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61
화산귀환 1761화.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1)(1762/1762)
1761화.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1)
창백하고 긴 손가락이 새하얀 바둑돌을 판 위로 옮겼다. 전장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럽고 고아한 바둑판이었다.
“흐음.”
금방이라도 착수할 듯했지만,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곤 원래 두려던 수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내 처음 놓으려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돌을 내려놓았다.
반상(盤上)을 바라보는 눈은 더없이 진지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선명하게 어려 있었다.
“별일이로구나. 네가 바둑을 다 두자고 하다니.”
장일소가 건너편에 앉은 호가명에게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호가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둑판 위의 국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곧잘 이렇게 두었었지요.”
“그래. 네가 졸라서 말이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땐 더없이 치열했지만, 동시에 더없이 무료했다. 승천하기 위해 흙탕물 속에 몸을 감추고 인내하는 용처럼, 더러운 뒷골목에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던 시절이다.
그 순간 호가명이 착수했다.
검은 바둑알을 한 점에 내려놓은 그는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쩌면 오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오기라고?”
“한때 수담(手談)……. 그러니까 바둑이 군자지락이라 하여 스승께 꽤 상세히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쓸데없기는.”
“그런데 방주……. 아니, 련주께는 이기질 못했죠. 바둑을 가르쳐 드린 게 저였는데도 말입니다.”
장일소가 가볍게 웃었다.
“쯧쯧쯧. 이리 속상해하고 마음에 담아 둘 줄 알았다면 좀 살살 할 걸 그랬구나.”
은근히 뼈가 실린 말이었다. 오죽 속상했으면 이런 상황에도 바둑을 두자고 귀찮게 하느냐는 의미다.
“답답했지요.”
하지만 호가명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속뜻을 짐작 못 할 인물이 아님에도 말이다.
“바둑은 상대와 나누는 대화이며, 동시에 자신을 보는 거울이라고 스승께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코앞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련주님 상대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타악.
장일소의 백돌이 단숨에 반상 위로 꽂혔다.
약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장일소의 수를 보며 호가명이 묵묵히 말을 이었다.
“련주님의 기풍은 너무도 자유로웠으니까요. 분명 바둑을 알려 드린 건 저인데, 저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수를 두셨지요.”
“흐음, 글쎄……. 네가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닐까?”
놀리듯 꺼낸 말에 호가명은 담담히 ‘그럴 수도 있지요.’라고 답했다. 심지어 차분히 착수를 이어 갔다.
기대와 다른 반응만 돌아오니 장일소는 흥이 식었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옛일이라도 다시 떠올리고 싶은 것이냐, 이 와중에? 아니면…… 이런 와중이니까?”
장일소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다.
사실 바둑을 청한 이가 호가명이기 때문에 어울려 주고 있을 뿐,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만큼 상황이 느긋하진 않다.
“가명아.”
“련주님께서 두실 차례입니다.”
여전히 태연하기만 한 호가명을 장일소가 잠시 응시했다.
그는 원래 무의미한 짓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긴 시간을 함께해 온 호가명 역시 그렇다. 아니, 오히려 장일소 이상으로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쓰는 건 지독한 낭비라고 여긴다.
장일소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디 어울려 보자꾸나. 이 짓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장일소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수가 오가는 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바둑돌이 놓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꽤 긴 시간 공고하던 침묵을 깬 건 의외로 호가명 쪽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뭐가 말이지?”
“보려 애쓸 때는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었지요. 대화하려 해도 무엇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수담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적당히 시간 때울 소일거리가 필요한, 점잖으신 분들의 변명쯤으로 여겼지요.”
“…….”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꼭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말이 많아졌구나. 나를 상대하는 중에 말이지.”
타악.
장일소의 돌이 호가명의 진영 한가운데에 놓였다.
검은 바둑돌에 둘러싸인 새하얀 백돌. 실로 무모하게만 보이는 수였다.
하지만 호가명의 표정은 오히려 차게 굳었다.
이것이 호가명의 대마(大馬)를 모조리 저승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 한 수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떠냐.”
호가명은 말없이 신중하게 방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일소가 수를 둘수록 호가명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호가명의 영역 한가운데에 장일소의 진영이 만들어졌고, 백돌을 둘러싼 흑돌이 모조리 죽어 나갈 처지에 몰린 것이다.
장일소가 희미한 비음을 흘렸다.
“이런, 이런……. 상황이 곤란해 보이는데, 몇 수 물러 주랴?”
반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호가명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장일소와 시선을 마주했다.
“련주께선 어떠십니까?”
“……음? 무엇이?”
“지금 제 생각이 보이십니까?”
“흐음.”
장일소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호가명을 살폈다. 호가명은 고개를 저었다.
“안 보이시겠지요.”
“…….”
“과거에는 련주님을 마주할 때마다 벌거벗겨진 기분이었습니다. 굳이 속을 드러내지 않아도 련주님께서는 제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장일소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더냐?”
“과거의 련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범인(凡人)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태연하게 하셨죠. 전장에서든, 반상 위에서든.”
타악.
호가명이 무심한 손길로 착점했다. 장일소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굳어 있던 얼굴에 언짢은 듯한 미소가 스쳤고, 이내 섬뜩하게 변해 갔다.
