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14
◈ 114화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죠.”
지하 계단의 끝까지 내려온 강서준은 주변의 인기척을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카므리엘 백작이 최하나 씨…… 그리고 공주가.”
“뭐, 왜, 불만 있냐?”
나도석의 볼멘소리에 강서준은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나도석 씨.”
어쨌든 정리하자면 남자가 봐도 잘생긴 미남자 카므리엘 백작의 정체가 ‘최하나’였고, 만지면 부러질 것만 같은 비올레타 공주가 ‘나도석’이라는 것이다.
사실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사람이 드워프가 됐는데 성별이라고 바뀌는 정도야 양반이지.
문제는 다른 쪽이다.
“……왕이 김훈 씨였다고요.”
“저도 여러분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왕이 김훈일 줄이야.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는 당연히 NPC인 줄만 알았으니까.
‘왕이 플레이어라면 대체 NPC 측 대표 인물은 누구라는 거지?’
단순히 생각했을 때 흡혈귀의 대척점에 선 존재는 ‘왕국의 왕’일 것이다.
리자드맨의 우물에서 오가닉 같은 존재.
하지만 그 왕이 ‘플레이어’라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혹시 이번 시나리오는 NPC 측 대표가 공석인 걸까요?”
“……설마요.”
강서준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 경계를 선 기사들에게 향했다.
‘저 기사들 중 한 명인 건…….’
강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이 던전의 최고 생명체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일개 기사가 대표 격이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다.
그렇다면 최하나와 함께 움직였다는 비밀 조직 ‘그림자’가 유력한 용의자일까.
‘아니. 모두 카므리엘 백작 산하에 있는 조직이랬지.’
최하나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말했다.
“어쨌든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든 닿기 마련이에요. 너무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이렇듯 전부 변해 버린 모습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동료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큰 행운인가.
강서준은 차분히 자신이 알아낸 정보부터 풀어내기로 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곳 어딘가에 있는 ‘성물’을 파괴하는 게 흡혈귀의 목적입니다. 우린 그걸 저지하는 시나리오로 움직이고 있어요.”
엿들은 내용부터 추측까지 전달하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강서준은 확신을 더해서 말을 이었다.
“성물이 뭔지는 몰라도 흡혈귀에겐 치명적인 물건이라는 거겠죠.”
C급 테마 던전.
본래 캐릭터의 스텟과 스킬이 봉인된 만큼 이곳엔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도 있다.
그리고 그건 주로 아이템으로 제공되는데, 아마도 ‘성물’이 그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린 성물을 찾으면 됩니다.”
강서준은 어둠 속에 파묻힌 지하를 응시했다.
이제 공략을 재개할 시간이었다.
***
미로처럼 얽혀 있는 왕성의 지하.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둡고 서늘한 공기만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짙은 피 냄새와 함께 징그럽게 생긴 흡혈 바이러스 감염자들도 나타났다.
집사나 하녀들.
혹은 이름 모를 기사들.
흡혈귀가 된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진짜 이곳의 사람들은 지하에 이렇게 많은 흡혈귀가 살고 있는 줄 몰랐을까요?”
“글쎄요.”
“흡혈귀랑 싸운다는 왕성 아래에 버젓이 자리 잡은 흡혈귀들의 본거지라…….”
강서준은 미간을 좁히며 지하를 서성이던 흡혈귀 하나를 발견했다.
“이, 인간…….”
콰앙!
쏜살같이 달려들어 흡혈귀의 머리에 니킥을 날렸다. 동시에 돌려차기로 공격을 이어 확정타를 짓는다.
콰앙! 콰아앙!
뒤이어 최하나도 재빠르게 세검을 찌르며 옆의 흡혈귀 몸에 구멍을 냈다.
다섯 마리의 흡혈귀가 쓰러지는 건 금방이었다.
문득 김훈이 물었다.
“……대장장이 캐릭터 아니었습니까?”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마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흔들리고, 솟아난 암석이 흡혈귀의 몸을 관통했다.
왕 ‘킬로만자로 모르보스’.
