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186
◈ 186화
입단식이 끝나자, 강서준은 동기생이 된 기사들을 따라 배정된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렬로 늘어진 목제 침상.
가는 길목마다 상급 기사들이 괜히 윽박을 질러 대니, 괜한 PTSD로 인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기야 판타지 세계관에서도 ‘기사단’이다. 현대에서 비교할 만한 단체는 단 하나였다.
‘30살에 재입대라니…….’
물론 한국에서의 군 입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알론 제국에서의 기사란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등용문. 어딜 가더라도 성공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었다.
꽤나 앞날이 밝은 직종일 것이다.
그래서 다들 상급 기사가 겁을 주더라도 앓는 소리 하나 내질 않았고, 오히려 잔소리를 즐기는 놈마저 있을 정도다.
아무렴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왔을 테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완전한 외부인인 강서준만이 괴로울 뿐이다. 빨리 스킬북을 독파해 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러려면 황실기사단에 입단하는 게 최선이겠지.’
불행 중 다행인 건, 이곳에선 일과 시간 이외엔 적당한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강서준은 그 시간을 철저히 이용하기로 했다.
“후우…….”
낮게 호흡을 내뱉고, 쥐고 있는 검의 끝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거짓말같이 눈앞으로 영상이 재생되더니 그에게 움직여야 할 방향을 알려 줬다.
A급의 제국검술.
강서준은 기사 ‘루디’의 잔상을 따라서 몸을 움직였다. 시스템의 가이드라인이 검술에 문외한인 강서준을 향해 방향을 설정해 준 것이다.
참 친절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이드라인을 실제로 따라 하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가이드라인이 제공된다고 그걸 단번에 따라 한다는 건 무리였다. ‘재앙의 유성’에서 나도석은 끝내 마법을 쓰질 못한 것과 같다.
막말로 어느 날 갑자기 생판 모르는 기술을 알려 줄 테니, 그걸 따라 하라고 한들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든 연습은 필요한 법이다.
‘적어도 가이드라인을 보지 않고도 검술을 활용할 줄은 알아야겠지.’
제국검술은 알론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익히는 표준에 해당하는 검술이다.
단연 멜빈 황제도 익혔을 것이다.
어쩌면 ‘태산 가르기’는 ‘제국검술’에서 파생되어, 황제만의 경험을 녹여 만든 기술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즉, 근간이 되는 검술이라면…….
‘익혀서 나쁠 게 없다.’
게다가 황실기사단의 입단 테스트가 일주일 남았고, 강서준은 그곳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스킬북을 독파하려면 저자인 황제에게 접근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근데 입단 테스트를 보는 기사가 표준이라는 ‘제국검술’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면?
의심을 사기 쉬운 행동이다.
신뢰를 쌓아서 황제의 곁을 차지해야 하는 입장에선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다.
‘일주일 안에 마스터한다.’
무엇보다 해내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변신한 루디 돌포스는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스킬이 있었으니까.
[스킬, ‘간파(S)’을 발동합니다.]가이드라인의 영상이 더욱 세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스킬을 보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도 그 옆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저변의 이유마저 파악해 내는 S급 간파의 힘.
이 힘이면 충분히 해낼 것이다.
[스킬, ‘제국검술(A)’을 발동합니다.]임시 스승인 루디의 검형을 따라서 이리저리 신명 나게 칼춤을 췄다.
역시 기사의 몸이다.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니, 검술을 체험하는 데엔 모자람이 없었다. 남은 건 그저 머리에 때려 박아 외우는 것뿐이다.
아쉬운 건 시간이다.
“……일주일 정도 안 자도 안 죽겠지?”
특훈의 시작이었다.
***
문제는 이튿날 발생했다.
“임무는 알페온 하수처리장에 발생한 악취의 근원을 처치하는 것이다. 각 조별로 일정 구역을 탐사하고, 수상한 점이 있으면 빠짐없이 보고하도록.”
신임기사인 루디를 비롯한 동기생에게 주어진 첫 임무.
