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18
◈ 118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거울 한쪽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회백색의 머리카락. 저런 색깔을 애쉬 그레이라고 하던가?
흰색의 단정한 코트를 입은 소녀는 허공을 두드리더니 다시 말했다.
-적합자. 내 말 안 들려?
진실의 성물 ‘이루리’.
흡혈귀들의 반대편에 선 NPC의 대표 격 인물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만.
성물 속에 봉인되어 있었나.
‘아니지. 시스템 메시지만 봐서는 이 아이 자체가 성물이야.’
어쨌든 강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할 수 있었다.
-저기요. 나 무시하세요?
“……들려.”
-휴. 일부러 무시하는 줄 알았네.
이루리는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종전부터 느낀 건데, 꽤나 액션이 다양한 캐릭터였다.
-또 대답 없네. 적합자는 여자한테 인기 없지?
“……뭐?”
-꼭 그런 타입 같아. 소개팅 나가도 한마디도 못 하고 얼어 있지?
“아니거든?”
이루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아니라고는 하더라.
강서준은 미간을 구기며 이루리의 모습을 다시 살펴봤다. 말투도 그렇고,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애였다.
많아야 열다섯?
근데 얘는 소개팅을 어떻게 아는 거야?
강서준은 일단 모든 의문을 미뤄 두기로 했다. 지금 그에겐 이럴 시간도 사치였기 때문이다.
“일단 봉인을 해제해야겠는데.”
-그럼, 얼른 해야겠지.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겠니?”
이에 이루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쪽이 알고 있어야지.
“…….”
-농담이야.
강서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루리는 그 태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색하기는. 유머 센스도 0점이야.
“……장난칠 때 아니니까, 제발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흥. 보채는 성격도 별로야.
순간적으로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눌러 참았다.
다행히 이루리도 더 장난치진 않았다.
-방법은 간단해. 마력으로 거울을 감싸고 그 위를 파괴 스킬로 부숴.
“……끝이야?”
-끝이지.
“정말 간단하네.”
거두절미하고 강서준은 바로 거울에 마력을 덧씌웠다. 가히 성물답게 과할 정도로 쏟아부은 마력조차 가뿐히 버텨 내고 있었다.
그리고 망치를 꽉 쥐었다.
-……적합자? 감정이 실린 것 같은데?
강서준은 힘껏 내리쳤다.
[스킬, ‘파괴(S)’를 발동합니다.]큰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거울.
마력으로 덧씌웠음에도 산산조각이 난 거울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행히 성물의 봉인을 풀어내는 데에는 성공이었다.
“흐응. 산뜻한 바깥 공기…….”
어느새 거울 속에만 갇혀 있던 이루리가 눈앞에 현신해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기 코를 콱 막더니 말했다.
“……가 아니잖아?”
NPC이자 특수 아이템 ‘진실의 성물’.
이루리와의 첫 만남이었다.
***
볼보와의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 중이었다.
심신합일로 이룩한 나도석의 스킬도 처음보다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다소 희미해진 형상이 이를 증명했다.
아무렴 무적은 아닐 것이다. 마음에도 내구도는 있을 테니까.
그나마 최하나가 옆에서 충분히 보조해 주고 있어서 상황은 진전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강서준은 이루리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
“뭐를?”
“볼보를 잡아야지.”
“아, 그랬지. 참?”
정신없는 이루리의 상태에 강서준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신경 써 봐야 본인만 힘든 타입이다.
“일단 적합자의 본래 모습부터 되찾아야 하지 않겠어?”
“본래 모습?”
“그 모습으로 싸울 수 있겠어?”
강서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비록 흑철 슈트를 입고 있다고는 하나 그 수준은 대단히 허접해 보였다.
레벨도 고작 120이다.
본래 그가 가진 스텟의 70%도 써먹질 못하는 수준이 아닌가.
그것도 전부 마력에 올인된 상태였다.
“근데 가능하겠어?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니.”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끄러운.
“방금 무례한 상상을 한 것 같은데.”
이루리가 가재눈을 뜨며 귀신같이 강서준의 생각을 잘라먹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에휴, 내 팔자다 해야지. 이런 못난 적합자를 만난 내 잘못이지.”
그러더니 강서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해? 본래 모습으로 안 돌아가?”
강서준은 미심쩍은 눈을 뜨며 이루리의 손을 맞잡았다. 거기서부터 미묘한 기운이 강서준의 몸을 감돌기 시작했다.
[NPC ‘진실의 이루리’가 스킬, ‘진실 혹은 거짓’을 발동했습니다.] [거짓된 모든 것들이 소멸합니다.]미묘한 기운이 한차례 휩쓸고 간 뒤였다. 강서준은 키가 훌쩍 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과연. 이런 거였나.”
