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88
화산귀환 1788화(1789/1797)
화산귀환
1788화. 사패련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3)
힘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힘은 무언가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자,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수단, 동시에 나약한 존재를 난도질할 칼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힘을 원한다. 그 형태가 어떠하든 자신에게 걸맞은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삶을 바친다.
그리고 당군악은 이 순간 실감했다.
힘의 여러 형태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무엇보다 수(數)라는 사실을.
눈앞의 모든 게 검게 변해 가는 듯했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혼탁하게 뒤덮인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온 당군악에게도 이루 말로 표현할 길 없는 광경이었다.
아마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이들 역시 함께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압도되어 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분위기를 깨워 주고 정신을 다잡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당군악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떠한 말을 짜낸다고 해도 이 광경을 무마할 수 없으리란 걸 알기에.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으…….”
“으으음.”
앓는 듯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현재 강호를 짊어진 거물이건만, 그들이 저마다 탄식만 흘리고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당군악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암기를 사용하는 자는 언제 어디서고 손끝을 떨어선 안 된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웠고, 수없이 다짐해 왔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밀려오는 물결이 금방이라도 이곳을 뒤덮을 것만 같다는 공포에 저항하다 보니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그때,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 까마득한 인파 가운데서도 유독 선명한 무언가. 마치 혼탁한 연못 중앙에 떨어진 붉은 핏방울 같았다.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장일소.’
괴이한 일이다.
당군악이 장일소를 마주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흔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으나, 적잖이 마주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장일소는 너무도 다르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과거 당군악이 만인방으로 찾아가 대면했던 그때의 장일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인 듯 느껴졌다.
그사이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당주. 놈들이…….”
더듬더듬 입을 뗀 모용위경이 이내 비명처럼 외쳤다.
“뭐, 뭐라도……. 뭐라도 해야!”
저들이 이대로 당장 덮쳐올지도 모르니 무슨 명이라도 일단 내려야 한단 소리였다.
그때 제갈자인이 나섰다.
“진정하십시오.”
모용위경에 비해서야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그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모용위경이 조금 안정을 되찾고 나자 제갈자인이 말했다.
“저들이라고 대책 없이 곧장 달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어, 어째서요? 지금 기세를 타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
모용위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갈자인을 보았다. 그러나 제갈자인은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군은 그 수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강한 것이다. 저들이 이동 중에 최대한 대열을 유지하려 했다고 해도, 저만한 군세가 한 치의 뒤틀림 없이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저들에게도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짧게나마 대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이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양을 노리는 범에게 발톱을 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이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뻔하므로.
제갈자인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던 적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사패련을 맞이해야 할 천우맹도들의 부담감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언제 다시 돌진해 올지 모른다는 긴장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달리고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저들의 모습이 더욱 잘 보였기 때문이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윽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던 사패련의 군세가 멈춰 섰을 때, 모두의 시선은 한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 누구도 청한 적 없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처구니없을 만큼 적막한 고요가 찾아왔다.
내뱉는 숨소리만으로도 지축을 울리고도 남을 인원이 모였음에도, 그 어떤 소음 한 자락 들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야 굳이 따질 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거대한 존재감이 모두의 숨통을 옥죄고 있어서였다.
일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긴장으로 터져 나갈 것 같은 정적.
차라리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라도 하는 편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찾아왔지만, 선두에 선 이는 그들에게 쉽사리 숨을 돌릴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붉은 장포를 휘감은 장일소가 마침내 시선을 돌려 제 맞은편에 선 이들을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느리게 훑어보았다.
뱀처럼 요사스러운 그의 시선에 닿은 이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움츠러들었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으며, 누군가는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은 누구도 그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단 점이었다.
새하얀 얼굴에 이질적으로 붉게 도드라진 장일소의 입술이 열렸다. 비음 섞인 흐릿한 목소리가 고요한 대지에 울려 퍼졌다.
“흐으음. 표정들이 다 왜 그렇지?”
붉은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이리될 일이었잖니.”
이 말에 모두의 피가 서늘하게 식는 듯했다.
그렇다. 모두 알고 있었다. 언제가 되었든, 사패련과의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곤일척의 승부로 모든 것을 가르게 되리라는 건 모두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당황스러울까.
예상했던 만큼, 언젠가는 그날이 오리라 믿었던 만큼 결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응? 내 말이 틀렸나?”
장일소의 눈빛이 그들을 꿰뚫었다. 무언가를 찾듯 시선을 옮기던 장일소는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한 듯 희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가장 중앙에 선 당군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독왕.”
느릿한 부름에, 당군악은 침묵을 고수했다. 입 안으로도 모자라 입술까지 바싹 마른 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상하네. 꽤 힘들어 보이는걸?”
“……장일소.”
