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71
◈ 171화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를 놓은 듯 정갈한 옷차림.
뻗친 머리카락 없이 올곧게 정돈된 인상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듯했다.
성녀 모르핀.
정확하게는 미국의 기업 ‘디스 플레이스’의 대표이사 마일리는 젝이 준비한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서준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이야.’
사실 강서준도 슬슬 성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그가 ‘케이’라는 건 공공연하게 밝혀진 사실이니까.
지난 진 제국의 영상부터 나도석을 상대로 싸워 이긴 일까지. 그의 능력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증명되어 있었다.
성녀를 만날 조건은 성립된 것이다.
‘수고를 덜었군.’
어쨌든 강서준은 눈을 빛내며 마일리의 의중을 파악해 보고자 했다.
이렇듯 밤늦게 찾아올 정도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다.
강서준은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 나지막이 물었다.
“왜 절 찾으신 거죠?”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강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실례인 줄 알고 찾아왔습니다.”
고가의 통역기라도 착용했는지 그녀의 말투에선 어눌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한국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능숙한 억양이었다.
그나저나 긴급히 상의할 일이라고?
천외천답게 오픈 초기부터 상당한 두각을 드러내며 이미 정상에 가까운 자리에 선 그녀였다.
가지고 있던 사업체를 더욱 성장시켜 포탈 던전까지 장악하질 않았던가.
성녀라는 특수성, 기업의 대표라는 위치…… 이미 모든 걸 가진 듯한 그녀가 상의할 일이라.
강서준은 일단 그녀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마일리는 눈을 빛내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케이 님은 이 던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던전이라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요.”
B급 던전, 미지의 땅.
몬스터도 NPC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포탈만이 존재하는 특수 던전.
드림 사이드 1에서도 끝내 미스터리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저 플레이어를 위한 편의 시설로만 생각해 왔다.
그건 2에서도 같은 줄 알았다.
여긴 그저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준 안배라고.
하지만 마일리가 저리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기야 편의 시설일 리는 없었나. 드림 사이드가 그리 친절한 게임도 아니고 말야.’
정답은 결국 ‘밝혀내지 못한 던전’이라는 거겠지. 마일리는 강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녀만의 가설을 늘어놓았다.
“저도 처음에 단순히 허브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허브(Hub).
어떤 신호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내보낼 수 있는 장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포탈 던전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걸 떠올려 보면 꽤 정확한 비유였다.
‘택배에서도 자주 쓰이는 단어지.’
곤지암 Hub, 옥천 Hub……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하면 한 번쯤은 Hub를 경유하질 않던가.
“……일리 있는 얘기네요. 이곳도 결국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한 경유지 같은 역할을 하니까.”
“네. 근데 문제는 이곳이 단순한 경유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마일리는 한숨을 쭉 내뱉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이곳에 열린 문이 지구로만 연결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간을 좁힌 강서준을 향해, 마일리는 더욱 세세한 정보를 풀어냈다.
“극비 정보입니다만, 최근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이곳에 도합 15개의 포탈이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호주…… 인도, 한국. 다양한 국가에 연결된 포탈들이었다.
“한데 지구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포탈은 14개로 확인됐어요. 이제 슬슬 감이 오시나요?”
14개의 입구와 15개의 출구.
강서준은 마일리가 하는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확신하기 전에 떠오른 의문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못한 포탈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 아마존 같은 오지에 만들어졌다면…….”
“아뇨. 지구로 연결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확신하죠?”
“연결된 장소가 적혀 있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이곳으로 들어올 때에도 시스템 메시지는 친절하게 ‘출입구는 광명동굴’이라고 말해 줬다.
즉 15번째 포탈은 지구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
마일리는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추측일지도 몰라요. 제대로 된 명칭이 적혀 있지도 않았고, 아직 저희들은 그곳으로 들어가 보질 못했으니까요.”
“그건 무슨 소리죠?”
“시스템이 막더군요. 플레이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요.”
“……시스템에 의해 제한된 구역.”
확실히 수상했다.
플레이어의 접근을 막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 퀘스트였다.
공략해야 열리는 길.
어쩌면 포탈 던전의 비밀을 알아차리려면 그 포탈을 먼저 넘어가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마일리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그 포탈을 통해 누군가가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겁니다.”
“……네?”
“일단 포탈을 숨기고 상황을 알아보려고 경계병을 세워 뒀는데, 모두 끔찍하게 당했더군요. 그것도 등 뒤에서 날아온 공격에 의해서 죽었어요.”
경계병들은 포탈을 등 뒤로 두고 경계를 펼쳤다. 포탈을 넘은 누군가가 그들을 공격한 것이다.
“여러 명의 발자국이 바깥으로 나 있고, 명백한 침입 흔적들이 남아 있었어요.”
강서준은 절로 경각심이 떠올랐다. 닫혀 있을 줄만 알았던 던전에서 나타난 의문의 집단이라.
만약 ‘던전 속의 던전’이었고, 그곳에서 나타난 놈들이 ‘몬스터’라면 어떨까.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면?
‘골치 아파진다.’
여태 놈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고, 당연히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을 곳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놈들이 지능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강서준의 고민은 길게 이어질 것도 없었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듯 마일리가 바로 무언가를 물어 왔기 때문이다.
처음 들었을 때, 조금 터무니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강서준 씨는 #0116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0116……?”