목소리도 바뀌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니 완전히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루리랑 시선도 마주쳤다.
“대박…… 적합자. 로또였어?”
“무슨 소리야?”
“쭈굴거리는 찐따 드워프인 줄 알았는데, 1등 복권이었다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이루리를 일별한 강서준은 다시 볼보와 한창 전투 중인 현장을 돌아봤다.
이루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방법은 같아. 볼보도 내가 손을 대기만 하면 거짓된 모습이 지워지고 진짜 모습이 나타나. 그러니 나를 도와서…….”
“아니, 이젠 됐어.”
강서준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 정도는 나도 베어 낼 수 있으니까.”
[스킬, ‘류안(S)’을 발동합니다.]강서준은 재앙의 유성검을 꽉 쥐면서 자세를 잡았다.
몸은 날 듯이 가벼웠다.
그리웠던 천무지체였다.
[장비 ‘도깨비 왕의 감투’의 전용 스킬, ‘이매망량’을 발동합니다.]그리고 이루리를 향해 말했다.
“볼보보단 나머지 일행들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찾아 주는 걸 부탁할게.”
“나, 나만 믿어.”
괜스레 말을 더듬은 이루리의 상태가 가히 이상했지만, 강서준은 볼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여태 볼보가 공격을 맞고도 멀쩡했던 게 아니었어. 단 한 번도 맞힌 적이 없었던 거지.’
해서 볼보의 거짓을 공략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필요했다.
성물에게 도움을 받아 그 거짓을 완전히 지워 내는 방법.
‘그리고 거짓을 유지하는 마력의 구심점을 직접 공략하는 방법.’
순식간에 접근한 강서준은 금빛으로 일렁이는 눈을 빛내며, 볼보의 몸통을 푸욱 찔렀다.
놈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크윽…… 무슨?”
여태 멀쩡하던 놈의 몸에 드디어 상처가 생겨났다. 볼보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한창 거친 숨을 뱉어 내던 최하나가 물었다.
“서준 씨……?”
“고생 많았어요. 나머진 제게 맡겨요.”
뒤이어 볼보가 블러드 샤워를 날리고, 각종 마법을 던져 댔지만 강서준은 모두 가뿐히 피해 냈다.
[스킬, ‘류안(S)’을 발동합니다.] [스킬, ‘초상비(F)’를 발동합니다.]다음으로 볼보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손끝의 감각이 유효타를 먹였음을 확신하게 했다.
“어, 어떻게 인간 따위가……!”
강서준은 대답하지 않고 재앙의 유성검을 꽉 쥐었다. 지근거리에 다다른 그의 단검은 빠르게 휘둘러졌다.
쿠웅! 콰아앙!
쿠아아앙!
순식간에 오고 간 공방.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부딪친 충격파로 인해 마굴은 무너질 듯 흔들렸다.
볼보는 검붉은 마기를 더욱 끌어올리면서 외쳤다.
“크아악! 이럴 순 없다. 마족의 피를 머금은 나 마혈의 볼보 님이 그깟 인간 따위에게 무너질 리가…….”
“거, 참 말 많네.”
강서준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잘라먹으면서 볼보에게 접근했다. 놈이 재차 공격을 가해 왔지만 가뿐히 피해 내며 재앙의 유성검을 찔러 넣었다.
몸통을 관통당한 볼보가 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무심하게 놈의 날갯죽지를 그대로 그어 버렸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볼보가 더욱 마기를 쏟아 내며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성물의 힘을 쓰지 않고도 날 공격할 수 있는 거냐!!”
“도움이 없긴 왜 없어? 가장 큰 도움이 되어 줬는데.”
볼보의 거짓을 직접적으로 지워 낸 건 아니지만, 강서준에게 덧씌워졌던 ‘드워프’라는 캐릭터를 지워 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던전을 공략하려고 레벨 업을 무던히도 해 놓고 제대로 못 써먹어 아쉬웠는데.
이렇게 마음껏 사냥에 전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기다려 봐. 널 만나러 사신이 오고 있으니까.”
“……뭐?”
쿠아아앙!
엄청난 소음과 함께 볼보에게 휘둘러진 주먹이 있었다. 강서준처럼 거짓 속에 숨겨진 마력의 구심점을 때리는 게 아니라 직접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고작 충격파만으로 이 정도야?’
힘껏 내지른 주먹이 품은 권풍은 거짓 속에 숨어 있던 볼보까지 한 번에 휩쓸어 버렸다. 강서준이 여태 입힌 데미지 때문인지 놈도 이 공격을 온전히 피해 낼 수는 없었다.
