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91
화산귀환 1791화(1792/1797)
화산귀환
1791화. 저게 대답이란다. (1)
산을 부술 듯한 기세로 몰아치는 격랑을 멈춰 세우기란 어렵다.
아니, 멈출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흐름을 잠재우기란 불가능하다. 같은 크기의 힘으로 맞받는다고 해도, 그보다 더한 힘으로 집어삼킨다고 해도 홀로 뒤틀리는 격랑을 잔잔한 호수처럼 짓누를 순 없으므로.
그러나 지금,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센 불길처럼 타오르던 전장 속, 오직 한 곳만 온도가 달라졌다. 느릿하게 식은 게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달아오르지 않은 듯 서늘한 한기가 대지를 타고 흘렀다.
갑작스러운 청명의 등장에, 근처의 사패련도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었다.
사실 이들 중 청명을 직접 마주하고 검을 맞대어 본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얼굴만 보고 청명의 정체를 알아챌 이는 십분지 일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패련도들은 보자마자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대충 쓸어모아 질끈 묶은 긴 머리칼과 칠흑같이 검은 무복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가슴에 매화를 새긴 저 검수가 어떤 의미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군이라 불러야 할 이들도, 적군이라 불러야 할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는 긴장이 내려앉았지만, 그 긴장을 불러온 청명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오직 적(敵)에게만 꽂혀 있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청명이 늘어뜨렸던 검을 가볍게 휘돌리자, 검 끝에 묻어 있던 피가 자연히 털려 나갔다. 허공을 돈 검이 다시 손에 안착했다.
청명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적들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나?”
특별히 위협하는 기색은 없었다.
청명의 눈빛을 받는 이들도 알았다. 이건 위협하여 물러서게 만들 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외려 더욱 섬뜩했다.
“뭐, 나쁘지 않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같이 뒈질 놈들이 많으면 적어도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 놈도 남김없이 보내 줄게.”
그의 검 끝이 카칵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땅을 긁었다.
“그러니 억울할 일은 없을 거야.”
파아아앗!
세 개의 목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똑같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전장에선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다르게 느껴졌다.
세 개의 목이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 마치 시간이 뒤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뜨끈하게 튀는 핏물이 금세 모두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아…….”
쇄애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또다시 내질러진 검이 전면으로 쇄도했다. 목을 파고든 날은 가슴을 뚫고 나와 다른 이의 허리에 틀어박혔다.
실로 과격한 움직임이었다. 깔끔하게 급소를 노리는 화산의 검과는 분명히 궤가 다르다. 하지만 그토록 거친 움직임이 지켜보면 볼수록 기이할 만큼 유려했다.
힘으로 부수는 게 아니라 결대로 가르는 것에 가까웠다. 사도(邪徒)의 첨단에서 정도(正道)를 좇는 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패련도들을 순식간에 고혼으로 만들었다.
분위기가 일변하자 사패련도들의 두 눈 가득 들끓던 열기가 얼어붙었다. 그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놈들, 물러서지 말고 싸……. 컥!”
뒤쪽에서 사패련을 독려하려던 이가 순간 눈을 함지박만 하게 치떴다. 청명이 어느새 그의 앞을 지키던 이들을 뛰어넘어 지척에 다가와, 동시에 더는 외치지 못하도록 그의 입에 검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뜨거우며 동시에 서늘한 날붙이가 입 안을 고통스레 헤집었다. 하지만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입 안을 파고든 검날이 아닌, 그 검을 쥔 이의 눈빛이었다.
“남들더러 나서라고 주둥이 털 시간이 있으면…….”
“어, 어어…….”
“네가 직접 나서지 그래? 이 머저리 같은 놈.”
콰득!
입 안에 머물던 검날이 그대로 비스듬히 전진하며 경추를 끊어 내었다. 뼈가 사라진 듯 흐물거리며 쓰러진 사패련도의 시신을 발로 무심히 밀친 청명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적이다.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약해졌다라…….”
가슴속에 무언가가 갑갑하게 꽉 들어찬 느낌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건가.
그의 적은 언제고 그보다 강했다.
그러니 이건 오히려 그에게 익숙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덤벼, 멍청한 새끼들아.”
청명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흐음.”
전면에 나선 청명을 보며, 장일소가 뚱한 얼굴로 비음을 흘렸다.
“……그래, 뭐. 너무 뻔한 등장이긴 하지만, 이런 건 또 뻔한 면이 있어야 제맛이지.”
실로 태평한 감상이었다. 반면 호가명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장일소가 턱을 괸 채 나직이 웃었다.
“보렴, 가명아. 기류가 바뀌었구나.”
“…….”
