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248
◈ 248화
적당히 식사를 마친 켈은 묵묵히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무시무시한 반마력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흐음…… 이제 어쩐담.’
창밖의 반마력 폭풍으로 미루어 추측하자면, 여긴 B급 던전 ‘마력의 무덤’에서 파생된 A급 던전일 것이다.
이름하여 ‘공허의 저편’.
마력이 제로가 되는 지점에서 그 마이너스 마력인 반마력이 생성되는 시점에 만들어지는 공간!
‘이미 정규 업데이트가 시작된 거라면…… 내가 놓친 게 너무나도 많아. 만회해야만 해.’
게임은 이른바 경쟁이다.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의 부재를 겪은 플레이어가, 과연 본 게임에 다시 복귀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그가 쉬는 동안 누군가는 꾸준히 레벨 업을 했을 것이고, 그가 의식을 잃은 동안 케이는 전보다 강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최하나에게도 따라잡히지 않았을까.
‘아니, 100% 따라잡혔을 거야.’
제 목숨마저 던져 버릴 정도로 독한 집념을 가진 여자였다. 전생이 가능한 것도 아닌데도 그런 무시무시한 집념이라면…… 강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러다 콱 뒈졌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케이가 옆에 있는 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리 쉽게 죽을 거라면 여태 살아남았을 리도 없었다.
“여기서 뭉그적거릴 때가 아니야. 어서 빠져나갈 방법부터 강구해야겠어.”
또한 이는 단순히 뒤처졌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 아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 봤자 기다리는 건 ‘늦은 죽음’뿐이다.
반마력이 휘몰아치는 공간에서 생명체는 쉽게 바스러지고 죽기 마련이니까.
살아남으려면 반마력에 대한 대책을 완벽하게 세우고, 여길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언젠가 전직을 하려면 이런 곳에 오는 것도 좋겠지만…… 아직 시기상조야.’
한편 켈은 옹기종기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년, 소녀들을 바라봤다.
수녀 에밀리와 던전화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아련해지고 시큰한 느낌이 따라왔다.괜히 따듯한 감정에 취할 것만 같았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려. 이건 다 허상이야.’
켈은 과거의 자아가 가졌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의 기억에도 희미한 것들이었다.
이런 감정은 게임 공략에 하등 도움도 되질 않으며, 컴퍼니의 목적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일은 일이니까.
사적인 감정은 늘 배제해야 마땅하고, 이로 인해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게 프로다.
“켈도 이쪽으로 오지 그래요?”
문득 에밀리가 해맑게 웃으며 켈에게 손짓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과 트럼프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에이, 켈.”
“됐다고요.”
말투가 너무 차가웠을까.
에밀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켈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미친…… 자아 새끼야.’
그가 정신을 잃은 새에, 또 다른 인격 녀석이 에밀리를 보며 특별한 감정이라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이라고?
그게 너무 황당하여, 켈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역시 하시는 거죠?”
“……알았어요.”
나중에 두고 보자. 두 번째 인격.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켈. 룰은 알고 계시죠?”
“네, 뭐.”
“그러면 카드 섞습니다.”
당장이라도 아이들의 외투에 섞인 마력을 긁어모아, 이곳을 빠져나갈 대책을 모색해도 모자랄 판에 ‘카드 게임’이라…….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터무니없을 뿐인데도, 그의 몸은 머리가 이끄는 대로 따르질 않았다.
원래 사랑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두 번째 자아 녀석…… 사실 깨어 있는 거 아니야?’
다중 인격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과연 ‘켈’이 의식을 차리고 있을 때에, 이전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던 ‘두 번째 인격’은 어쩌고 있을까.
자고 있을까? 아니면 깬 상태로 있을까.
녀석이 활동하는 동안엔 ‘켈’이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두 번째 자아 녀석도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꾸 두 번째 자아라고 하니 어감이 어색하네. 흐음…… 앞으로 넌 그냥 켈투다.’
어쨌든 켈은 자꾸만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질 않는 몸에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혹시 이러다 잠에서 깨면 또 ‘켈투’에게 신체를 빼앗기고 마는 건 아닐까.
“……그러면 안 되는데.”
“아, 보셨어요? 헤헤. 민망하네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려니 에밀리가 켈을 보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참 이쁜 미소였는데, 그 아래의 소맷자락에서 카드 한 장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켈은 못하는 척하면서 타짜가 따로 없으시네요.”
“수녀인 당신이 카드 게임을 하는 게 더 이상한데요.”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켈은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에밀리가 귀엽게 인상을 찌푸리며 카드를 든 손을 내려놓았다.
“……정말 타짜라니까.”
잠시 에밀리와 눈을 마주친 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정말 제멋대로였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간질거림…… 아무리 생각해도 한숨만 푹푹 나오는 상황이었다.
근데 또 기분이 좋으니 어떤가 싶다.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 머물러도 좋지 않으려나.
쿠우우우웅!
그런 안일한 생각이 잘못이었을까.
밖에서 묵직한 폭음과 함께 미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번에 놀란 에밀리가 몽둥이를 쥐었고, 아이들도 저마다 무기를 쥔 채로 소음이 난 방향을 바라봤다.
켈은 한숨을 내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슬슬 나갈 때도 됐나 보군.”
“네?”
“그냥 그렇다고요.”
반문하는 에밀리를 뒤로하고, 켈은 아이들의 외투를 빠르게 회수했다.
그 안에 담긴 실낱같은 마력을 응축시켜 다시 본인의 몸으로 흡수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켈! 지금 무슨 짓을……!”
