 없다.”
혈교주가 냉정히 몸을 돌렸다.
만일 과거의 그였다면 여기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교세가 줄고 있는 혈교에선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그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 ‘권유’라는 미명을 쓴 명령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교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면은 세워야겠지. 놈에게도…… 저들에게도.”
이곳에 온 목적 두 가지 중 하나는 결과가 영 불만족스럽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라도 깔끔하게 해내야 한다.
핏빛이 감도는 그의 두 눈이 높이 솟은 산을 노려보았다.
“아직…… 저 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옅은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이미 한번 맡아 본 바 있는 피의 냄새가.
* * *
“우선 혈궁은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제갈과 모용으로 보입니다.”
“…….”
“본래 이런 경우에는 수색을 맡을 개방과 녹림……의 피해가 가장 크겠지만. 두 문파는 현재 무당산 수색에 동원되고 있지 않다 보니…….”
정확히는 동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지만, 이는 딱히 중요치 않다.
“하여 제갈과 모용 측의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하던 이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며 앞에 앉은 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가면 현 천우맹의 지도부에 대한 강한 불신 여론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동안 천우맹 내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문파들도 강한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을 한데 모을 구심점만 존재한다면 말이다.
차마 내뱉지 못한 이 말들을 모두 알 텐데도, 마주 앉은 이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말만이 돌아올 뿐.
“알겠다. 그만 돌아가거라.”
“자, 장문인.”
노인은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말하던 이는 결국 마지못해 미적미적 일어섰다.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미련이 남은 듯, 노인……. 허도진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 허도진인이 등진 벽 쪽에 난 작은 문을 흘끗 일별했다.
장로가 영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허도진인이 입을 뗐다.
“재촉해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장문인.”
“나는 이제 장문인이 아니다.”
“그 역시 알고는 있습니다.”
깊게 한숨을 내쉬는 무당 장로의 눈엔 미련이 흘러넘쳤다.
한때 천하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휘두를 듯 패기 넘쳤던 허도진인은 이제 모진 풍상을 지나온 노인이 되어 버렸다. 장강의 참변과 무당의 전화가 그에게서 총기를 앗아 가 버린 것이다.
그를 어떻게든 과거처럼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욕심에 불과한 것인가.
“보중하십시오.”
씁쓸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장로가 미련 남은 발길을 돌렸다.
장로가 나가고도 허도진인은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몇 잔의 차가 식고도 남을 만큼 오래도록 눈을 감은 채 정좌해 있던 허도진인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끼익.
눈앞에 있는 큰 문이 아닌, 그의 뒤쪽으로 나 있던 작은 쪽문이었다. 이 문은 작은 모옥의 뒤편, 절벽을 끼고 만들어진 작은 후원으로 향하게 나 있었다.
무당파에서도 특별한 몇몇이 아니면 출입이 금지된 심처였다.
밖으로 나선 허도진인은 절벽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무당산을 묵묵히 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아직 기척을 숨기는 데 익숙해지지 못한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모옥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도가의 처소라면 하나쯤 있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작고 평범한 제단이 있었다.
이윽고 제단이 희미한 진동을 일으키더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바위와 바위가 맞물려 긁히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밀려난 제단 아래로 잘 다듬어진 계단이 보였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올라왔다.
안색이 파리한 청년이었다.
“자네……. 음, 새삼 물어야겠는데.”
“…….”
“내가 자네를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한다면 백천이 좋은가, 아니면 진동룡이 좋은가?”
청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실 거라면, 백천이 좋습니다. 도리에 어긋난다고 해도 말입니다.”
허도진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지. 나 역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니까.”
씁쓸함이 어린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