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70
화산귀환 1770화(1771/1797)
화산귀환
1770화.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5)
검을 든 이와 검을 들지 않은 이.
위협하는 이와 위협받는 이.
얼음장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된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섬뜩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눈빛으로 백천을 노려보던 장년인이 일순 백천의 목에 댄 검을 회수한다.
“…….”
백천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목을 매만졌다. 뜨겁고 끈적한 핏물이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영문도 모른 채 위협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상황.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대에 대한 적대감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이들이 그를 구해 준 은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백천은 느끼고 있었다. 그게 이유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무슨 의미입니까?”
동시에 백천은 강한 의무감을 느꼈다. 지금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말이다.
“제가 화산의 장문대리였다면,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
장년인이 말없이 백천을 가만히 바라본다.
한참 동안 백천을 주시하던 장년인이 이내 피식하고 웃어 버린다.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 거꾸로 질문을 다 하고 말이지.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화산이란 문파의 장문대리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백천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겁이 없을 뿐이죠. 저는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요.”
“잃을 게 없다라…….”
장년인의 입에서 쿡쿡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옅은 조소. 아니, 노골적인 비웃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장년인이 백천을 그리 기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증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저 적의를 감출 생각이 없는 눈빛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천은 위축되는 대신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질문에 답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지.”
“…….”
옳은 말이다. 장년인이 백천에게 먼저 물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하지만 백천은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 장년인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얼핏 스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백천은 이미 한 대답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쿡쿡쿡.”
그 대답을 들은 장년인이 또다시 낮게 웃어 대기 시작했다.
짙은 허무함이 밴 웃음. 그러나 백천은 그 웃음 속에 작은 원망과 노기가 담겨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게도 노할 일인가? 백천이 장년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겠지…….”
장년인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한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천막의 천장.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장년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 리가 없지. 알아야 할 이유조차 없겠지.”
장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백천을 마주본다.
“보았는가?”
“……무엇을?”
“밖에 있는 이들 말일세.”
“…….”
“어떻게 생각하나?”
백천의 미간이 좁아진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회피해야 할 질문도 아니었다.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
“아무런 의욕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하하하하핫.”
장년인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웃음, 웃을 이유가 없는 이가 억지로 내보이려 웃는 듯 탁하기만 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웃음이 왠지 백천의 가슴을 가시처럼 찔러 댔다.
“잘 보았군. 정말 잘 보았어.”
“…….”
“정확한 표현이지. 저들은 이미 죽은 이들이니까.”
“……예?”
“말 그대로의 표현이다. 저들은……. 그래, 저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지. 죽었으되 죽지 못한, 이미 죽었어야 했지만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 그렇기에 이 세상의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죽음을 바라는.”
대화를 계속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더없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사파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또한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백천은 이 순간 그 사실을 확신했다.
이미 이들에게서 사기(邪氣)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확인한 바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표출되는 기운이란 저들이 익힌 심법과 내력의 기질이 결정하는 법. 장일소쯤 되는 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공을 익힌 사파인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기운을 만들어 내고, 외양을 만들어 낼 수는 있어도 자연히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백천의 뇌리에 남아 있던 기억 중 하나가 되살아났다.
“……혹시, 당신들이 제갈과 모용을 가로막았던 그들입니까?”
“…….”
장년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간다.
“설마 당신들이 호북에서 소림과 팽가를 지옥으로 몰고 갔던 바로 그들입니까?”
“제갈과 모용이라…….”
장년인의 고개가 선선히 끄덕여졌다.
“그랬었지.”
“어째서!”
백천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어째서 저들의 편을 든 겁니까! 그 호북의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흘렀는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백천도 잘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어쩌면 백천은 마음속으로 판단을 내려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사파의 편을 들 만큼 악한 이들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격해진다. 그렇기에 원망한다.
“도대체 왜!”
백천의 눈빛이 격렬히 뒤흔들렸다.
