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56
◈ 156화
‘부득이한 선택’이란 게 있다.
마지못하여 하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게임이 되어 몬스터와 싸워야 했듯, 추락하는 달을 막기 위해 우주선에 탑승해야 했듯.
부득이한 상황에서 인간은 아마 한정된 선택지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선택지만 있다면 그나마 덜한 쪽을 골라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원인을 따지자면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약하니까.’
해서 지금도 그렇다.
“강서준 씨…….”
최하나가 왜곡으로 이동된 곳은 하필 강력한 사이보그가 천지에 깔린 중층부.
그녀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레벨 250을 넘나드는 사이보그 사이에 둘러싸여 선택을 강요받았다.
아니, 그들에겐 ‘정령’이란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기계성의 퀘스트를 공략하느냐, 아니면 그 자리에서 집중포화를 받아 목숨을 잃느냐.
그들의 선택은 부득이했다.
강서준이 물었다.
“그 목걸이…… 장식은 아니겠죠.”
최하나는 유난히 자신의 목을 감싼 차가운 기기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네. 보다시피 개목걸이죠.”
“흐음…….”
그가 침음을 흘리는 사이, 최하나의 눈앞으로는 또 하나의 부득이한 선택지가 나타나 있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분류 : 시나리오
난이도 : B
조건 : 당신은 기계성을 망가트리는 정령 일당을 발견했습니다. 적들을 섬멸하여 본인의 쓸모를 증명하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이내
보상 : 기계성의 보안 등급 상승
실패 시 : 사망
* 기계성은 기계 공화국의 핵심적인 기계입니다. 파괴 시, 퀘스트의 난이도는 대폭 상승합니다.
* 현재 기계성의 파괴 상태는 2.2% 미만입니다.
+
아마 강서준도 정령에게 퀘스트를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폭탄 목걸이’를 착용하질 않는 걸 보면 강제성을 가지진 않은 듯해서 다행이지만.
최하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발목만 잡네요.”
“……뭘요. 게임이 원래 그 모양인 걸 누굴 탓하겠습니까.”
구태여 사정을 설명하질 않아도 강서준은 최하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그녀가 앞으로 할 행동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설렁설렁 하진 못해요. 그 또한 알아채는 것 같거든요.”
“알아요. 전력으로 오세요.”
최하나는 강서준에게 받은 마탄의 라이플을 꺼내어 장전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지금의 나는 강서준 씨의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가 되어 싸웠던 기억은 생생했다. 5개월의 공백 따위는 느껴지질 않는 강함.
강서준은 여전히 강했다.
그 때문에 호승심이 절로 일어났다.
제정신일 때 전력으로 싸운다면, 과연 그를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까. 그녀의 수련도 가볍진 않았다.
최하나는 애써 머리를 털어 상념을 지웠다.
‘뭐가 됐든 퀘스트의 실패 페널티가 사망이야. 제대로 싸우질 못한다면 이 목걸이는 터지겠지.’
그러니 최선을 다해 강서준을 공격해야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기계성의 퀘스트를 받아야 했던 플레이어들도 대개 그럴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죽고 싶지 않으면 동료를 향해 칼을 빼어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의 호승심과 민폐라는 미안함이 뒤엉킨 가운데.
강서준과 최하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
강서준은 그들을 포위한 사이보그, 이어서 일련의 플레이어까지 한눈에 담았다.
그리고 바로 납득했다.
‘골치 아프게 됐네.’
드림 사이드에서 B급 던전은 몬스터의 지적 능력도 상당 수준으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꽤 주요하게 작용하는 게 바로 ‘우호도’란 시스템이었다.
상급 정령 올라클처럼 입장 자체가 난처한 쪽이 아니라면, 쉽게 외부인을 그들의 편으로 받아들이질 않는 게 B급 던전의 특징이라면 특징.
기계성의 진정한 동료가 되려면 그에 따른 ‘우호도’를 쌓을 필요가 있다.
