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65
화산귀환 1765화(1766/1797)
화산귀환
1765화.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5)
“사, 살려…….”
푸욱.
비정한 검이 여인의 가슴을 꿰뚫는다. 두 눈을 부릅뜬 여인이 제 몸에 박힌 검을 더듬더듬 부여잡았다.
스륵.
실로 무력한 저항이었다. 이내 숨이 끊긴 여인은 허물어지듯 쓰러져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호가명의 두 눈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확실히 유쾌한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을 통해 느끼는 불쾌감은 단순히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의 목숨을 강제로 끊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빼앗긴 이가, 마지막 순간에조차 두 눈에 원망의 빛이라고는 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망이라…….’
아마 감히 품지 못했겠지. 무력함이란 그런 거니까.
호가명은 물끄러미 앞을 응시했다.
마을이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불타고 있다. 생존자 따윈 없다. 작은 마을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수백에 가까운 이들이 고작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그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로 만들어 낸 결과를 침묵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호가명이 느릿하게 턱짓했다.
“불을 좀 더 세게 지펴라.”
“예!”
“다음 마을은 어디지?”
“여기로부터 오 리 앞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개의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을까?
그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불태운 마을만 해도 두 곳이다. 아마 지금쯤 열 개 넘는 마을이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목숨 역시.
호가명이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황망할 정도군.’
이토록 난리를 피우는 동안에도 적들은 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 리 남짓 떨어져 있다는 마을에도 제때 오지 못할지 모른다.
혈궁의 습격으로 인해 움츠러들었다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안일한 대처다.
설마 사패련이 양민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되면 너무 깊게 들어가게 되는데.”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적당히 시늉하고 빠질 게 아닌 이상, 저들이 늦는 만큼 적진과 가까운 곳으로 더 전진해야 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해 보았다. 위험 부담이야 늘어나겠지만 그만큼 적들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겠지.
“불을 지핀 후 바로 움직인다.”
“예, 군사.”
“쾌속하게 진격해서 더 많은 마을을 무너뜨려라. 다른 방향을 공략하는 이들에게도 전령을 보내 전해라. 단, 직접적인 교전은 반드시 피한다.”
“예!”
일렁이며 마을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호가명의 눈을 사로잡았다.
‘굳이 칼을 들이밀 필요도 없어.’
이 광경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저놈들은 더 이상 산에 틀어박혀 있지 못할 것이다. 불타는 마을과 쌓인 시체들은 저들의 안일함이 만든 지옥도가 되어 줄 테니.
호가명은 저들에게 선의가 있음은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저들에게 정의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정의란 존재해야 할 곳에 존재할 때만 가치를 지닌다. 필요한 곳, 필요한 때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는 저열한 악의보다 오히려 더 가혹한 법이다.
그래. 필요한 때에…….
호가명은 문득 궁금해졌다.
무엇이라도 절실히 필요했던 그때, 그의 곁에 정말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정의라도 존재했었다면…… 이후의 선택과 그로 말미암은 삶이 달라졌을까?
“군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가명이 무당산 쪽을 일별했다.
“의미 없는 생각이로군.”
“예?”
“아니다. 이동한다.”
어쩐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련주님을 탓할 일이 아니로군.’
흔들리고 있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군사, 저기……!”
“음?”
순간 호가명의 두 눈이 빛났다.
저 멀리 무당의 산자락 한 면에서 어떤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의 높은 안력으로도 그저 흐릿한 일렁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멀지만, 무당산이 불에 타 허허벌판인 덕에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저곳에서 무언가 이동하고 있다.
“빨리도 오는군.”
“어찌합니까, 군사?”
“명은 철회하지 않는다.”
호가명이 서늘한 얼굴로 일갈했다.
“죄업은 쌓일수록 힘을 발하지. 더 많은 시체로 놈들의 죄책감에 불을 질러라.”
“예!”
차가운 조소가 호가명의 얼굴에 어렸다.
