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253
◈ 253화
켈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 줬으면 싶었다.
‘케이라고?’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늑대굴을 피해 겨우 도망쳐 왔더니, 호랑이굴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켈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멀리 광활한 평원 위로 누군가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다.
아무렴 그는 차원 서고에서 누가 봐도 그에게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하질 않았던가.
최하나를 공격해서 크게 상처 입혔고, 진백호의 몸엔 독까지 심었던 전적이 있다.
그전에 정체마저 들켰었다.
‘케이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아.’
배신자에 한하여 극악무도할 정도로 잔인한 처사를 하기로 악명 높은 게 케이였다.
이전 세계의 주요 인물인 ‘호크 알론’도 따지고 보면, 케이의 뒤통수를 쳤다 그리 허망하게 죽은 게 아니던가.
“크으윽……!”
문제는 켈의 도주 의사를 빨리도 알아차렸는지, 알리가 대뜸 그의 몸을 마기로 휘감아 버렸다는 것이다.
……낭패였다.
자고로 마력이 소진된 정령사는 무력하기 그지없고, 마기가 주 무기인 마족은 공허의 저편에선 막강할 수밖에 없다.
알리가 본격적으로 켈을 휘어잡으니 빠져나갈 길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욕지거리를 속으로 내뱉는 것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안간힘을 쓰던 켈은, 결국 정면으로 다가온 강서준을 마주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한편 그의 옆으로 선 링링도 발견할 수 있었다.
케이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찬 현실인데, 랭킹 3위인 링링마저 함께라니.
켈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제 죽었군.”
여기까지 왔으면 다 끝난 거다.
그리샤가 상대였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희망은 있었을 텐데…… 그와 수준 자체가 다른 케이가 아닌가!
링링까지 합세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률?
0에 수렴한다.
그리고 종전까지 켈을 무자비하게 묶어 뒀던 알리를 마치 강아지 다루듯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면 의지가 꺾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저런 자를 상대할까.
강서준은 체념한 얼굴을 한 켈을 향해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널 죽여? 전생한다고 자랑하냐?”
“……역시 다 아는군요.”
한편 켈은 강서준을 보며 진심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그의 수준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못 본 새에 더 괴물이 되어 있네. 이젠 비벼 볼 생각조차 못 하겠어.’
가히 케이다웠다.
분명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어떻게든 비빌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하늘과 땅으로 차이가 느껴졌다.
말 그대로 천외천.
소싯적의 케이를 마주했을 때처럼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넘사벽’이라고 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드림 사이드 1때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현시점은 정규 업데이트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 당시의 케이와 현재의 강서준을 비교한다면, 1년 차라는 수준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서준은 괴물같이 강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존재 자체가 치트 아니야? 끝도 없이 강해지는 괴물이…… 진리에 다가설 자격마저 갖춘 거잖아.’
새삼스럽게도 떠오른다.
컴퍼니의 강대한 세력을 일구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데이터베이스’를, 케이는 ‘차원 서고’란 이름으로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만큼이나 강해지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전생을 전부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케이는 드림 사이드 역사상 공략을 성공시킬 확률이 가장 높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0116 채널 관리자가 일찍부터 난리를 친 거겠지.’
마족이니 뭐니 일찍 개입한 데엔 그런 이유가 있다.
설마 자기 차례가 오질 않을까 봐.
여기서 공략이 성공할까 불안한 것이다.
컴퍼니가 케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특별히 관리하려는 이유도 같았다.
‘난 그런 케이를 적으로 돌린 거야.’
근데 이상한 점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케이는 그를 죽이려는 낌새를 전혀 내비치질 않는 것이다.
왜지?
예상대로라면 그는 마주치자마자 죽었어야 한다. 케이는 결코 배신자를 처단하기에 망설이지 않으니까.
혹시 그건 게임이라 그런 걸까?
켈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왜 날 안 죽여요?”
“말했잖아. 전생자를 죽여 봤자 너만 좋은 일이라고.”
“거짓말. 날 죽이면 적어도 이번 채널에선 아웃인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유가 될 텐데요?”
이런 말을 꺼내면서도 조마조마했다.
막말로 갑자기 케이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목을 베어 버려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변명의 여지도 없다.
강서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냥 운 좋은 줄 알아.”
그 말에 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케이는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면 상황은 달라진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메리트가 있다면, 켈에게 아직 생존의 기회는 남아 있는 것이다.
‘살 수 있어.’
잠시 이죽거리면서 앞으로 케이를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지, 간단하게 로드 맵을 그릴 즈음이었다.
상황만 잘 넘긴다면…….
목숨 정도는 쉽게 부지할 수 있다고, 얕은 기대감을 품었더랬다.
엄청난 두통과 함께 머리맡에 드리운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뭐야?’
[시스템의 부적격 판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스템이 당신을 예의주시합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송두리째 소름이 돋았다. 눈앞이 노래지고 모든 것들이 흔들렸다.
가파르게 변한 숨에서 핏물도 배어 나왔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추측만 가능했다.
‘설마, 그리샤 이 새끼가……?’
그게 켈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
그리샤는 미간을 찌푸리며 온몸을 감쌌던 기분 나쁜 마기를 애써 털어 냈다.
스킬 ‘블랙아웃’으로부터 겨우 탈출한 시점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승을 하직할 뻔했군.’
