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20
◈ 120화
강서준은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
달 추락을 막기 위한 던전의 롤백.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시점에 맞추어 볼보를 죽인다는 기존의 계획은 무려 성공이었다.
[버그가 발생했습니다.]지난번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겹쳐서 뜬 것부터 완전히 던전에 고립되기까지 그 과정은 똑같았다.
머지않아 롤백이 시작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이상해.”
옆에서 이루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뭐? 지극히 정상인데.”
“……다들 안 움직이잖아.”
“응. 그니까 정상이라고.”
강서준은 지상의 연무장에서 대련을 펼치던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서로를 향해 검을 찔러 넣는 장면. 검이 맞부딪쳐 튀는 불똥마저 허공에 박제된 듯 굳어 있다.
이루리는 괜히 기사의 볼을 콕 찔러 보면서 말했다.
“버그가 발생하면서 던전의 기능이 완전 멈춰서 그래.”
“……그게 정상이라고?”
“응. 여긴 던전이니까.”
강서준은 왕궁 내의 수많은 가신들을 둘러봤다. 하인부터 기사들, 걸어 다니는 모든 NPC는 일시정지된 영상처럼 굳어 있었다.
이루리가 부연 설명을 해 줬다.
“저들은 던전에 귀속된 존재들이잖아. 던전이 제 기능을 하질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똑같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거야.”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그는 던전에 귀속된 존재가 아니기에 움직일 수 있었고, 저들은 그러지 못하기에 부지불식간에 멈춰 버렸다.
강서준은 바람 소리조차 일지 않는 적막만이 감도는 세상을 둘러보며 신음을 흘렸다.
한 단어가 떠올랐다.
‘안락사(安樂死).’
던전을 롤백시키는 과정에서 걱정했던 것들이 있다.
바로 백스페이스와 쉬프트, 잘라 내기가 난무하는 현장에 고스란히 노출될 NPC들의 패닉이었다.
출구 없는 던전에서 그들이 속절없이 소멸하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한다는 건 솔직히 꺼려지는 일.
‘하지만 던전이 고립된 것과 동시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멈춰 버린다니…….’
사람들이 괴롭게 소멸하는 과정을 보질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무척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네.”
“아름답진 않지.”
흡혈귀에 대항하여 한껏 열심히 살아오던 왕국의 사람들이다.
매일 망치를 들던 드워프들, 폐기처리장을 비웃던 놈부터 그 속에서 괴로워하던 하자 있는 대장장이들까지.
울고, 웃고, 화내고, 절망하고.
비록 이곳에서 지낸 지 일주일도 채 되질 못했지만 그가 겪은 모든 것들은 현실이었다.
‘버그가 생겨났을 뿐인데.’
고작 한 세계가 이렇게 무너진다.
허무하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물론 초기화를 겪어서 다시 복구될 세계였지만, 누군가의 삶이 이토록 허무하게 재단된다는 건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이다.
강서준은 가볍게 혀를 찼다.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모든 게 멈춰 버린 세상에서 홀로 움직이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
강서준은 성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봤다. 멀리 이 던전의 끝에 해당하는 곳이 어딘지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꽤 크네?”
아무렴 C급 던전이다.
리자드맨의 우물을 떠올려 보면 던전의 규모는 당연히 대단히 커야 정상인 것이다. 고작 로테월드의 인근만을 잡아먹던 로테타워 쪽의 던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기야 그건 던전화 과정에서 망가진 곳이니까. 확장 이전에 그리됐을 수도…….’
게다가 그래서 던전 브레이크도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까.
사실 던전의 등급이 오를수록 던전의 규모가 방대해지기 때문에, 던전꽃을 아무리 심어도 쉽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않는 법이었다.
‘뭐, 그쪽은 생각할 것도 없어. 이젠 가지고 있는 던전꽃도 없으니까.’
일전에 로테월드를 탈출할 때 써먹었던 ‘던전 브레이크’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이루리는 가재눈을 뜨며 물었다.