모든 스텟이 마력으로 고정된 마법사이자, 대지 마법에 유능한 왕의 저력이었다.
김훈은 아쉬운 듯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강서준 님에게 도움이 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
뭔가 많은 의미가 섞인 한숨이었지만 강서준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금 다른 문제만 해도 골치가 아팠으니까.
강서준은 나도석을 흘겨봤다.
“끄으윽…….”
가녀린 몸으로 흡혈귀에게 접근해서 주먹질을 해 댔다. 용케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위태로웠다.
한 대라도 맞으면 큰일인데.
괜히 고생하는 건 그녀의 곁에 선 기사들이었다.
“공주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위험합니다, 공주님!”
나도석이 붉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놈의 공주 소리는 좀!”
가녀린 공주의 주먹이 흡혈귀의 목덜미를 가격하고, 빙글 돌면서 복부를 걷어찼다.
옆에 있는 흡혈귀의 무릎을 걷어차 균형을 잃게 만든 뒤,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코에 무릎을 박았다.
전투 기술 자체는 가히 훌륭했다.
문제는 나도석의 캐릭터인 ‘비올레타 공주’는 그의 본체처럼 근접 전투의 대가가 아니라는 거겠지.
강서준은 남몰래 조용히 물었다.
“……마법 안 쓰십니까?”
공주 비올레타는 본디 ‘빛의 마법사’라는 수식이 따라왔으니까.
“뭘 어떻게 하는 건데?”
“……마력으로 수식을 조합해서 밖으로 빼내면.”
“마력을 어떻게 빼내는데.”
“아.”
안타깝지만 나도석은 평생 마력을 다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하물며 수식을 조형해서 원하는 마법을 만들어 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동만으로 헬 난이도를 공략했고, 모든 전투를 맨주먹 근접전으로 즐기는 사내.
새삼스럽지만 그에게 마법사는 무리였다.
‘하긴, 원래 테마 던전에서의 마법사는 골치 아프단 얘기가 더러 있었지.’
물론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마법사’를 플레이하기 쉽도록,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김훈도 그래서 마법을 쓰는 것이고.
나도석은 그조차 못 하니 문제였다.
“으아아! 젠장!”
“공주니이이임!”
나도석이 밀어낸 흡혈귀를 기사가 마무리하는 것으로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퉁퉁 부은 공주의 손.
그나마 다행인 건 ‘빛의 마법사’는 자체적으로 신체의 회복 속도가 조금 빠르다는 것이다.
나도석의 ‘재생’ 스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저 상태보다 악화되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최하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왕성의 지하엔 제단이 숨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들을 끌고 갈 때도 제단에 쓰인다고 했었다.
‘드워프를 납치한 것도 성물을 파괴하기 위해서일 테니까…….’
강서준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긴장해요. 여기부터가 진짜니까.”
제단은 미로같이 얽힌 복도 끝에서 오래된 유적지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쪽엔 누군가가 피처럼 붉은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벽에 걸린 호롱불만이 은은하게 밝았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로군.”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놈의 얼굴은 새하얀 백지장 같았다. 붉은 잉크만 입가에서 뚝뚝 떨어졌다.
[엘리트 몬스터 ‘진혈 흡혈귀 레드 셀(C)’이 등장했습니다.]엘리트 몬스터.
여태 만났던 많은 흡혈귀들이 고작 감염된 인간에 불과했다면, 저놈은 시작부터 흡혈귀였다.
이른바 숙주였다.
“감히 성스러운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강서준은 제단의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드워프들도 발견했다.
“씨, 씬?”
하지만 그들에게 당장 다가가긴 어려웠다. 흡혈귀 레드 셀이 앞을 턱 가로막았으니까.
“죗값은 네놈들의 피로 묻겠다.”
잠깐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레드 셀은 지척에 나타났다. 최하나가 세검을 뽑아 맞부딪치자 불똥이 크게 튀었다.
채애앵!
“땅의 울림이 있으라. 어스퀘이크(Earthquake)!”
김훈이 만들어 낸 지진이 레드 셀을 흔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강서준도 전장에 난입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건방진!”