그리샤는 목에 남은 상처나 팔목에 그어진 상처를 확인했다. 단단한 강철 같은 몸이라 해도, 자신의 손톱 또한 강철이기에 대미지가 쌓이다 보면 결국 치명타가 되는 법이다.
바쁘게 포션을 부어 치료하질 않았으면…… 그는 이미 한 줄기 데이터 쪼가리가 되어 전생을 준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샤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블랙아웃’으로부터 그를 지켜 준 부하 직원 ‘미티’를 내려다봤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자세였다.
이럴 때면 정말 후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샤는 문득 미티가 내민 보고서를 확인했다.
“근데 이건 뭐야?”
“제가 켈에게 환상을 걸었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근데 이상한 걸 포착했어요.”
미티는 환상 마법에 능통한 권위자였다. 모르긴 몰라도 켈의 마력을 송두리째 소진시킨 이유는 미티의 환상 마법이었다.
그리샤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켈의 환상에서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걸 봤어요. 이전 생과 이번 생…… 아예 접점이 없는 정보들이요.”
그 내용은 미티가 내민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그리샤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꼼꼼하게 보고서를 검토해 봤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잘한 두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순히 블랙아웃의 여파라 지워진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실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이거 재밌게 됐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단순했다.
켈이 오두막을 짓고, ‘수녀’를 비롯한 ‘아이들’을 지키는 환상을 꿈꿨다는 것.
다른 사람이었다면 뭐가 이상하냐면서 반문할 정도로,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켈이다.’
천외천 랭킹 11위 켈.
그는 컴퍼니 내에서도 다소 입지가 단단한 콘크리트 간부라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그리샤였기에, 더더욱 그 꿈이 허황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켈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고? 그것도 애들? 그런 꿈을 꾼다고?’
그리샤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는 없다.
매사에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그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꿈이라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환상에서 드러난 켈의 행동은, 여태 그가 보여 준 그 어떤 행동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샤는 생각을 확장시켰다.
“그래. 이 새끼…… 어쩐지 한 달이나 잠수를 타더라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인격이 뒤바뀐 거구나?”
드물지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전생자에게 ‘다중 인격’이란 숱한 생을 넘으며 봉인된 기억이 모종의 사건으로 일시에 해금되는 현상을 말하니까.
만약 정말 놈이 다중 인격이 되어 버린 거라면, 그리샤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스템 부적격 신청이 수락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켈’의 부적격 시험이 진행 중입니다.]“응?”
돌연 들려온 메시지에 그리샤는 미티를 바라봤다. 보고서의 말미에도 이미 신고가 들어갔다는 내역이 적혀 있었다.
“일 처리가 빠르네.”
“과찬이십니다.”
그리샤는 실실 웃으며 미티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이래서 이 녀석을 곁에 두는 거다.
눈치도 빠르고, 일도 잘한다.
다만 신고를 한 당사자의 이름을 ‘그리샤’로 적은 게 보였지만…… 그게 또 어떨까 싶었다.
설득력을 높이려면 그보다 레벨도 높고, 컴퍼니의 직위도 높은 상사의 이름이 필요할 수도 있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떨어질 수도 있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꼼수일 테지만…….’
그리샤는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증거가 확실한 일이다.
“앓던 이를 뺀 듯 시원하구나.”
놈을 사로잡아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갖고 놀겠다는 계획은 무산이 됐지만…… 이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지긋지긋한 악연은 여기서 끝을 보는 셈이니까.
여태 놈을 붙잡겠다고 쏟아부은 인력과 시간이 조금 아깝긴 해도,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옆에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미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알면서 뭘 물어?”
물으나 마나다.
전생자는 오직 이전 생의 기억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리고 다중 인격은 확실한 부적격 사유였다.
여기서 시스템의 선택은 단순하다.
“버그로 판명당해 삭제될 거야.”
그게 다중 인격이 되어 버린 전생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컴퍼니의 사내 규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빠른 자살을 추천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죽으면 전생하겠지만…… 삭제되면 그걸로 끝이니까.’
한마디로 켈의 역사는 여기까지다.
“그걸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역시 아쉽네. 이런 명장면을 놓치다니…… 아아.”
그리샤는 새삼스러운 사실도 떠올릴 수 있었다.
켈이 버그로 판명당해 삭제당한다는 건, 단순히 걸리적거리던 놈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의 자리…… 그의 권력!
놈이 제아무리 끈이 떨어진 상태라 해도, 여태 해 온 업적은 상당한 편이다.
아직도 그는 컴퍼니 내부에선 고평가를 받는 유망한 간부였다.
근데 그러한 켈의 수많은 권리가 단숨에 공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샤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좋아. 아주 좋아! 녀석이 내게 도움이 되는 날도 오는구나!”
“승진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미티의 아부에 껄껄 웃음을 터뜨리던 그리샤는 유리 상자를 확인했다.
채우기로 했던 반마력의 양이 아직 3분의 1은 모자랐다.
“역시 내일까지 작업을 완료해야겠어.”
“……네?”
“철야를 해야겠지만 별수 있나. 켈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려면 그만한 성과가 필요한데.”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리고 놓쳐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밤을 새워서라도! 무리를 해서 쓰러질지언정, 상부에서 말한 기한보다 빠르게 물건을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자네도 얼른 가서 일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른 미티는 작게 중얼거리며 힘없이 일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려고 그 고생을 한 게 아닌데…… 야근이라고? 켈만 처치하면 조금 쉴 수 있는 게 아니었어?”
퇴근이 물 건너간 직장인의 어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겁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