“전쟁이 이래서 무서운 거란다. 아무리 머리를 쓰고 전략을 준비해도 어처구니없는 변수 하나로 모든 게 뒤틀리잖니. 조금 전에 천우맹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기에 있는 멍청한 놈들은 자기들이 기세를 잡았었단 사실은 이미 싹 잊고 기억도 못 할 거란다.”
호가명이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피해는 크지 않다. 고작 목숨 몇 개 날아간 정도다. 하지만 호가명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청명이 등장한 곳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실히 련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흐음?”
장일소가 의아한 기색을 띠며 슬쩍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이건 이제껏 저들이 치러 온 전쟁과 규모가 다릅니다. 한 사람의 신위로는 흐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청명의 활약을 눈으로 지켜본 이들은 사기충천할지 모른다. 그 검을 받아쳐야 할 아군은 자연히 사기가 땅에 처박힐 것이다.
이게 백 명 규모의 싸움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전투의 양상이 달라질 테다. 그로 인해 결코 질 리 없는 싸움에서 패할 수 있고, 결코 이길 수 없을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강호사에 전해지는 온갖 신화적 무훈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신위로 만들어 낸 수많은 업적, 그 업적을 아는 이들의 고양(高揚).
이를 폄훼할 생각도, 부정할 방도도 없다. 호가명은 그 황당무계한 일이 실제로 어떻게 벌어지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전장은 너무도 넓고, 여기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또한 너무도 많다. 국지적(局地的)인 승리로 전장의 흐름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청명이 신화적인 실력을 보여 준다고 해도, 몸을 열 개로 늘릴 순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천면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화검귀는 정상적인 상태도 아닐 터.’
그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라. 분명 청명이 있는 곳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지만 그 흐름이 전장 전체로 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부분의 반전만으로는 유의미한 영향을 만들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굳이…… 별도로 대응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호가명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었다. 따라서 필사적으로 매화검귀를 제거하려 들었던 제 지난 행보가 오히려 매화검귀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저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호가명이 이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대답이었다.
“흐음……. 그러니?”
하지만 장일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딱히 동조하지 않았다.
“……제가 틀렸습니까?”
“아니, 확실히 네 말에 틀린 구석은 없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을 저 골치 아픈 작자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니?”
“예?”
흠칫한 호가명이 안색을 굳혔다.
“뭘 놀라기까지. 나보다 네가 놈을 더 높게 평가하지 않았더냐.”
호가명은 침묵했다.
그래, 매화검귀라면 그러한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제 활약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황당무계한 생각 따윈 품지 않았을 터.
“……놈이 뭔가를 미리 준비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겠니?”
“하지만…….”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렵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자이니 분명 반격의 여지 정도는 마련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 본디 제대로 된 반격이란 공격의 정황을 알 수 있을 때나 가능한 법입니다. 그가 개방 이상의 정보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이런 상황에 무언가를 준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장일소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란다.”
호가명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매화검귀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입니다.”
호가명의 목소리에 점차 확신이 실렸다. 이는 오만도, 대책 없는 낙관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국을 뒤집을 만한 한 수를 둘 수 있는 자라면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매화검귀가 신이 아닌 이상 홀로 전황을 뒤집을 수 없단 뜻이다.
“흐으음.”
그런데 순간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장일소의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호가명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련주님?”
“가명아, 가명아. 너는 종종 미미하게 핵심을 피해 가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 말이 맞지. 대단하신 화산검협이라도 이 상황에서 판을 뒤집을 만큼 기막힌 수를 두진 못할 거다. 그건 나라고 해도 불가능하단다.”
호가명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째서 장일소는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있겠니?”
“……예?”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제 얼굴을 할퀴듯 쓸어내렸다. 손톱이 흰 얼굴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대비라는 건, 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나 필요한 거란다.”
장일소가 깔깔 웃어젖혔다.
“뻔히 벌어질 일을 앞에 두고도 예측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놓고 대처를 논하는 법이지.”
“…….”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단다. 이미 한참 전부터 말이야. 이건 그런 싸움이란다.”
호가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의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그러니 네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단다. 저자가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지 묻는 건 멍청한 짓이지.”
장일소가 귀기 어린 눈길로 전장을 훑었다.
“바른 질문은…… 저자가 공들여 준비한 게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그거란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공기를 찢어발기듯 터져 나와 귀에 꽂혔다.
‘뭐?’
호가명이 황급히 굉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획 틀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청명이 있는 쪽이 아니었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움푹 파인 땅, 한 사람이 오연하게 서 있었다.
장일소가 웃었다.
“보렴. 저게 대답이란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며, 한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새하얀 검을 치켜든 남궁도위가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휘날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