“하긴, 어울리지 않은 감투를 쓰고 서 있기도 보통 일이 아니지.”
장일소가 나직이 웃으며 제 목을 톡톡 두드렸다.
“자칫 목이 부러져 버릴지도 모르거든.”
당군악은 알 수 있었다.
태연하게 말을 건네오는 장일소의 뒤에 도열한 사패련은 지금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호가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련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바삐 지시를 내리고 있을 테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문답조차 저들에게 유리한 일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당군악은 이를 쉬이 끊어 버릴 수 없었다. 저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미처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지 못한 이쪽의 시간을 포기하기란 어려웠다.
“장일소. 아니, 사패련주.”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맹주 대리로서, 또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아직 돌이킬 수 있소.”
“……흐음?”
“이 무모하고 덧없는 짓거리를 멈출 기회가 아직은 있단 소리요.”
당군악이 날카로운 눈으로 장일소를 응시했다. 그러나 장일소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심지어는 제 이마를 가볍게 쥔 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분에 넘치는 자리는 확실히 독이 되는 법이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뻔한 소리나 늘어놓는 수밖에 없거든.”
“…….”
“천우맹주라는 자리가 그렇게나 무거웠나? 응? 천하의 독왕이 헛소리나 지껄이게 할 만큼?”
당군악이 사납게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대화를 멈추려 들지는 않았다.
“말해 보시오. 뭐가 남소?”
“……음?”
“이곳에서 전쟁을 벌인다면 피가 강을 이룰 것이오.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겠지.”
장일소가 흥미롭다는 듯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껍데기만 남아 버린 강호를 손에 넣어서 그대에게 대체 뭐가 남느냐는 말이오. 그대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심지어는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 터. 정복이라는 그 알량한 말이 당신에게 그토록 의미가 있단 말이오?”
이건 인간 당군악이 가진 순수한 의문이기도 했다.
만인방의 방주, 패군 장일소.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얻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 희생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는가.
물론 당군악 역시 사천당가의 부흥을 원한다. 사천당가를 천하제일세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올려놓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원하되 원치 않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잃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정복이라 함은 그저 허울에 불과하지.”
“…….”
“그 허울에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그대의 삶이 무가치했던가? 정녕 그러한가, 장일소?”
당군악의 강렬한 외침이 장일소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일갈에 스민 절절함을 분명 알아차렸을 테지만, 정작 장일소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다니까.”
한심한 걸 바라보듯 짧게 혀를 찬 장일소가 긴 손가락으로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끝끝내 모르겠다면 알려 주지.”
“…….”
“가치가 있어서 원하는 게 아니란다. 알겠니?”
장일소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이는 명백히 비웃음이었다.
당군악은 순간 짙은 위화감에 휩싸였다. 저 비웃음 끝에 놓인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원하기에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거란다.”
그렇다면 장일소의 비웃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설령 모든 걸 다 잃는다고 해도, 설령 살아온 삶을 모두 부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껍데기만 움켜쥐는 꼴이 된다고 해도.”
나긋하던 장일소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원한다면…… 그때부턴 그만한 가치가 생겨나는 거란다. 모든 것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말이지.”
“……대체 누가 그런 걸 정한단 말인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당연히 나 아니겠니?”
“…….”
“희생하는 것도, 갈구하는 것도, 비웃음을 당하는 것도, 마침내 열광하는 것도 모두 나일 테지.”
당군악의 손끝이 떨려 왔다.
저 광기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그 근원은 또 무엇인지, 당군악에게 장일소란 불가해의 무언가였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당군악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장일소 바로 뒤에서 호가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련주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흐음. 그렇구나.”
장일소가 고개만 슬쩍 뒤로 젖혀 뒤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미소를 머금은 채 당군악을 마주 보았다.
“제 짐에 눌린 광대와 나눌 대화는 이게 전부란다. 더 놀고 싶거든 어른을 데려오렴.”
“패군!”
“보채지 말고. 그럴 필요 없단다.”
장일소의 얼굴에 일순 더없이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미 나는 충분히 기다렸으니까.”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장일소 뒤편에 도열한 사패련도들에게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여유였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지친 몸을 달래기는 충분했을 터. 한껏 끓어오른 열기는 오직 분출될 곳만을 게걸스레 찾고 있었다.
“뭐 하니?”
한껏 달아오른 모두의 귀에, 장일소의 담담한 목소리가 나직이 꽂혔다.
“물어뜯으렴. 늘 그랬던 것처럼.”
쿠웅!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땅을 박차는 소리가 거대한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우오와아아아아아아아!”
“죽여라아아아아아!”
이성의 끝자락을 완전히 놓아 버린 사패련의 군세가 천우맹을 향해 맹진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광기에 찬 악다구니를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