하수처리장을 탐색할 뿐인 별 볼일 없는 미션에 다들 아쉬움을 토로하는 눈치였지만, 강서준만은 그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알페온이라고……?’
강서준은 그곳을 알고 있었다.
어찌 잊을까.
도시 ‘알페온’은 그곳에 발생한 하나의 던전에 의해 고작 한나절 만에 몰락한 도시인데.
‘알페온의 저주’라고 하던가…….
관련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폐허가 된 알페온 지역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던 덕에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여길 왜?’
황실기사단에 입단하여 관련 스킬을 습득하는 게, 이번 퀘스트의 목적이 아니었나?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강서준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B조는 나를 따라오도록.”
신임기사단은 반나절을 걸어 알페온 하수처리장에 다다랐다.
녹슨 철문 너머로 지독한 악취와 함께 불빛 한 점 보이질 않는 어두운 하수처리장이 있었다.
횃불을 집어 든 기사들은 하나둘 하수처리장으로 진입했고, 그중 B조에 속한 강서준은 한껏 의지를 불태우는 선임기사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는 본인을 ‘에일’이라 소개했다.
“애송이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하수처리장 임무라고 다들 대충인 모양인데, 큰 착각이야.”
선임기사 에일.
본인 말로는 귀족 출신이라 했지만, 행색만 봐서는 ‘몰락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강서준은 선임기사 에일의 뒤를 따르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묘하게 그와 닮은 사람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장기용이 생각나네.’
에일은 말이 많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의 사연부터 시작하여 살아온 이야기, 그의 TMI 폭격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가 선임기사여서 말을 끊을 수도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자잘한 임무가 쌓여야 대성하는 것이다. 자고로 기사란 주어진 임무를 가려선 안 되는 일이지. 내가 신임기사였을 때다. 그때는 말이지. 이런 일을 감사히 받았어. 나 때는…….”
그렇게 한참을 TMI를 늘어놓던 에일이 발을 멈춘 건, 하수처리장으로 진입하고 약 30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린 슬라임이군. 다들 주옥같은 강의를 들어서 알겠지만 이놈은 자칫 잘못 공격하면 분열하는 특징이 있다. 일격에 핵을 찌르는 게 중요하지.”
에일은 수려한 검술을 뽐내며 그린 슬라임을 일격에 양단했다. 핵까지 갈랐는지 몬스터는 그대로 소멸했다.
그래도 선임기사라는 걸까.
장기용처럼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실력도 꽤 출중한 편이다. 말끔하게 그린 슬라임 무리를 처치한 에일은 신임기사들에게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이 에일 님과 함께라는 사실이 감격스럽겠지. 하나 긴장을 놓진 말아라. 임무는 이제 시작이니!”
하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치고는 이후의 행동은 대단히 설렁설렁 대충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린 슬라임’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린 슬라임의 레벨은 고작 200을 넘긴 정도에 불과한 저급의 몬스터.
최소 300레벨을 넘어서야 입단할 수 있는 알론 제국의 기사단에 비해선 그 수준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긴장을 할 수조차 없는 환경이었다.
물론 강서준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역시…… 이곳이 발생지였나.’
강서준은 하수처리장의 벽면에 붙은 이물질, 바닥에 흐르는 하수와 섞인 것들…… 갖가지 정보를 규합해서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긴 위험해.’
살짝 흘겨본 에일의 레벨은 대략 300 중반으로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신임기사보다는 강할 것이다.
하지만 ‘알페온의 저주’를 견뎌 낼 수준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언뜻 보이는 깊고 어두운 터널은 사실 맹수의 아가리와 같다.
이대로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기사들의 발걸음을 멈출 권한 따위는 없었다.
“저, 에일 님. 드릴 말씀이…….”
“건방지게 더러운 종자가 위아래도 모르고 말을 거는 것이냐?”
“……아닙니다.”
에일은 상당히 신분을 따지는 귀찮은 성정의 인물이었고.