‘쌓는 법은 간단해.’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저들이 원하는 걸 몇 가지 수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저들의 시나리오에 합류하게 된다.
문제는 그 적이 강서준이라는 것이고.
‘저딴 식으로 목에 족쇄부터 채워 놓고 시작한다는 거겠지.’
류안으로 보건대 저 목걸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최하나가 ‘개목걸이’라고 비유한 걸 보면 선물도 아닐 것이다.
‘안쪽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뭉쳐 있어. 설마…… 폭탄인가.’
기계 공화국이란 이름을 가진 던전이었다. 등장하는 적들은 기계충부터 사이보그, SF 영화에 출연할 법한 놈들이 대다수였다.
폭탄 목걸이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참담한 얼굴로 총을 장전하는 최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죽이겠다는 듯 눈에 살기를 담았다. 사이코패스가 됐던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위험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저격총’을 들고 있으니까.
그녀의 진가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무엇보다 너무 침착해졌어. 아마 본래 실력의 100%를 발휘할 거야.’
저 폭탄 목걸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는 몰라도, 최하나가 진심을 다해 그들을 공격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전력의 최하나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도 전부…….’
던전에 난입한 플레이어 대다수가 기계성의 포로가 된 것이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김영훈을 바라보는 아리수 길드원도 눈에 훤했다.
김영훈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갑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고, 최하나는 일순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순간적이지만 시야에서 놓친 것이다.
[스킬, ‘위기 감지(A)’를 발동합니다.]채애앵!
정확하게 측면을 노리고 날아온 마탄!
날아오는 궤도 따위는 없다.
‘공간이동탄…… 진심이구나.’
이를 악문 강서준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수 개의 마탄을 튕겨 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마탄의 사수 ‘클라크’가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저격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모른다는 것.
그를 중심으로 빗발치는 총알 세례는 사방을 점하고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의 흐름에 말리면 안 돼. 어떻게든 최하나부터 무력화시켜야 해.’
머릿속으로 여러 방법이 스쳐 갔다. 하지만 당장 통용시킬 방법을 찾긴 요원했다.
‘베스트는 EMP칩을 활용하는 건데.’
EMP칩은 본래 아르곤이란 감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찾아낸 퀘스트 아이템이다.
그 성능이라면 ‘폭탄 목걸이’쯤은 간단히 무력화시키지 않을까?
문제는 그게 여기서 쓰일 게 아니라는 거다.
‘당장 던전을 공략할 게 아니라 굳이 써야 한다면 쓸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었다.
최하나 한 명을 무력화시켜도, 그 이외의 플레이어들은 폭탄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질 않은가.
반면 EMP칩은 일회용이다.
“강서준 씨…… 방심하지 말라니까요.”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를 뒤따라 그를 향해 빗발치는 마탄을 볼 수 있었다.
터무니없지만 어느덧 그의 주변으로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마탄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래서 최하나 씨랑 싸우는 건 피곤했었는데.’
게임에서도 그랬다.
클라크를 상대할 때는 늘 그의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키보드를 마구마구 눌러 줘야 한다.
수시로 쏘아지는 총알과, 뒤늦게 도착하는 총알,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는 총알…….
무수한 총알이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상황에서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장비 ‘도깨비 왕의 감투’의 전용 스킬, ‘이매망량’을 발동합니다.]애써 영혼을 휘감은 강서준은 총알 세례를 강제로 뚫기로 했다. 그리고 류안으로 주변의 거센 흐름을 모조리 읽어 들였다.
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면서 돌진을 감행한 건 그때.
[스킬, ‘마력 집중(D)’을 발동합니다.] [스킬, ‘초상비(F)’를 발동합니다.]고속으로 이동한 강서준이 나타난 곳은 바로 최하나의 뒤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느리게 쫓아왔고, 강서준은 그 틈에 재앙의 유성검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폭탄 목걸이’를 노려봤다.
파지지짓!
