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287
◈ 287화
강서준은 말없이 노예의 뒤를 따라 깊은 지하로 들어갔다.
천연 동굴과 인위적으로 깎은 것들이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늘어진 통로.
슬슬 어디로 가는지 헷갈릴 즈음에야 그는 넓은 공동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쪽이다.”
이미 그 안엔 비슷한 복장의 여러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이미 소식이 전해졌는지, 대뜸 강서준에게 말을 거는 사내도 있었다.
“나를 찾는다고?”
강서준은 노예들의 흉흉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중 꽤 몸집이 커다란 사내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넌 누구지? 어떻게 내 본명을 알고 있는 거지?”
험악한 분위기는 고조됐다.
금방이라도 그를 찌를 듯 검 손잡이에 손을 댄 노예나, 활시위를 이쪽으로 당긴 노예들.
수십에 달하는 장정이 그 하나를 두고 위협적인 기세를 내세웠다.
물론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당신 말고요.”
“……뭐?”
“난 토니모리 안센을 만나러 왔습니다. 당신 같은 허수아비는 관심 없어요.”
그 말투가 사내를 화나게 했을까. 얼굴이 대번에 붉어지고 근육이 성난 듯 일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먼지가 풍겨 났고, 목 언저리로 차가운 검의 감촉도 느껴졌다.
강서준은 짧게 혀를 찼다.
“한 번은 봐드리지만 두 번은 없어요. 내 목에 칼을 겨누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가소로운 꼬맹이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음은 저도 막을 생각이 없어요.”
강서준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인 라이칸을 겨우 진정시키며 시선을 돌렸다.
이곳엔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다. 최소한 협상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생각이다.
“말 길게 하도록 만들지 말고 슬슬 정체를 드러내시죠? 토니모리 안센.”
“안센은 나다!”
자칭 안센이라 칭한 거구는 성큼성큼 강서준에게 다가와 겁도 없이 그 멱살을 확 휘어잡았다.
강서준은 서늘한 시선으로 거구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라이칸의 들끓는 분노가 뼈저리게 느껴질 즈음.
돌연 한쪽 테이블에서 여리지만 꽤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시죠.”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멱살을 잡던 사내가 손을 뒤로 물렸다. 강서준이 그쪽을 바라보니 다소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온 모양이군요.”
“……워낙 티가 났어야죠.”
강서준은 여전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안센.”
외형은 다른 노예처럼 오래 굶어 삐쩍 곯았고, 꾀죄죄한 몰골에 정돈되지 못한 앞머리는 코 아래로 내려가 눈조차 안 보이는 몰골.
키도 그보다 10cm나 작고, 실제로 연령도 훨씬 어려 보이는 남자였지만 강서준은 그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대장장이 안센.’
그는 후쿠오카에 살고 있다던 랭킹 8위의 천외천이었으니까.
***
토니모리 안센.
랭킹 8위에 빛나는 드림 사이드의 가장 위대한 대장장이.
강서준이 안센에 대해 알게 된 건, 노예들의 무의식을 한창 탐구하던 때였다.
‘토니모리 안센…… 여기에 있었단 말이지.’
신기한 물건을 만든다는 안센에 대한 소문은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첨예한 기관 장치로 그 정체를 확신했다.
이 던전의 숨은 단체인 ‘카게’를 이끄는 리더이자, 토니모리 안센이란 이름을 가진 자.
‘정말 공교롭다니까.’
강서준은 쓰게 웃으며 허리 벨트에 고요히 꽂혀 있는 그랑의 어금니 단검을 살펴봤다.
재밌는 건 ‘그랑의 어금니 단검’이 바로 안센이 만든 제작품이라는 것이다.
‘실패작이라 불렸지.’
그랑의 어금니 단검엔 남모를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이 장비의 경우, ‘용의 무구’임에도 고작 제한 레벨이 400도 안 된다는 것이다.
화룡 그랑의 레벨이 470을 넘겼던 괴물인 걸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성능이라 할 수 있다.
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장비의 수준과 성능을 대폭 하향시킨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안센에겐 성공작이지.’