“후우. 이제야 좀 시원하네.”
비올레타의 얼굴을 벗어던진 나도석은 어깨를 풀었다. 심신일체를 통해 억지로 끄집어낸 모습이 아니라 진짜 나도석이었다.
‘그나저나 마기는 괜찮으려나?’
나도석의 약점은 마력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흩뿌려진 마기는 그보다 더 치명적인 독이 될 터.
하지만.
“날파리처럼 자꾸 거슬리게.”
콰앙!
나도석은 그를 노리고 접근하던 마기를 손짓 한 방에 날려 버렸다. 터무니없지만 그는 방금 ‘마기’를 맨손으로 튕겨 냈다.
‘더 괴물 같아졌네.’
모르긴 몰라도 심신일체의 숙련도가 상당히 올라간 것 같았다. 무지갯빛 오오라가 더 찬란하게 보인다.
강서준은 다시 돌아온 최하나도 볼 수 있었다.
“……왜 그대로죠?”
“이 던전에선 최하나보단 카므리엘이 더 강해요. 유효타만 먹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강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나도석이야 레벨이 조금 낮아도 올 힘이라는 터무니없는 스텟 분배를 통해서 상위 몬스터에게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
하지만 최하나는 200레벨의 볼보를 상대하기엔 약간 모자람이 있었다.
‘그에 비해 카므리엘은 200레벨이니까.’
테마 던전이 쥐여 준 혜택을 활용할 수 있다면 활용하는 게 최선이다.
“제가 찌르는 곳을 같이 찌르세요.”
강서준은 먼저 달려 나가며 볼보의 대퇴부를 노렸다. 놈이 재앙의 유성검을 맞부딪치며 튕겨 냈지만 그 자리로 어김없이 최하나의 세검이 꽂혔다.
치명타가 터졌다.
“끄아아아아아악!”
카므리엘의 검은 다름 아닌 흡혈귀를 베기 위해서 코브가 특별히 제작한 세검이었다.
여태 거짓을 베어 내질 못하여 직격타를 먹일 수 없었지만, 이렇듯 공격만 성공시킨다면 흡혈귀에겐 치명적인 무기였다.
그리고 얼마나 더 타격을 입혔을까.
놈의 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연기처럼 쏴악 방출됐다.
남아 있는 건 1M 크기의 흡혈귀.
볼보의 진체였다.
“……정말 나 없이도 거짓을 베어 냈네.”
옆으로 다가온 이루리는 본래 모습을 되찾은 김훈과 함께였다.
그녀는 약간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 볼보는 거짓이 지워진 이후부터가 진짜 강해지니까.”
강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기는 더 작아졌지만 그 안에 들어선 마기는 전보다 더 두터워져 있었다. 놈은 종전보다 아마 두 배는 강할 것이다.
‘2페이즈’란 거겠지.
보스 몬스터의 체력이 30% 아래로 떨어지면 드러나는 형태.
강서준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나도 이제 시작이니까.”
“……응?”
반문하는 이루리를 뒤로하고 강서준은 재앙의 유성검의 스킬인 ‘블러드 석션’을 발동했다.
붉은 연기가 흡수되고 강렬한 에너지가 파동을 일으켰다.
이루리가 대번에 알아봤다.
“잠깐…… 그 무기는?”
츠츳.
눈앞에 공기에서 스파크가 튀는 순간이었다. 강서준은 공간을 접듯이 달라붙어 놈의 몸통을 베었다.
“끄아악!”
결국 2페이즈가 됐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볼보의 움직임만 더뎌지고 강서준의 공격력은 더욱 강해졌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재앙의 유성검’만이 가진 특징.
상대의 피를 머금은 것이다.
강서준은 미간을 구기면서 마력으로 단검의 검신을 때렸다.
“……야, 적당히 처먹어.”
우웅.
재앙의 유성검이 반항하듯 볼보의 피를 더욱 빨아먹기에 강서준은 검을 빼고 뒤로 훌쩍 멀어졌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단검.
그리고 볼보는 이미 강서준의 공격에 의해 누더기처럼 변한 상태였다.
흡혈귀 주제에 피를 빨려서는 꽤 퍼석퍼석해진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강서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훈 씨, 부탁할게요.”
“네.”
이루리는 느닷없이 공간 이동을 펼친 김훈을 보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다 잡아 놓고? 무슨??”
[플레이어 ‘김훈’이 ‘특수 포션 치료(F)’를 발동합니다.]죽어 가던 볼보는 게걸스럽게 포션을 마시며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