“이건…….”
어느새 반상의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장일소가 호가명의 대마를 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 대마와 관련 없는 곳에 커다란 집이 생겨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나 보겠다고 미꾸라지처럼 내외에서 발버둥 치던 돌들이 어느새 튼튼한 세력을 쌓아 올린 것이다.
이래서는 대마를 잡는다고 한들 장일소가 이길 순 없다.
‘미끼?’
저 대마를 미끼로 썼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 장일소가 당혹감을 넘어 노기까지 보이는 까닭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다.
“가명아…….”
“기억하십니까?”
호가명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담담히 제 할 말만 했다.
“이건…… 우리가 과거에 이미 한 번 두었던 바둑입니다. 다만 그때는 서로 입장이 반대였지요.”
“…….”
기억이 난다.
대마를 던져 주고 외부에 세력을 쌓는 수를 두었던 건, 다름 아닌 장일소 자신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장일소는 과거에 자신이 두었던 수에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 저는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마를 적에게 미끼로 내주고 새로운 영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건, 적어도 제가 아는 바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행마였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놀란 까닭은, 바둑의 정석이 그러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껏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대마를 미끼로 내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겠지요.”
호가명의 눈빛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련주님은 그런 수를 아무렇지 않게 두는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무엇이라도 쓸 수 있다면 쓰고, 버려야 한다면 버리는 이.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팔도 태연히 직접 뜯어낼 사람.”
“…….”
“하지만 지금의 련주님은 손에 쥔 것을 쉽사리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과거의 자신이 두었던 수에 그대로 당하시는 겁니다.”
“가명아.”
“즐기고 계십니까, 련주님?”
“…….”
“그 시절의 련주님에게는 모든 게 그저 유희에 지나지 않았지요. 무언가를 손에 넣는 일도, 잃는 일도, 심지어는 련주님의 운명마저도.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즐거우십니까?”
“그쯤 하렴.”
“아니면 이제 슬슬 무거워지셨습니까? 한 번의 실패가 모든 걸 앗아 갈지도 모른다 싶으니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정도를 넘는구나. 아무리 너라도…….”
“궁금합니다. 귀주의 뒷골목을 누비던 련주님의 눈에 지금의 련주님이 사람으로 보일지, 아니면 그저…….”
콰앙!
둘 사이에 놓여 있던 바둑판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촤르르륵.
허공에 떴던 바둑알이 바닥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장일소는 바둑판을 쳐 버렸던 우수를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드리웠다.
“사람이 아니라…… 배가 처불러 버린 돼지 새끼 정도로 보일 거다, 이런 말이냐?”
호가명은 가타부타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바둑알을 묵묵히 줍기 시작했다.
“호가명.”
“놈들은 저 무당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 진을 친 이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련주께서 출진을 망설이시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장일소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서?”
“인내와 실기는 다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저들을 끌어내야 합니다.”
“끌어내야 한다고…….”
장일소가 손끝으로 무릎을 톡톡 느리게 두드렸다.
“저는 련주님의 미학에 대해 구태여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전쟁에 무지렁이들이 낄 이유가 없다고 여기시는 것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호가명이 단호하게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전쟁에서는 미학도 가치관도 다 쓸데없다, 그리 말씀하셨던 분이 련주님 아니십니까.”
장일소의 색 옅은 두 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치솟는 살기가 금방이라도 칼날처럼 호가명의 목을 베어 버릴 듯했다.
하지만 호가명은 여전히 태연했다. 제 목숨 따위는 조금도 중요치 않다는 듯.
“명을 내려 주십시오. 양민들의 목을 베어 저들을 끌어내겠습니다. 명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면, 방을 통솔할 권한이라도 제게 주십시오. 그럼…….”
나직하고 진중하며, 또 동시에 강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중원을 련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장일소는 침묵했다.
“련주님.”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
“내 앞에서 그따위로 지껄일 수 있는 건 너뿐일 거다.”
호가명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장일소가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길게 한숨 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보려무나. 대신 장담한 만큼 성과를 내야 한다. 알겠니?”
“목숨을 바쳐서.”
호가명이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이윽고 지체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장일소가 문득 시선을 내렸다. 호가명이 미처 다 줍지 못한 바둑알들이 보였다.
장일소가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니다. 당연히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계획이 과연 지금 호가명이 꺼낸 계책보다 더 나은가?
더 쉽게 적들을 혼란에 빠트릴 방법이, 세 살 아이도 뻔히 알 만한 방법이 있음에도 왜 나는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는가?
정말 호가명이 말한 미학 때문인가? 모르는 새 어쭙잖은 원칙이 발목을 잡고 있었나?
아니면…….
정말 호가명의 말대로, 두렵기라도 했나? 이 모든 일의 끝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스르륵.
장일소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다 멈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긴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로 흘러내렸다.
“유희라…….”
평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던, 메마른 웃음이 허망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과거와 달라졌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가명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저 예전처럼 모든 것을 농락하며 즐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장일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점차 어두워지다 못해 늘 번뜩이던 요사스러움마저 사라졌고, 메말라 버린 두 눈엔 아주 짙은 무언가가 천천히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