안센은 그랑의 어금니 단검을 단 한 번도 무기로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만들려 했던 건 예쁜 장식이 될 만한 세공품.
황당하게도 안센은 귀하디귀한 ‘용의 이빨’을 갖고, 고작 세공품을 만들어 냈다.
당연히 성능은 고려하지 않고 미관만을 따졌기에 그 수준도 대폭 하향된 것이다.
‘장비를 조각하는 대장장이.’
이것이 드림 사이드 1에서 불려 온 안센의 별칭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탄식하며 말했다.
“혹시 우리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 뭐…….”
알다마다.
게임으로 치면 가장 오랜 단골이자, 꽤 친분도 깊었다.
소소한 문제가 있다면, 현실의 모습이 클라크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다소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 정도였다.
‘게임 속 캐릭터는 꽤 근육질이었는데 말이지.’
강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더는 외관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여전히 대장장이로의 활약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곳곳에 설치된 기관 장치만 봐도 알 수 있다.
‘레벨은 꽤 낮아 보이지만…….’
그는 여전히 대장장이 안센이었다. 강서준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사실 전.”
“안 돼요.”
“……네?
“안 된다고요.”
황급히 날아온 거절에 강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안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눈으로 강서준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뭘 기대하고 왔는지는 빤하죠. 일 없어요. 돌아가요. 난 당신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
“…….”
“미안하지만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랭커? 천외천? 그딴 건 게임에서나 할 말이죠.”
그는 꽤 냉소적인 시선이었다.
“여긴 현실입니다. 우린 노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흐음.”
“돌아가세요. 여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희망적인 집단이 아니니까.”
강서준은 말없이 한숨을 삼켰다.
노예들의 비밀 집단, 통칭 ‘카게’는 노예 해방 시나리오를 공략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노예들의 무의식엔 카게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카게는 기껏해야 음식을 훔치거나, 의약품을 훔쳐 다른 노예들에게 돌려주는 ‘의적’이었다.
“딱 봐도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우린 그냥 도둑놈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아, 혹시 의뢰인가요?”
“아뇨.”
“그래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쓸데없는 희망을 품지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요. 내일 채찍은 오늘보다 더 아플 겁니다.”
명백한 거절 의사와 축객령에 다른 노예들이 강서준의 양쪽 팔을 잡아끌었다.
그대로 끌고서라도 밖에 데려갈 요량이었을까. 강서준은 짧게 혀를 차며 간단하게 그들의 손을 쳐 냈다.
“무슨 힘이…….”
강서준은 안센에게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요.”
“……거래요?”
“전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걸 드리도록 하죠.”
강서준의 시선은 그를 바라보는 노예들에게 향했다.
희망은 던져 버린 지 오래고, 절망 따위를 소화시킨 지 오래된 사람들.
오직 체념하고 오늘을 살 뿐인 노예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서준을 보고 있었다.
강서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던전을 공략할 겁니다.”
“던…… 뭐요?”
“대신 안센, 당신은 내 장비를 좀 봐줘야겠어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의 팔을 잡아끌던 노예도, 무기를 겨누던 노예도, 마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안센조차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가 먼저 터뜨린 웃음은 금세 들려왔다.
“푸흡…… 뭐? 공략?”
“아주 패기가 넘치시는구먼!”
“공략이란다! 공략!”
비웃음은 전염이라도 되는 모양일까. 노예들은 강서준을 보며 번지듯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정작 강서준은 정색을 했고, 안센도 웃질 않아 그런지 소란은 금방 잠잠해졌다.
안센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진심입니까?”
“물론이죠.”
잠시 말이 없던 안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강서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됐어요. 그만하세요. 어디서 레벨 좀 올린 모양인데…… 던전 공략? 그런 건 불가능해요. 여긴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니까.”
“알아요.”
“안다고요? 그럼 이곳의 보스는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센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다.
쿠구구구구구궁!
돌연 머리 위로 진동이 생겨나고 돌가루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흔들린 지진에 노예들은 이리저리 나부끼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만 껌뻑였다.
