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79
화산귀환 1779화(1780/1797)
화산귀환
1779화. 그럼 어디 확인해 보지. (4)
청명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런 순간이 아니었다면 갑자기 나타난 이 청년을 환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천연덕스럽게 어깨동무하고 ‘혹시 술은 한잔할 줄 아냐?’ 물으며 웃어 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청명에겐 불청객의 방문을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후회?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청명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지금은 네 장단에 맞춰 줄 시간이 없어.”
듣는 이의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한 문파의 수장이자, 서장 전체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를 대하는 태도로는 부적절했다. 자칫 큰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도 남을 상황.
그러나 달뢰라마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시간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달뢰라마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속에 청명이 담겼다.
“시주에게는 말입니다.”
청명의 눈가가 희미하게 꿈틀했다. 딱히 이상한 말도 아닌데, 희한하리만치 신경에 거슬렸다.
“하……. 빌어먹을.”
청명이 크게 한숨 쉬며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여긴 전장이다, 망할 자식아. 네 잘난 불법이 통할 만한 곳이 아니야.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선문답이나 하고 있을…….”
“흐흠.”
그 순간, 나직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의 시선이 느리게 돌아갔다. 달뢰라마가 아닌 또 다른 라마승에게로.
눈썹이 희끗희끗한, 편안한 인상의 노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외다, 도장.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반선라마.”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심기를 불편케 해 드렸다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반선라마가 깊이 합장했다.
청명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마주 보며 작게 예를 표했다.
무언가 비어 있는 듯 보여서 도무지 마음이 가질 않는 달뢰라마와 달리, 반선라마는 청명으로서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반선라마가 진중한 눈길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도장. 저희 역시 용건 없이 먼 서장에서부터 이곳까지 찾아온 건 아니외다.”
“…….”
“스승께서 도장께 꼭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하십니다. 신분과 입장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객의 노고를 살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됩니다.”
순간, 청명의 시선이 달뢰라마에게로……. 정확히는 그의 발로 향했다. 얼핏 보아도 부르트고 갈라져서 엉망이었다. 얼마나 큰 고행 끝에 이곳에 당도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듯했다.
일반인이라면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만신창이가 된 발과,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눈빛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천하의 청명도 이쯤 되니 외면하기 어려웠다.
“……알 수가 없군.”
그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대로 대접할 상황이 아님은 알아 두십시오.”
“물론입니다.”
청명이 달뢰라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한번 들어나 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왜 이리 부산스럽습니까?”
상황이 상황이니, 맹이 부산스러운 거야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째 궤가 다소 달라 보였다.
바쁘다기보다는 모두 적잖이 당황한 모습에 가까웠다.
“거, 사패련 놈들이 이 꼴 보면 좋아 죽겠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일단은 침착해야……. 뭐, 뭐야? 당가주님?”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잔소리하던 조걸이 입을 쩍 벌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이리저리 뛰는 사람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양반은 머리에 당장 벼락이 떨어져도 저렇게 호들갑 떨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왜?
“뭔 일 있대요?”
“달뢰라마가 왔단다.”
“누가 왔다고요?”
“달뢰라마.”
“그게 누굽니까?”
윤종이 아찔하다는 듯 제 얼굴을 감쌌다. 이윽고 이를 악물며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서장 포달랍궁의 궁주. 전에 북해 갔다 오는 길에 봤잖아?”
“아, 그때 그 꼬맹이요? 걔가 왜 왔답니까?”
윤종은 조걸의 주둥이를 지금이라도 꿰매 버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조걸이 손뼉을 짝 쳤다.
“아아! 맞다. 사형, 그때 걔가 포달랍궁 궁주라고 했었습니다.”
“……얘기했잖아. 내가, 방금.”
제발 사람 말 좀 들어라.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잖아…….
“어? 그럼……?”
“응?”
“포달랍궁이 천우맹에 합류하는 겁니까?”
윤종이 아연실색했다.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그게 아니면 한창 전쟁 중인 여기에 굳이 뭐 하러 왔겠습니까? 보아하니 그 양반들도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던데, 사파 무찌르는 데 손 보태겠다고 온 거 아니래요?”
조걸이 크으,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포달랍궁도 새외오궁 중 하나잖아요!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마당이었는데, 이게 웬 떡이냐! 와,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고.”
“둘이 왔단다.”
“어…….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하긴 한데.”
진짜 고양이 손일 줄은 몰랐네. 조걸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럼 지원하러 오진 않았다는 건데.’
만일 두 사람이 천하에 이름 높은 고수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우맹을 지원할 요량이라면 달랑 둘이서만 오지는 않았을 터다.
하물며 그렇게 온 인물이 달뢰라마라면 더욱 그렇다. 포달랍궁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직 영글지도 않은 꼬마 녀석을 피 튀는 전장에 덜렁 던져 놓겠는가?
포달랍궁 내에서 찬탈을 위한 움직임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된다.
“그럼 대체 왜 온 거죠?”
“난들 알겠느냐? 다들 그걸 몰라 이 난리인 건데.”
“아아.”