“……포기한 거 아니었어?”
“내가?”
“응. 이 던전과 함께 소멸하려고 희생한 건 줄 알았는데.”
강서준은 씨익 웃었다.
“설마.”
그저 최하나를 남겨 둘 수 없었다.
나도석은 볼보를 제 시간에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고, 김훈의 공격력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결국 남아야 할 사람은 ‘강서준’이 유일했으니 정해진 결론이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 그는 희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 이 던전을 빠져나갈 거야.”
“……진심이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여기서 죽을 것 같아?”
강서준이 자처해서 남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바로 본인이라고 장담할 수 있으니까.
‘비록 여태 겪어 본 적이 없는 형태의 던전이지만 고작 던전 브레이크만으로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곳이다.’
그래 봐야 던전이고.
그래 봐야 게임이다.
“아직 여길 빠져나갈 방법을 못 찾았을 뿐이야.”
시간은 많았다.
던전의 규모가 큰 만큼 초기화 과정은 아주 오래 걸릴 테니까.
강서준은 아주 멀리 새카맣게 가려진 시스템 제한 구역을 응시하며 말했다.
“공략법만 찾으면 돼.”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
이후로 꽤 많은 시도를 해 봤다.
“이건 역시 안 되네.”
“이 방법도 무리야.”
“……흠. 이것도 아니야.”
카므리엘의 집무실을 제 방처럼 쓰면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무던히도 고민해 봤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12일째가 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의미한 수확은 없었다.
딱 실마리 하나만 잡았다.
“분명 어딘가 구멍이 있을 거야. 나 하나 정도는 빠져나갈 정도의 틈. 이 게임이 그리 완벽한 게임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 구멍을 찾기도 전에 벌써 백스페이스가 툭툭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서준은 벌써 수도까지 접근한 검은 물결을 확인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별수 없을까? 이루리. 아는 게 있으면 아직 늦지 않았어, 빨리 불어.”
“글쎄. 나도 잘 모른다니까?”
“너 전생에 해커였다면서?”
“말했잖아. 자세한 기억은 모두 지워져 있다고. 음. ‘그랬더라?’라는 정도만 남아 있어.”
의외로 알게 된 건 이루리의 과거였다.
“나도 어떻게 진실의 성물이 된 건지는 몰라. 벌써 수백 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녀는 전생에 한국인 ‘이루리’였으며, 해커로 꽤 이름을 알렸다고 본인 입으로 자랑했다.
뭐라더라, 화이트 해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나이는 살아온 세월을 전부 합하면 수백 살은 넘었다.
그게 가당키나 할까.
‘모르지. 시간의 흐름 정도야…….’
일전에 로테월드에서 고립된 이후로 서울에 돌아갔을 때, 고작 며칠은 한 달이 되어 있었다.
이 게임은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 있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이 게임의 오픈 당시, ‘어떤 이유’로 인해 이 ‘재앙의 유성’으로 난입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아이템이 되어 버린 것이고.
“도깨비는 뭔데?”
“아직 나도 잘은 몰라. 도깨비 왕만이 내 적합자라는 사실만을 기억해.”
그래서 이루리의 정체는 아직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강서준은 한량처럼 바닥을 뒹구는 이루리를 향해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돌아갈 한국은 남아 있고?”
강서준은 잠시 침묵하다 가볍게 혀를 찼다. 그녀의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이루리는 식당에서 가져온 주전부리를 씹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방법은 알려 줬잖아? 백스페이스, 쉬프트, 잘라 내기…… 그런 명령어가 있다면.”
“그래. 다른 명령어도 만들 수 있다고.”
“그렇지.”
강서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럼 그 명령어를 어떻게 만드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과 답이었다. 강서준은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루리가 물었다.
“어디 가게?”
“……왕성 한 번 더 찾아봐야지.”