하지만 들끓는 용암 같은 백천과는 달리, 장년인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담담한 얼굴로 한참을 침묵하던 장년인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조금 전.”
“…….”
“더는 잃을 게 없다고 했던가?”
뜬금없는 말. 하지만 백천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지만, 잃을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백천의 대답을 들은 장년인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피어났다.
비웃는 것 같기도,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러나 그런 말들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 역시 그리 생각했었으니까.”
“…….”
“하지만 말일세…….”
장년인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내려앉는다.
“세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잔인한 법일세.”
장년인이 이를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어떤가? 지금 내가 자네의 사형제들. 아니, 사형제였던 이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한다면. 자넨 어찌할 텐가?”
백천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가 더는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서?”
“아니요.”
백천이 그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부당한 것을 따르는 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네의 사형제들이 죽을 텐데?”
“검을 잡는 순간부터 각오했어야 할 일입니다. 목숨은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의가 목숨보다 중요하다?”
“대의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히 여겨야 할 게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렇군.”
장년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호의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 마음은 끝내 바뀌지 않을 건가?”
“당연합니다.”
“그게 사형제가 아닌 스승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게 스승이 아닌 가족일지라도?”
“물론입니다.”
백천의 대답에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스승도, 그의 가족도 오히려 자신 때문에 백천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걸 수치스러워할 이들이니까.
그런 결과를 눈으로 보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고민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이유는?”
“그들 모두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으니까.”
“…….”
“제가 아는 이가 한 말입니다. 검을 잡은 이는 언제고 자신이 그 검에 베여 죽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 각오가 없는 이는 검을 잡아서는 안 된다.”
장년인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 죽음이 아무리 억울한 것일지언정, 스스로 한 선택이다?”
백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틀린 말이라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악을 행하지는 않을 겁니다.”
장년인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자신이 낸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 보인 제자를 바라보는 듯한 자애로운 눈빛. 한데 그 눈빛을 본 백천은 이상하게도 싸늘한 섬찟함을 느꼈다.
“좋은 대답이로군. 훌륭한 논리야.”
“…….”
“하지만 그렇기에 물을 수 있겠군.”
“무엇을…….”
“그렇다면 스스로 검을 들지 않은 이들은 어떤가?”
“……예?”
“묻겠네. 아직 제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예를 들면 자네의 어린 제자가 같은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면 어찌할 텐가?”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에게는 제자가 없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 그 얼굴에 앳된 기색이 가시지도 않은 어린아이들의 목이 악적들의 검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잘려 가고 있다면.”
“…….”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비명. 그리고 원망과 공포를 보면서 너희 역시 칼을 든 이들이니 받아들이라 호통이라도 칠 텐가?”
백천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대체…….”
“대답해라.”
“…….”
“대답해!”
“…….”
장년인의 두 눈에 터질 듯한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디 지껄여 봐라.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이미 죽어 간 이들의 시신 위에서,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목숨을 걸고 나를 비웃어 오는 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지!”
“저는…….”
선택한 자는 그 의무를 져야 한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이들은? 그들도 같은 의무를 져야 하는 건가?
“대답해라, 백천. 화산의 장문대리여.”
“…….”
“너희가 외면해서 만든 지옥에서. 너희가 고개 돌려 버린 나락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옳음이 무엇이었을지. 대답해 봐라! 그 뚫린 입으로 지껄여 보란 말이다!”
백천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들이 외면해 만든 지옥? 그들이 고개 돌려 버린 나락?
“설마…….”
백천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사파 같지 않았던 이들. 하지만 그렇다면 그 강대함을 설명할 수 없었던 이들.
죽어야 했으되 죽지 못한 이들.
그 모든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존재들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죄악이자, 청명이 느끼는 고통의 근원.
“다, 당신은…….”
장년인이 서슬 퍼런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나는 진송원.”
“…….”
장년인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에서 피처럼 붉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너희가 버린 점창의 장문이었던 이다.”
발밑이 꺼지고 육신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
백천은 자신의 죄악과 마주했다.
외면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