“포탈에 적혀 있는 장소의 이름입니다. 해독을 하고 싶지만 정보가 너무 빈약하여…… 케이 님은 뭔가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강서준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0116.
그가 이 숫자를 모를 리가 없다.
“뭔지는 몰라도 저희는 하루빨리 관련 포탈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정말 그곳이 던전이고, 몬스터가 존재한다면…… 반드시 찾아내 죽여야 해요.”
성녀의 말에 강서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추측은 강서준이 종전에 했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냐면 그곳은 ‘던전’이 아닐 테니까.
‘……미리 예상했어야 했어. 드림 사이드 1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었으니까.’
강서준의 추측은 멀리 나아갔다. 현시점에서 국한시키질 않고 사고를 유연하게 늘렸다.
그래.
현실은 드림 사이드가 됐다. 그리고 그의 입장도 0114 채널에서의 NPC들과 이제 다를 게 없어졌다.
그렇다면……?
강서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일리가 말한 포탈은 던전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야. 이다음 세계…… 다음 채널로 연결된 거지.’
강서준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0116 채널로 연결된 문이야.’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필연적이었다. #0114 채널에도 어느 날, 플레이어의 로그인이 시작됐으니까.
즉, 마일리가 말한 정황은 #0116 채널의 플레이어가 이곳으로 진입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근데 왜 이곳에만 문이 생긴 거지?’
정말 채널이 연결됐고,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이들이 이 세계로 넘어왔다면, 고작 포탈 던전 하나에만 문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드림 사이드 1에서의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있는 문은 무궁무진하게 많았었으니까.
문이 하나만 생겨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문이 하나만 열린 것도 시스템에 제약을 받은 거라면? 흐음, 아직 저들이 전 세계로 로그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강서준은 포탈 던전에 대한 정의를 아예 새롭게 내릴 수 있었다.
몬스터도, NPC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곳. 그저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포탈만이 가득한 장소.
여긴 편의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드림 사이드가 게임이고, 그게 다음 세계에도 이어지는 특징이라면.
이곳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땅이다.
‘베타테스트를 위한 땅일지도.’
베타테스트.
이른바 게임이 시작되기 이전에 사전 플레이어가 방문해서, 게임의 콘텐츠를 즐기며 각종 버그나 필요한 내역들을 피드백하는 일.
생각해 보면 드림 사이드 1에서도 베타테스트 기간을 거쳤다.
비록 그가 테스터에 선정되진 못해 직접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아마 이곳과 비슷한 느낌은 아닐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지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한정적인 상태.
‘저들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도록 시스템의 제약에 묶여 있다고 가정해 보면 더욱 간단한 일이야.’
그들에게 있어 이동하지 못하는 포탈은 그저 개발되지 않은 땅처럼 비춰질 것이다.
몬스터가 없는 이유?
사실 저들의 입장에선 강서준과 같은 이들이 몬스터나 NPC나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한편 마일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해서 정식으로 의뢰하고 싶습니다. 케이. 당신이 이 던전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조사해 주셨으면 해요.”
***
마일리는 정중하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역시 사람은 직접 마주하기 전엔 모르는 걸까.
게임 속에선 그토록 사이코패스 같은 플레이를 즐겨하던 그녀였지만, 현실에선 전혀 상반된 이미지가 확고하게 느껴졌다.
버젓이 잘나가는 기업 대표.
발 빠르게 움직여 포탈 던전을 장악했고, 각종 사업을 성공시킨 당사자답게 무척이나 지적인 이미지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런 성녀를 뒤통수를 친 지상수가 새삼 대단하네.’
비록 게임이라 해도 이 정도 사업 수완을 가진 그녀에게, 뒤통수를 친 초딩이었다.
하기야 그랬기에 지금의 지상수가 완성됐을 것이다. 지상수도 마일리 못지않게 성공을 거둔 사업자였으니까.
‘어쨌든 이번 일만 마무리해 낸다면 아크의 일이고 뭐든 돕겠다고 했으니.’
강서준은 쓰게 웃으면서 마일리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옷차림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링링…… 넌 어떻게 생각해?”
-흐음.
사실 링링과의 전화는 끊질 않았다. 마일리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경우엔 그녀의 조언이 더욱 도움이 될 테니까.
‘마일리도 이미 아는 눈치였지만.’
링링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 불확실한 정보가 너무 많아.
그녀도 나한석 대위를 통해 어느 정도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들은 뒤였다.
해서 그녀도 강서준과 비슷한 추측을 했다. 어쩌면 이곳은 베타테스트를 위한 땅일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하지만 역시 확신하진 못해.’
모든 게 추측이고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검증하지 못한 정보는 소문만도 못한 법.
강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직접 조사하는 수밖에 없겠어.”
결국 이 던전에서 해야 할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그곳이 던전이라면 공략해야 할 것이고.
만약 정말 다음 세계로 연결된 것이라면 대책부터 세워야 할 것이다.
-케이.
“응?”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링링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강서준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가 할 말을 미리 유추해 냈다.
새삼스럽지만 드림 사이드 1에서 황제나 호크 알론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들도 처음엔 이런 기분이었겠지.
‘이곳으로 다른 세계의 플레이어가 넘어왔다면…….’
링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우리 같은 NPC와 다르게, 적어도 세 번의 목숨을 보장받는 ‘불사의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