결국 그의 의견은 섣불리 묵살되면서, 하수처리장으로의 진입은 긴장감 없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일시에 터졌다.
“……어어?”
누군가의 의문과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옆으로 잔잔하게 흐르던 하수가 갑자기 요동쳤다.
에일이 바로 외쳤다.
“단순한 지진이다! 마력을 하체에 집중하고 버티도록! 낙하하는 돌을 조심해라!”
아마 훌륭한 대처였을 것이다.
말 많고, 신분을 따지는 귀찮은 성격, 여러모로 피곤한 타입이라도 선임기사로의 재능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일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은 문제였다.
강서준은 멀리 어둠 너머로부터 다가오는 진한 마력의 향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올 게 오는구나.’
알페온의 저주.
한 도시를 어둠 속으로 파묻어 버린 전대미문의 사건.
이른바 ‘블랙아웃’이 다가오고 있었다.
***
세상이 어둠에 먹힌다면 어떤 기분일까. 모르긴 몰라도 답답하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블랙아웃.
강서준이 이 현상을 게임으로 겪었을 때도 상당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한 치 앞도 안 보였으니까.’
모니터엔 빛이 들어왔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만이 캐릭터의 생존 유무를 알릴 뿐이었다.
츠츠츳……!
한데 게임으로 겪었을 때보다 직접 체험하는 블랙아웃은 훨씬 암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각이 완전히 까맣게 물든 건 기본.
청각과 후각, 촉각마저 마비됐다.
‘서 있는지 앉아 있는 걷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애매하군.’
이 현상이 ‘블랙아웃’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그 기이한 감각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은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이고 있을까.
“후우…….”
분명 숨을 내뱉는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떠한 느낌이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괴리감은 상당히 불쾌했다.
‘얼른 빠져나가야겠어.’
다행히 그는 블랙아웃을 벗어날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비록 게임에서 겪은 일이지만 같은 종류니, 풀이 방법도 같을 것이다.
‘아이템을 찾아야 해.’
그 뒤로 강서준은 어둠 속을 계속 헤맸다. 사방을 더듬으며 오직 단 하나를 찾고자 했다.
손끝의 감각도 없으면서 계속 허공을 휘저었고,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만 했다.
불현듯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영원히 찾질 못하면 어쩌지?
나중에 관련 NPC들에게 들어서 안 얘기였지만, 블랙아웃에 당한 이들 중 대다수는 ‘자살’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허공을 무한으로 걷는 기분.
계속해서 찾아오는 의문은 굳센 의지를 가진 기사조차 견뎌 내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아마 게임을 플레이할 뿐인 과거의 강서준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 끝은 있는 걸까?
숱한 의문은 계속해서 떠올랐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의문은 강서준의 뇌리에 은연중에 박혀 있던 한 질문도 같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했던 생각이었다.
-114번이나 실패한 공략이야. 과연 내가 성공해 낼 수 있을까?
드림 사이드가 운영된 건 정확하게 114번이다. 그중 강서준만 한 플레이어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어차피 멸망이 결론인 세계가 아닐까.
배드 엔딩만이 존재하는 게임이라면?
“……닥쳐.”
강서준은 떠오르는 생각을 짓씹어 버리고 더욱 강렬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의문은 계속해서 그를 찔러 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포기하면 편해.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고?
-쥐뿔도 없는 주제에.
절망적인 감정이 블랙아웃에 섞여 강서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근데 웃긴 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의 정신은 더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질 뿐이라는 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포기하면 편할지도 모르지.’
‘나 따위가 할 건 없을지도 모르지.’
‘……쥐뿔도 없으니까.’
어떤 의문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블랙아웃이든, 114번이나 실패한 게임이든, 멸망을 앞둔 세계든…….
N무 인생을 살아온 강서준에겐 모두 똑같이 어려울 뿐이다.
해서 그가 떠올릴 답은 하나였다.
‘아직 공략법을 찾지 못한 거야.’
그러니 이딴 어둠은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