‘미약한 정의라…….’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힘없는 정의는 더는 정의가 아닐 테니.
* * *
카앙!
검과 검이 충돌한다.
이윽고 한쪽 검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검을 쥔 이의 육신이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하지만 상대를 날려 버리고도 살기는 그치지 않았다.
강한 내력을 실은 검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의 몸뚱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앗!
그러자 땅을 뒹굴던 이가 단번에 검을 뻗었다.
카각!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또다시 얽히는 순간, 강하게 내리꽂혀 오던 검의 방향이 뒤틀리며 애꿎은 땅을 내려쳤다.
“이런, 빌어먹을!”
퍼어어억!
헛손질에 분노한 사패련도가 흙투성이 사내, 백천의 배에 발길질했다. 이번엔 어찌하지 못하고 얻어맞은 백천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맥없이 추락했다.
쿵!
“컥!”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며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죽어라, 이 병신 놈!”
또 다른 사패련도의 기다란 창이 섬뜩한 파공음을 내며 백천의 가슴팍 쪽으로 날아들었다.
목구멍에서 울컥 솟구치는 피를 삼킨 백천이 이를 악물며 날아드는 창을 향해 되레 몸을 내밀었다.
파앗.
그의 몸이 틀어지며 전사경을 담은 왼쪽 어깨가 창끝을 향해 쏘아졌다. 날카로운 창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낸 어깨가 길지 않은 창날을 정확하게 들이받아 옆으로 밀어 낸다.
투웅!
동시에 백천이 몸을 빙글 회전시켜 사패련도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수작질을!”
이를 예상하고 있던 사패련도는 뻗은 창을 빠르게 끌어당기며 창대로 가슴을 방어했다. 하지만 백천의 육신이 한 바퀴 더 회전했다. 이윽고 새파란 검기를 머금은 검이 사패련도의 목을 향해 반원을 그리며 획 내그어졌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창수가 기겁하며 창대를 바짝 추어올렸다.
캉!
용케 늦지 않고 공격을 가로막았다. 이 괴이막측한 검로는 분명 위협적이나, 위력 자체가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막아 낼 수만 있다면 위험하지 않았다.
창수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흘린 순간이었다. 창에 닿았던 검이 마치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창대를 타고 흘렀다.
서걱!
창대를 쥔 손가락이 잘리며 허공으로 솟았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창수가 비명을 터트렸다.
“아악!”
백천이 적의 창을 팔로 휘감아 그대로 창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얽혀들었다.
“놔라, 이 망할!”
퍼억!
한 손으로나마 휘두른 창대가 백천의 얼굴을 직격했다.
콰득!
하지만 백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역수로 돌려 잡고는, 그 즉시 창수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허파를 찔린 창수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경련하다 축 늘어졌다.
“저…….”
투두둑.
창대에 맞아 터진 백천의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그는 늘어진 창수를 떼어 내며 곧장 다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후들거리면서도 기어이 검을 들어 올렸다.
“……지독한 놈.”
백천을 걷어찼던 사내는 다소 질린 표정으로 이를 보았다.
원래도 멀쩡하지 않은 꼴이었지만, 지금은 만신창이에 가깝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옷은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전투 중 곳곳을 베였고,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저놈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저놈은 그저 부상에 그쳤지만, 이미 주위에 널린 시신이 넷에 달했다.
사패련도는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넷이나……?’
놈은 분명 강하지 않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약해 빠졌다. 그런데 왜 숨통을 끊을 수 없는가? 왜 되레 이쪽이 당하고 있는가?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고 둘로 쪼개 버릴 수 있어야 정상이다. 하나 이상할 정도로 저자의 피륙을 베는 데서만 그쳤다.
“허억! 허억! 허억!”
한편 백천의 입에선 거친 숨이 연신 쏟아져 나왔다.
‘턱이 열렸어.’
호흡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다. 이는 육신이 한계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다.