안센은 빠르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고글을 머리에 쓰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간수들이군요.”
“네?”
“꼬리가 붙었었나 봅니다. 안 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안센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고글을 벗고 그 앞에 선 노예들에게 빠른 속도로 명을 하달했다.
“기관이 작동했으니 그들이 바로 들어오진 못하겠지만, 시간문제입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해요. 놈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붙잡히면 그 순간 우린 패배입니다. 다들 알고 계시죠?”
“네!”
노예들은 일사불란하게 조를 나눠 움직이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이 방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었고, 각 문마다 통로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안센은 강서준에게도 당부의 말을 건넸다.
“기모스가 당신을 안내할 겁니다. 부디 안전하게 빠져나가시길.”
그리 말한 안센은 다른 사람들을 통솔하기 위해 빠르게 자리를 비웠다.
덩그러니 남은 강서준은 안센의 대리자, 자칭 ‘안센’이라 주장하던 거구의 남성 ‘기모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도 얼른 나가자. 간수들이 냄새를 맡으면 골치 아파져.”
강서준은 일단 기모스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안센은 이런 상황에 대한 방비를 충분히 해 둔 모양이었고, 굳이 그가 나서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직 그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한편 앞서가던 기모스가 강서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너 일본인인가?”
“?”
“일본어가 꽤 유창하던데.”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한 건 강서준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영어를 쓰던데. 난 의외로 기모스 네가 영어를 잘 알아듣길래 놀라고 있었어.”
“……뭐? 난 애플이 영어로 뭔지도 몰라.”
“애플이 영어야. 어쨌든 아까부터 저 사람 영어로만 말하고 있다고.”
“엥?”
혼란은 쉽게 번졌다. 누구는 강서준이 한 말을 ‘한국어’로 들었고, 누구는 ‘중국어’로 들었던 것이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는 당연한 일이다.
강서준이 소통하는 방식은 ‘고급 통역 아이템’을 통해 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입장에선 전부 ‘모국어’로 들릴 수밖에 없다.
강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보다 앞을 봐야겠는데요?”
“뭐?”
달려가던 사람들은 복도 끝에서 으르렁대는 한 마리의 늑대인간을 마주하고 말았다.
반바지만 입었고 붉은 갈기가 유난히 도드라진, 근육질의 늑대는 적색 갈기 웨어울프라 불리는 존재다.
레벨은 얼추 330 아래로 A급 던전에서도 가장 레벨이 낮은 쪽에 해당했다.
“젠장…….”
기모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잠시 시간을 벌 테니 다들 도망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란 말이야!”
“야! 네가 뭘 어쩌려고!”
“뭐라도 해야지! 이대로 다 죽을 거야?”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하늘은 무심하기만 했다. 복도 너머로 여타 다른 웨어울프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기모스의 안색은 대번에 질렸고, 몇몇 노예들도 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야만 했다.
한 마리의 웨어울프조차 감당하질 못하는 게 그들의 현실.
카게가 여태 생존한 이유는 절대 적들과 정면 대결을 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기모스는 강서준을 향해 말했다.
“……너라도 도망쳐. 어떻게든 여긴 우리가 막을 테니까.”
뭐라 해야 할까.
꽤 용기 있는 발언이고, 앞서 그를 지키려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하나 강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모스의 쌍심지가 날카로워졌다.
“고집 좀 그만 부려! 사람이 목숨 걸고 도와주겠다는 데에 너는……!”
“아니, 좀 비켜 봐요.”
강서준은 힘으로 기모스를 옆으로 치우고, 순식간에 다가온 날카로운 손톱을 막아 냈다.
그 잠깐 사이 여기까지 도달한 몬스터들의 입가엔 더러운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어, 어, 언제!”
노예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고 강서준은 재차 휘둘러지는 손톱을 응시했다.
“라이칸.”
츠츠츳!
그리고 강서준은 차분한 얼굴로 단 한마디의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처리해.”
그의 주변으로 연기처럼 소환된 라이칸은 히드라의 마검으로 웨어울프의 상반신을 통째로 베어 내면서 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