재앙의 유성검에 살짝 닿은 폭탄 목걸이로부터 심상치 않은 소음과 파동이 일어났다.
강서준은 화들짝 놀라며 검을 뒤로 뺐고, 동시에 그를 향해 쏘아지는 마탄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목걸이 자체를 공격할 순 없겠어.’
최하나도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시도해 봤어요. 이거 직접 공격하면 터지겠더라고요.”
“……번거로운 물건이네요.”
한숨을 삼킨 강서준을 그를 쫓아 날아오는 마탄을 다시 격추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장 이 전투에 사이보그들이 관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플레이어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증명 과정 같은데…… 불행 중 다행이지 뭐.’
사이보그까지 감당해야 했다면 안 그래도 열세였던 강서준 쪽은 진즉에 파멸했다.
타타타타탕!
상당한 소음과 함께 강서준은 어느덧 주변이 새빨갛게 물든다는 착각을 깨달았다.
번 블러드가 가미된 핏빛 마탄.
“강서준 씨. 누누이 말하지만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진심을 느낀 강서준은 이를 악물고 이매망량을 극성으로 발동했다.
도깨비갑주의 외갑이 두께를 늘렸다.
곧 폭격이 시작됐다.
쿠쿠쿠쿠쿵!
문제는 감투 속에 숨겨 둔 영혼의 개수가 이젠 얼마 남질 않았다는 것이며.
종종 파이어볼을 운영해서 원거리 격추를 하더라도 최하나의 마탄보다는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결국 이매망량은 구멍이 뚫렸고, 그의 몸에도 구멍이 송송 뚫려 피가 주륵 흘렀다.
“크윽……!”
강서준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마탄의 세례에서 벗어났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결국 최하나를 쓰러트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
그때 강서준의 시야에 수호 길드의 탱커 ‘박동수’와 진리의 추구자의 ‘고민준’을 상대로 싸우는 ‘김영훈’이 보였다.
아리수 길드의 ‘김영훈’.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방법이다. 성공만 한다면 이 상황을 당장 뒤집을 수 있으리라.
“그럼 일단…….”
강서준은 다시금 그의 주변을 감싸는 마탄을 확인하며, 그가 가진 비장의 스킬을 하나 꺼냈다.
[스킬, ‘분신(S)’을 발동합니다.]눈앞에 생성된 건 두 개의 분신.
도합 세 명의 강서준은 쏘아지는 마탄을 베어 나갔다. 도깨비갑주 대신 분신이 마탄에 짓이겨 터져 나갔다.
최하나가 말했다.
“……이거 데자뷔가 느껴지네요.”
강서준은 쓰게 웃으며 넝마가 된 두 분신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분신들이다 보니 작전을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떠올린 생각은 같다.
“나머진…….”
두 분신은 마탄을 튕겨 내며 최하나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도 응수하여 더욱 힘을 쏟아 냈지만 단번에 두 명을 상대하느라 잠깐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분신은 내 전력을 못 따라와. 최하나 씨도 금세 파악해 내겠지.’
아주 잠깐일 것이다.
그녀라면 분신 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겨 낼 것이며, 다시 강서준을 향해 날카로운 총격을 이을 것이다.
강서준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깐이면 충분해.’
강서준은 바로 초상비를 발동하여 다른 쪽 전장으로 내달렸다.
수호 길드의 박동수가 김영훈을 향해 방패를 휘두르고 있기에, 그곳에 난입하며 거칠게 그 큰 덩치를 멀리 튕겨 내 버렸다.
“크허억!”
한 번의 충돌로 나자빠진 박동수를 일별하고, 마법사인 고민준에겐 파이어볼을 던졌다.
실드로 막았지만 그 뒤를 따라 나타난 강서준의 주먹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민준도 한쪽으로 멀리 나자빠졌다.
“가, 강서준 씨?”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피로 칠갑한 김영훈은 황망한 눈을 떴다.
강서준은 그를 향해 말했다.
“헌혈…… 당신 헌혈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