아쉽게도 강서준의 공격은 허공을 때렸다. 놈의 몸이 전부 그림자로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둠에 동화된 듯 사라진 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기사의 뒤편.
“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송곳니가 솟아났다.
여태 함께 싸워 왔던 기사는 허무하게도 단 일격에 의해, 말라비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놈은 금세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최하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는 녀석이에요. 카므리엘의 보고서에도 적혀 있었죠.”
어둠을 걷는 흡혈귀, 레드 셀.
공교롭게도 놈을 공략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약점은 빛 마법이죠.”
강서준은 어둠을 휘적이며 주먹을 내지르는 나도석을 바라봤다.
마침 빛의 마법사는 있었다.
하지만.
“……무리일 것 같은데요.”
다시 튀어나와 송곳니를 들이박으려던 놈은 이번엔 최하나의 세검에 의해서 물러났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부질없는 공방이 오고 갔다.
애꿎은 기사들만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을 당할 뿐이었다.
“일단 빛 마법 이외의 방법을 찾기로 하죠. 다른 약점은 없었습니까?”
어둠을 휘어잡듯 흑철 슈트를 극성으로 발동했다. 강서준은 또 다시 김훈에게 접근하는 레드 셀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멀어진 놈이 이번에 노린 건 김훈이었다.
최하나가 바로 붙어 세검을 휘둘렀다.
“……없어요! 이놈에 대한 정보는 그게 전부예요!”
강서준은 가볍게 혀를 차며 몇 번이나 일렁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러라고 만든 시나리오였으니까.
“빛 마법밖에 방법이 없어요.”
“나도석 씨는 무리예요.”
“알아요. 그러니 편법을 써야죠.”
강서준은 분한 듯 씩씩대는 나도석에게 물었다.
“혹시 빛 마법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어요?”
“뭐?”
“눈앞에 일렁이는 글자라도 읽어 봐요.”
나도석도 이 상황이 영 탐탁지 않았는지, 순순히 무언가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빛을 생성하려면 마력을 단전에서부터 꺼내어 0.2mm의 선을 허공에 그려서 마법진을 완성…… 그림도 설명해 줘?”
“전부 말해 줘요.”
몇 번의 레드 셀의 공격을 맞부딪치는 와중에도 나도석의 말은 이어졌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마법에 대한 설명.
이윽고, 모두 내뱉은 나도석이 지친 얼굴로 강서준을 바라봤다.
“그래서 어쩌려고?”
“마법을 써야죠.”
“……외웠어?”
강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 역할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에 강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훌쩍 달려 제단 옆으로 향했다.
드워프들이 방치된 곳.
그곳에서도 드워프 막내 콜에게 다가갔다.
“다 들었지?”
“으, 응?”
“빨리 그려.”
콜은 강서준의 머릿속에만 있던 ‘흑철 슈트’의 설계 도면을 현실로 끄집어낸 천재였다.
대장장이에 어울리진 않지만, 이런 면에서 있어선 그의 실력은 비범한 데가 있는 것이다.
“잠깐만…….”
이에 레드 셀이 이상함을 깨닫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개수작이냐!”
“……어딜!”
하지만 일행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김훈의 대지 마법이 주변을 감쌌고, 최하나의 세검이 레드 셀을 저지했다.
콜의 그림은 금방 완성됐다.
“됐어!”
강서준은 흘린 피를 물감 삼아서 바닥에 그린 콜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줬다.
그리고 바로 흑철 슈트를 해제했다.
“슈트는 왜……?”
“마법을 쓰려면 어쩔 수 없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잡아먹는 하마 같은 놈이다. 흑철 슈트를 착용한 채로 마법을 쓴다는 건 무리였다.
그때 김훈이 물었다.
“……그전에, 가능한 얘기예요?”
드워프 씬은 대장장이에 대한 재능은 일절 없었지만, 가진 마력만 495나 되는 괴물이다.
또한 마력이라면 이골이 났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마법이지만 강서준은 자신이 있었다.
드워프 씬의 스텟.
그리고 강서준의 경험이라면…….
“할 수 있어요.”
가이드라인이 제공된 빛 마법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