당황한 에밀리의 말이 들려와 가슴이 뜨끔하고 꽤 아픈 느낌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켈투는 이 상황 자체를 달가워하질 않는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켈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더는 신체의 제어권을 빼앗길 생각도, 켈투의 장단에 놀아나 주는 것도 사절이다.
“방해하지 마.”
물론 이는 에밀리에게 한 말이 아니다.
켈은 짧게 혀를 차며 다 부서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반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며 그의 몸을 갉아먹을 기세로 빠르게 스쳐 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스킬, ‘정령 소환술(S)’을 발동합니다.] [정령,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응답합니다.]그의 내면에 숨어 있던 실피드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이내 온몸에 쌓였던 모종의 마력도 억지로 밀어냈다.
호흡이 길어지고 그 숨에서 빠져나간 마력이 많아질수록, 켈은 주변의 풍경이 무너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멀리 반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던 광경도.
오두막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도.
모두 재처럼 흩날리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사라지고 말았다.
켈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모두 허상이라고.”
아마 켈투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의 본질도 그와 같을 테니까. 이 정도 상황 판단 능력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녀석은 머무르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도 과거에 해내지 못했던 녀석의 ‘한’, 혹은 ‘미련’이 그를 허상 공간에 빠져 있고 싶게 만든 것이다.
“앞으로 한 몸에서 살아갈 것 같아 미리 말해 둘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그런 부질없는 일로 붙잡을 생각은 하지 마.”
가슴 한쪽에서 켈투가 반발하고 나섰는지 괜스레 기분도 울컥해지고, 또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쳤다.
켈은 일부러 무시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딴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쿠우우우웅!
완전히 걷힌 시야 너머로 보이는 한 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을 옭아맨 미끌미끌한 외피가 느껴졌다. 그는 뱀에게 사로잡혀 꽉 조여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놈이 오두막에서 느꼈던 인기척의 당사자일 것이다.
“아나콘다라…… 너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처럼 놈이 그를 잡아먹겠다고 몸을 휘감아 준 덕에, 허상 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켈은 피식 웃으며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응시하는 아나콘다의 뱀눈을 마주 노려봤다.
“그렇다고 먹힐 생각은 없어.”
에밀리나 아이들, 오두막의 모든 것은 허상이었지만 ‘반마력 폭풍’만큼은 진짜였다.
실제로 그의 몸을 갉아먹어 마력이 실낱같이 남은 상태였으니까.
이곳은 여전히 A급 던전이었고, 상황은 최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데에서 쉽게 죽을 것 같냐.”
아나콘다의 이빨에서 보랏빛 독액이 뚜욱 떨어졌다. 놈은 더더욱 몸을 조이는 힘을 강하게 늘리고 있었다.
“난 안 죽어.”
켈은 바람을 창처럼 가공하여 뱀의 몸을 수차례 관통했다.
피가 튀어 머리를 적셨지만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뱀이 먼저 그를 조여 죽이느냐, 그의 정령술이 아나콘다를 무력화시키느냐의 싸움.
켈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켈투를 향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절대 안 죽을 거라고.”
그리고 아나콘다의 머리 위로 묵직한 바람을 응축하여 아래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아나콘다가 반항하듯 고개를 바짝 들었지만, 전력을 다한 켈의 공격에 조금씩 고개는 아래로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켈을 조이던 힘도 약해졌다.
“지금이야, 실피드!”
휘이이이잉!
그의 의지에 화답하듯 실피드가 켈의 발을 밀어 줬다. 몸을 옥죄어 오던 부위도 바람으로 밀어내니 탈출은 더더욱 쉬워졌다.
그렇게 위로 쑤욱 빠져나간 켈은 허공에서 잠시 부유했다.
키아아앗!
아나콘다가 성난 눈으로 그를 뒤쫓았지만 그 사이에는 금방 공기의 벽이 생성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시야 정보를 차단하는 특징을 가진 공기였다. 녀석은 당황하며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또한 혀를 날름거리며 냄새를 맡으려 했지만, 이 또한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후우…… 겨우 살았네.”
켈은 한숨을 내쉬며 실피드에게 명을 내렸다. 그는 고속 탄환처럼 몸을 튕겨 그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실낱같은 마력으로 A급 몬스터인 아나콘다를 처치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마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밖으로 빠져나오니 더더욱 던전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아득히 멀리 산등성이가 있고, 그 아래로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공허의 저편.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고.”
여긴 A급 던전, 그리고 종전의 아나콘다는 그 던전의 아주 일반적인 몬스터에 불과하니까.
***
새카맣게 드리운 어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밝아지지 않는 ‘낮’을 둘러보며, 강서준은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포탈 던전을 넘어 도착한 프랑스!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 불리던 프랑스의 파리는 이처럼 생각보다 더 처참한 상태였다.
“내가 생각했던 파리는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둘러본 곳엔 마치 미사일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곳곳이 파괴되고 무너진 흔적만이 가득했다.
영화나 역사책에서 보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풍경도, 이보다 철저하게 파괴되진 않았을 거다.
앞서 포탈을 넘은 링링도 강서준을 향해 말했다.
“멍 때리지 말고 얼른 모자나 눌러 써. 정체를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알았어.”
고개를 주억거린 강서준은 링링의 뒤를 따라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그곳의 사크레쾨르 성당에 생겨난 던전이 바로 A급 던전으로 성장한 ‘공허의 저편’이었다.
“좋아. 그럼 가 보자고.”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던전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