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32
◈ 132화
일단 급조된 낙원부터 벗어난 강서준은 폐허가 된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따라나선 여러 플레이어들이 보조를 맞추고, 그중 나한석은 백승수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낙원에 남는다지 않았습니까?”
“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면서요.”
그 질문에 뜨끔한 표정을 짓는 플레이어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백승수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흠흠…… 진심이 아닌 거 알지 않습니까.”
괜히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백승수. 그 모습을 보면서 강서준은 쓰게 웃었다.
낙원에서 절규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요. 한날한시 갑자기 죽어 버리는 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의기소침한 데는 있어도 전처럼 극단적인 절망에 빠진 얼굴이 아니었다.
“그땐 답도 없었잖습니까…….”
희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다 꺼져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불씨 하나만 찾는다면 이렇게 들불처럼 일어난다.
고작 ‘강서준’이 데이터를 복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들 의욕을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
‘설마 이들이 정말 죽고 싶었겠어.’
답을 찾을 수 없는 난제 앞에서 부득이하게 굴복했을 뿐.
그러니 작은 힌트만 쥐여 줘도 사람들은 알아서 스스로를 불태우며 일어난다.
괜히 먼 산을 바라보던 백승수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듯 질문을 던졌다.
“근데 여긴 왜 온 겁니까? 킬 스위치는 블랙 그라운드에 있다면서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준비가 덜 됐거든요.”
“네? 준비요?”
“백승수 씨. 던전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압니까?”
곰곰이 고민하던 그가 답했다.
“글쎄요. 레벨이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RPG 게임에서 레벨이란 대단히 중요했다. 누구든 그 수준만 높다면 던전 공략은 수월해진다.
하지만 강서준이 기대하는 답은 아니었다.
레벨이 미치는 영향이 제아무리 커도 반드시 공략을 성공으로 이끄는 확실한 방법일 수는 없었으니까.
강서준은 차분히 정답을 알려 줬다.
“바로 정보예요. 제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그 조건이 까다로우면 속수무책으로 죽거든요.”
과거 그가 S급 던전 ‘용의 무덤’에서 속절없이 죽어 버렸던 것처럼.
만약 그때 ‘용의 무기’라는 정보만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지. 불사의 특징만 빼고 본다면 할 만한 싸움이었으니까.
“한데 우리가 가진 정보는 너무 빈약해요. 백승수 씨. 이대로 블랙 그라운드에 가면 킬 스위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막연하군요.”
“네. 그래서 정보를 먼저 얻어야 해요.”
게다가 찾더라도 문제다.
킬 스위치에 대한 세세한 정보도 없이 자칫 실수를 저지른다고 생각해 보라.
킬 스위치가 제멋대로 활성화되어 버린다면 그땐 스스로 세계를 지운 테러리스트가 되는 거다.
‘거기다 블랙 그라운드는 유일하게 몬스터가 남아 있는 땅이야. 백신들도 접근하기 꺼릴 재난도 수두룩하고.’
물론 현시점의 강서준이야 두려울 게 없지만…….
여하튼 강서준은 어느덧 다다른 목적지를 올려다봤다.
옆으로 30도 정도 기운 탑.
“그래서 우린 이곳에 온 겁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과도 같은 모양새. 옆으로 기울어서 무너질 것만 같은 탑.
이름하여 ‘마탑’이다.
“보기완 달리 진짜 무너지진 않으니까. 다들 조심히 따라와요.”
“네.”
강서준은 망설임 없이 폐허로 남아 버린 마탑으로 진입했다.
예상대로 그 안엔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바로 긴장해야 했다.
“설마 여긴…….”
“아마 광신도들의 본거지였겠죠. 근데 바쁘게 떠난 것 같네요.”
조금 곤란했다.
설마 ‘그’를 데리고 벌써 떠났으면 안 되는데.
“일단 이동합시다.”
강서준은 마탑에서도 깊숙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을 찾았다. 무너져 내린 기둥 사이로 교묘하게 감춰진 입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강서준은 깃발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꿈에서도 이 깃발을 봤었거든요.”
“깃발요?”
“역시 마탑의 깃발이었네요.”
어두컴컴한 외길을 따라 내려가 보니 죄인들을 가둬 두는 여러 개의 철창이 나타났다.
당장 이곳에 갇힌 죄인은 없었다.
오직 한 명만이 구석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데려가진 않았네.’
시체처럼 엎어져 있는 남자.
강서준은 미간을 구기며 철창으로 다가갔다.
“아이크 씨…….”
강서준의 질문에 아직 시체가 되질 못한 아이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린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봤다.
“……케이?”
“같이 갑시다. 데리러 왔어요.”
***
낙원으로 옮기고도 아이크는 긴 시간을 수면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고문을 받은 여파인지 체력이 도통 회복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관리자일까요?”
“……글쎄요. 당사자가 눈을 뜨질 않으니.”
“흐음.”
다행히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이 되니, 아이크는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강서준은 한달음에 이루리를 데리고 아이크에게 향했다.
‘이루리라면 거짓은 간파해 주겠지.’
아늑하게 꾸며진 낙원의 한쪽 방 안에는 아이크가 있었다. 꽤 원망스런 표정을 짓고서.
“기껏 정보를 알려 줬더니 아직까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쯤 블랙 그라운드에 갔어도 벌써 갔어야 하는데…….”
“당신을 살리고 있는데요.”
“그게 중요해요?”
“네. 아무래도요.”
답답한지 괜히 짜증만 내던 아이크는 이윽고 고통에 기침을 뱉었다. 회복 중이라 그런지 다행히 각혈하진 않았다.