“그런다고 없는 히든 시나리오가 나올까?”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벌써 12일째 반복하는 일이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서준은 멈추지 않았다. 혹시 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적합자도 참 적합자야. 12일이 지나도 한결같네.”
“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
하지만 그날도 허탕이었다.
***
그리고 결국 때는 왔다.
“적합자. 방법은?”
“……찾는 중이야.”
벌써 성내로 들이닥친 백스페이스의 빗줄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떨어진 놈들이 직선으로 움직여 대며 건물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가위는 또 어떤가.
훌륭한 조경사가 가꿔 놨을 성내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무심하게 싹둑싹둑 잘라서 난도질을 해 댔다.
허공에 구멍이 뚫리고, 세상은 지우개로 지우듯 소멸하고 있었다.
강서준은 가장 높은 탑에서 그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루리가 말했다.
“……적합자. 뭘 하든 지금 해야 해.”
크콰카카칵!
검은 물결은 해일이 몰아치듯 성을 잠식해 갔다. 강서준이 선 땅까지 순식간에 치고 들어올 기세였다.
사방을 둘러봤다.
이젠 아름답던 왕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암흑만이 가득한 세계가 무시무시하게 주변을 둘러쌌다.
초기화가 완료되기 직전인 던전.
강서준은 직경 5M 전방까지 모두 지워진 걸 보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루리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쿠키를 꺼내 먹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적합자랑 함께했던 19일은 꽤 즐거웠어. 날 깨워 줘서 고마웠어.”
“……왜 벌써 작별 인사야?”
“응? 누가 봐도 그런 타이밍 아니야?”
강서준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신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그러더니 이루리를 품에 안고 대뜸 탑에서 뛰어내려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아래로는 검은 물결이 계속해서 차올랐다.
이루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차라리 자의로 가는 게 속 편하지.”
“……자꾸 뭔 소리야?”
걷잡을 수 없는 낙하 감각과 함께 강서준은 풍덩, 검은 물결 사이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쉬프트로 잠식된 모든 공간은 초기화의 대상이 되어 소멸하기 마련.
[‘백도어(Backdoor)’에 진입했습니다.]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이루리도 감았던 눈을 뜨며 황당하단 얼굴로 강서준을 바라봤다.
“백도어? 여기 백도어가 깔려 있었다고?”
“그러게. 뭔가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게 백도어였을 줄이야.”
백도어.
인증되지 않은 사용자가 무단으로 프로그램에 개입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그램 속 숨은 통로.
강서준은 약 1M의 반경을 가진 틈 속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새카맣게 물들어 버린 세계.
모든 게 소멸하고 지워진 덧없는 던전의 풍경은 고요하고 어둡기만 했다.
강서준은 한숨을 덜어 내며 말했다.
“사실 이 틈을 발견한 건 좀 됐어. 왕성을 쥐 잡듯이 뒤지다 보니 허공에 살짝 일그러진 틈이 보이더라고.”
“……이걸 진짜 찾아냈네.”
“말했잖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발견한 틈을 보고도 섣불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안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려우니까.
그래서 강서준은 기다렸다.
“쉬프트가 차올라도 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더라. 그래서 알았어.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이루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여기가 정답이 아니었으면 어쩔 생각이었는데?”
“모르지. 다가오는 시스템마저 베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진심이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강서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이다음이 문제야. 이루리, 우리 이제 어떡하지?”
“……백도어에 입장했으니 아마 어딘가로 연결되긴 했을 것 같은데. 글쎄, 거길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이루리의 말에 강서준은 일단 류안을 발동시켜 봤다. 하지만 백도어 내부는 그 어떤 흐름도 보이질 않았다.
“흐음…….”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언제까지 이 공간이 유지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초기화가 끝나는 순간.
이곳도 없어지지 않을까?
‘됐어.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자.’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걱정할 시간에 당장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를 고민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이제 어쩐담…… 으응?’
눈앞에 문장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솔직히 걱정했는데 역시 찾아내는군요.]“…….”
[케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터무니없지만 그건 시스템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