‘고작 이 정도로…….’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받을 만큼 형편없이 약해졌다.
그러나 아직은 싸울 수 있다. 그의 숨이 붙어 있고, 몸도 움직이니까.
앞에 서 있는 자들 너머의 뒤쪽을 흘끗 넘겨다보았다. 마을을 뒤로하고 달아나는 양민들이 보였다.
고작 몇 명이다. 애초에 백천이 잡아 놓을 수 있는 인원이라고 해 봐야 열도 채 되지 않으니, 겨우 그만한 인원이 빠진 것만으로 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구해 낼 순 없었다.
고작 몇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을 만든 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가치 없다 할 수 있을까?
“뭐 하는 거야! 당장 죽여 버려!”
“……그럼 네가 하든가.”
“이 겁쟁이 같은 놈이…….”
“뭐?”
사패련도들이 슬슬 자기들끼리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대가 약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쉽사리 달려들지 못한다. 이미 쓰러져 있는 시신 몇 구와 저 작자가 사용하는 기이한 검술이 꺼림칙해서다.
더 강한 자를 상대로 느끼는 두려움과는 다르다. 세상 누구도 개죽음을 선호하진 않는다. 저런 자에게 죽는 것이야말로 개죽음이 아닐까?
“빌어먹을! 그냥 한 번에 달려들어!”
참다못한 누군가가 외친 말에 모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저자의 손에 죽어 간 이가 있는 마당에 자존심을 세우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는 안다. 그러나 아무리 사파라도 몸이 성치 않은 놈을 상대로 합공까지 해야 한단 사실이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제길!”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합공이 가장 안전하게 여겨졌는지, 백천을 지켜보던 이들이 병기를 고쳐잡고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백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원은 아직 없군.’
그리고 사실 있다고 해도 저들의 공격이 지원보다 빠를 건 자명하다. 지금의 백천은 저들의 합공을 당해 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했다.
백천은 생각을 지웠다. 생각해 봐야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저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울 뿐이다.
“죽여!”
사패련도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어 왔다.
‘적의 힘을…… 이용해서.’
카강!
가장 먼저 날아드는 도를 흘렸다. 하나 그 힘을 채 이용하기도 전에 묵직한 장력이 가슴 쪽에 날아들었다.
“큭!”
무릎을 쳐올려 가까스로 장력을 막아 냈지만, 동시에 날아든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이어 아직 회수하지 못한 백천의 검으로 순식간에 십여 권이 박혀 들었다.
카가가강!
우드득!
기껏 고정해 놓은 장치가 부러지며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쏟아진 장력이 백천의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콰앙!
백천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붕 날았고, 힘없이 땅에 처박혔다.
“우웨에엑!”
시커먼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는 백천을 보며 사패련도들이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이리 간단한 걸 말이야.”
진즉에 자존심을 버렸으면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되었을 테다. 저마다 이를 갈며 백천을 향해 다가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천의 표정이 서서히 느슨해졌다.
‘끝인가…….’
근성도 최소한의 여력이 있어야 발휘할 수 있다. 이미 부상을 입었고, 검도 잃었다. 더는 저항할 힘이 남지 않았다.
“……죽여라, 개자식들아.”
“이 망할 새끼. 오냐, 소원대로 해 주마!”
사패련도가 도기를 뿜으며 단번에 백천에게로 쇄도했다. 백천은 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향해 떨어져 오는 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도 굴하지 않는 것. 이게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서걱!
이내 날카로운 날붙이가 육신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백천의 얼굴을 타고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듯 크게 흔들렸다.
툭.
얼굴을 적신 피는 백천의 것이 아니었다. 머리 잃은 사패련도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거였다.
“뭐…….”
털썩. 털썩.
백천의 앞에 서 있던 이들의 목이 연이어 굴러떨어졌다. 목을 잃은 시신들이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당황하여 멍하니 바라만 보던 백천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어느새 누군가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백천의 두 눈에 깊은 의문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