“킬 스위치…… 기어코 놈들은 스스로 정보를 알아내서 블랙 그라운드로 향했어요. 케이 님. 아직도 모르겠어요?”
“뭘요?”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다고요!”
아이크가 불안하게 소리칠 때마다 플레이어들 사이로도 그 불안이 전염됐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아이크는 문득 강서준을 보며 말했다.
“뭡니까? 왜 웃죠?”
“미안해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관리자라고 해도 우리랑 다를 게 없는 게 신기해서요.”
“그럼 관리자라고 뭐 특별한 줄 알아요?”
“어? 진짜 관리자가 맞나 보네.”
떠봤는데 바로 걸려들었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강서준은 옆에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루리를 확인하고, 다시 아이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럼 됐습니다. 슬슬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죠.”
“……뭡니까?”
“일단 블랙 그라운드는 걱정 마세요. 아무렴 당신을 찾는다고 그쪽에 아무런 대비를 하질 않았을까.”
강서준은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보다 아이크 씨.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
“일단 진실요.”
강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대체 뭡니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이 세계가 뭔지 설명해 줬으면 합니다.”
솔직히 관리자를 만나면 가장 묻고 싶던 질문이었다.
그에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즐겨 하던 게임이, 어느 순간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
어째서 세계가 이렇게 된 걸까.
‘현실이 됐음에도 백신, 바이러스, 롤백, 백도어, 버그…… 게임 요소는 전부 갖추고 있고 말이야.’
과연 ‘게임 속 세계’에 그가 빠진 건지, 아니면 그의 현실이 게임이 되어 버린 건지.
분간도 되질 않는다.
아이크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114번째로 실패해서 멸망한 세계니까.”
“……114번째 실패요?”
“아는 거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사는 지구는 115번째로 시작된 드림 사이드란 걸.”
강서준은 헛웃음을 삼켰다.
“……2 아니었습니까.”
“그야 당신네들 기준이고.”
문득 이곳으로 들어올 적 0114번 채널로 연결됐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구는 0115번 채널이었다.
“케이 님, 아니 강서준 씨.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 세계는 단순하고 복잡합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이 이상 말하는 건 제아무리 섭종 된 곳이라고 해도 시스템에게 걸립니다.”
“네?”
“전 아직 소멸할 생각 없으니까.”
여태 한숨을 참던 그는 강서준을 보면서 뭔가를 떠올렸는지, 대뜸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잘됐네요.”
“네?”
“강서준 씨. 당신에게 정식으로 의뢰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음……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퀘스트’입니다.”
눈앞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터무니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아이크가 관리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
분류 : ?
난이도 : ?
조건 : 당신은 멸망한 세계에 있습니다. 이 일은 당신만이 해낼 수 있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세요.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
제한 시간 : ?
보상 : 채널 #0115로의 진입
실패 시 : 사망
+
일단 주목할 점은 보상이다.
‘0115 채널로의 진입?’
강서준이 사는 지구는 관리자의 말마따나 115번째 공략이 이뤄지는 곳.
0115채널로 불린다.
즉.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행여나 당신이 백도어를 통해 넘어왔을 때를 대비해서 진즉에 준비해 뒀어요.”
“꽤 철저하군요.”
“아무렴 115번째 실패를 만들 순 없으니까요.”
강서준은 말없이 아이크를 바라보며 호흡을 정돈했다. 아직 보상으로 기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게 있었으니까.
“요구 조건은 뭐죠?”
“간단해요. 강서준 씨가 저를 도와 이 세계의 데이터를 지구로 백업시켜 주면 됩니다.”
“……백업요?”
강서준이 미간을 구기며 반문하자, 아이크는 더더욱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강서준 씨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당신을 비롯하여 플레이어 전원을 지구로 돌려보내 드리죠. 약속합니다.”
그 말에 얘기를 듣고 있던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꿈에도 꾸질 못하던 복귀가 가시화되는 순간이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서준은 침착한 태도를 고수했다.
“플레이어 전원 말이죠.”
“네. 그럼 의뢰는 수락한 걸로 알고…….”
아이크가 대뜸 손부터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메시지부터 나타났다.
[퀘스트를 수락하겠습니까?] [Yes / No]결정을 강요하듯 깜빡이는 메시지.
강서준은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레 창을 옆으로 밀어 뒀다. 그대로 아이크를 향해 의문을 던졌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세요.”
“……말했듯 백업입니다. 제가 낙원을 데이터화하여 강서준 씨에게 건네면 당신은 그걸 보관하고 계시다, 나중에 기회가 될 때 0115채널에 백업해 주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줘요. 너무 두루뭉술하잖아요.”
강서준의 언사가 약간 언짢았을까. 옆에서 듣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한 게 보였다.
상대가 관리자라 다들 겁먹은 듯했다.
나한석조차 굉장히 조심스러운 눈치였고, 백승수나 김시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구석에서 존재감이라곤 단 1도 없는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으니까.
다행히 아이크는 불쾌하단 표정은 아니었다. 대신 선명한 어조로 강서준을 향해 말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침 당신은 ‘도깨비의 왕’이 되어 있더군요. 벌써 전용 장비들도 모았고.”
“갑자기 그건 왜…….”
“당신의 도깨비감투 속의 일정 공간만 빌리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식 업데이트가 진행되는 1년 차까지만요.”
관리자 아이크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답이 됐습니까? 시간이 없어요. 얼른 움직여서 킬 스위치를 찾아야…….”
“결정했습니다.”
강서준은 아이크의 말을 잘라먹으면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거절합니다.”
“네?”
“다시 말해 줘요? 전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겠다고요.”
예상하지 못한 말일까.
벙 찐 아이크의 주변으로 플레이어들이 비슷한 심정으로 강서준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