조걸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외오궁의 수장쯤 되는 이가 이렇게 갑자기 방문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천하의 당군악도 혼백이 달아날 만했다.
섬서에 있는 황종의가 듣는다면 게거품을 물고 ‘나는 전서를 보냈다고’며 억울해하겠지만, 그 전서가 천면수사의 습격으로 인한 혼란 통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불행이었다.
“그래서 달뢰라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청명이 놈이랑 있단다.”
“예? 왜요?”
“……자꾸 나한테 물어봐도 모른다니까.”
조걸이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아니, 그래도 일단은 맹주님을 뵙는 게 우선 아닙니까.”
물론 청명도 천우맹의 총사를 맡고 있으니 영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청명이 놈을 만나러 왔나?”
“서장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놈 하나를 만나겠다고 여길 오겠느냐?”
“그렇죠?”
조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끄응. 그럼 뭐지?”
“그 이유가 맞을지도 몰라요.”
별안간 끼어든 목소리에, 조걸이 옆에 있던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응? 무슨 말이야?”
“청명 사형을 만나러 온 걸지도 모른다고요.”
“……왜?”
“그게…….”
당소소가 말꼬리를 흐렸다.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전 그녀는 보았다. 어린 승려 하나와 나이 든 승려, 그리고 청명까지 세 사람이 구석의 작은 천막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단순한 접객이라기에는…….’
그녀가 본 청명의 표정이 너무 어둡고 무거웠다.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그녀는 말없이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 있는 작은 천막이 어쩐지 외딴 섬처럼 느껴졌다.
“미안하군. 여긴 술 말고는 없어서 말이야. 원한다면 차를 얻어다 주지.”
“…….”
“대신 나는 차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알아서 우려 마셔야 할 거야.”
잔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술병을 빤히 보던 반선라마가 두리번거리며 천막 내부를 살폈다.
세 사람이 앉기에도 좁게 느껴질 만큼 작은 천막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누일 침구 하나만 바닥에 덜렁 놓여 있을 뿐.
그 외에 보이는 거라고는 아무렇게나 널린 술병과, 아직 비워지지 않은 술병뿐이었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천막 한구석에 청명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더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은 등을 켰다. 검은 연기가 잠깐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빛이 쏟아지고, 청명의 몸 절반가량이 짙고 긴 음영으로 물들었다.
반선라마는 다소 괴이한 감상을 느꼈다.
삭막하고 초췌한 모습이건만, 어쩐지 저 사람에게 꽤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저게 본모습일지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한쪽 어깨에 검을 걸친 채로 낡은 천막 구석에 기대앉은, 지쳐 버린 검수의 모습이.
낡아 버린 건 천막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그새…….’
반선라마는 몇 해 전 보았던 청명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그에게선 반짝이는 생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활력이 넘쳤고, 무언가에 대한 열의로 자신을 달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는 과연 그때와 같은 인물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될 만큼 빛바래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을 걷는다고 여기긴 했지만, 설마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리도 달라질 줄이야.
반선라마의 상념을 깨며 청명이 입을 열었다.
“뭐…… 딱히 차가 필요 없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
“할 말이 있다며. 해 봐.”
줄곧 청명만을 응시하던 달뢰라마는 조금 더 정적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내 가사 자락을 작게 펄럭이며 움직였다.
탁.
그가 청명이 내놓은 술병을 쥐더니 느릿하게 입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 놀란 듯 보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중이 술이라니……. 포달랍궁도 다된 모양이로군.”
술을 작게 한 모금 마신 달뢰라마가 작게 미소 지었다.
“분명 불자에게 술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달뢰라마가 가만히 청명을 보며 말했다.
“자비로 내어 준 것을 두고 빌어먹는 이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만큼 오만한 것도 없지요.”
“…….”
“그렇기에 먹습니다, 그게 무엇일지라도. 그렇기에 마십니다, 그게 어떤 것일지언정.”
탁발(托鉢). 저들의 교리다. 청명이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좋은 변명이네. 얻어먹는다는 구실로 금기는 다 어길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뭐?”
“금(禁)한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것. 권(勸)한다는 것은 원한다는 것. 하지만 그러합니다. 누구도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없고,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금기를 어기고, 손에 닿지 않는 것을 바라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해의 바다에서 죄악을 삼키며 살아갑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설법은 적당히 해. 듣고자 하는 이가 없으니까.”
“설법이 아닙니다.”
달뢰라마의 시선은 여전했다. 무엇도 담기지 않고, 모든 것이 담긴 듯했다. 그 눈을 보자면 저절로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저 삶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나에 대해?”
“예, 시주. 당신입니다.”
달뢰라마의 앳된 목소리가 작지만 선명하게 청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당신의 살아감은 어떻습니까?”
“…….”
호수처럼 깊은 이와 들불처럼 들끓는 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내가 금기를 어기고, 닿지 않는 것을 바란다는 건가?”
“모두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럼 딱히 특별하지도 않겠군.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그럴 테니.”
“시주의 말이 옳습니다. 당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뢰라마가 담담히 말했다.
“한 번의 생을 살아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하던 청명이 움찔했다. 이윽고 두 눈을 경악으로 크게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