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291
◈ 291화
안센은 순간 꿈인가 싶었다.
‘그 올랑 그리브가…….’
광산의 총책임자인 올랑 그리브는 노예들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개미가 코끼리를 올려다보듯 녀석은 노예들에게 있어 아예 격이 다른 존재!
감히 항거할 수도 없고, 어찌 대항할 힘조차 없다.
올랑 그리브는 불가항력이었고, 반년 전 그들의 동료가 속수무책으로 죽는데도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스거어억!
그 어마어마하던 괴물이 단말마의 비명도 못 지르고 단칼에 데이터 쪼가리로 변하는 걸.
“허어…….”
대뜸 이런 의문도 들었다.
‘혹시 올랑 그리브가 약했던 건 아닐까?’
노예들이 괜히 지레짐작해서 올랑 그리브를 신격화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모두 합심해서 전력으로 달려들었다면, 또는 기습으로 반전을 노렸다면?
조금 더 노력해서 레벨을 아주 약간 더 올렸더라면…….
어쩌면 그들도 올랑 그리브를 처치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괜히 겁을 먹었던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잖아.’
안센은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삼켰다. 여태 그가 겪어 온 과거를 부정할 만큼 이곳에서 살아온 나날이 어설프지 않았다.
‘우린 최선을 다했어.’
드림 사이드 2가 오픈하고 던전에 사로잡힌 이후로, 그들은 매일 목숨을 걸고 버텨야 했다.
수시로 그들을 핍박하는 웨어울프나 여타 다른 몬스터들로부터 살아남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처음엔 던전도 공략하려 했다고!’
사실 카게도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땐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일념도 확실했고, 그에 따른 준비도 철저히 했다.
어떻게든 이 던전을 공략해서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간간이 간수들을 쓰러트려 레벨 업도 하고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려고 노력도 했었다.
‘우린 그저 실패했을 뿐이야.’
반년 전, 부득이하게 벌어진 간수들과의 전투로 인해 카게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아니, 전투라 하기도 뭣하다.
그건 하이 웨어울프를 다루는 올랑 그리브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고생했던 그들의 노력은 단 하나의 괴물에 의해 무너졌다.
올랑 그리브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어떻게 믿겠냐고.’
잠지 전장에 적막이 흘렀다.
그들의 대장이 죽었기 때문일까?
웨어울프로 구성된 간수들도 당황을 금치 못하고 단두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의 절반은 그대로 양단된 올랑 그리브는 이젠 아무런 울음도 뱉을 수 없었다.
안센은 놈을 단칼에 베어 버린 남자의 단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명한 생김새를 오랜 기억에서 단박에 떠올리고야 말았다.
‘……재앙의 유성검!’
드림 사이드에서 가장 유명한 무기. 단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은 아이템.
단연 대장장이었던 그가 몇 번이나 수리를 해 주려고 망치로 두드려 본 기억도 있다.
안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올랑 그리브의 시체를 앞둔 남자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케이.’
랭킹 1위였던 그가 게임 속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튀어나온 거라면…… 가능할 만한 일이지 않은가.
사실 지금도 노예들 사이로 ‘랭킹 1위였던 케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가 가장 궁금했던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게임과 현실은 다른데…….’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한 케이는 나지막이 손을 뻗으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일어나.”
그러자 올랑 그리브의 시체에 푸른 불꽃이 이염되더니, 곧 푸른 빛깔의 몬스터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센은 평노예를 지키는 몬스터들을 상기했다.
‘설마 그들 전부가…….’
모두 케이의 소환수였던 것이다.
***
케케묵은 냄새와 잔뜩 이끼가 낀 낡은 대저택.
어둠을 가로지르는 푸른 파도와 같은 한 아이가 있었다.
“여기 유령은 없나?”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종종 천둥번개도 쳤다. 하지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허름한 복도를 내달리는 그녀의 눈에선 겁이란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서 그녀가 무서운 건 딱 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튜브 보면 꼭 이런 데에 뭐 있던데…… 흐으음.”
그녀의 이름은 파랑이.
썩 만족스러운 이름은 아니지만 귀엽다고 해 주는 사람도 많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간식을 챙겨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젠 꽤 익숙해진 이름이다.
“이 모퉁이만 지나면…… 이얍!”
한껏 기대를 품고 달려가 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새카만 복도의 정경뿐이었다.
촛불이 간간이 켜져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둠을 밝히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재미없어.”
파랑이는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너튜브로만 보던 신기한 저택 탐사도 한두 시간이면 질리는 법이다.
시간을 세어 보진 못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라도, 꽤 긴 시간을 복도만 걸었던 그녀였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반복될 뿐인 어두운 복도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파파…… 파파왕…….”
여태 떨어져 본 적이 없어 소중한 줄 몰랐던 두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애써 괜찮은 척 해맑게 뛰어다니던 파랑이는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흐리며 입술을 앙 깨물었다.
“여기 어디야…… 파파.”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는 복도로 번졌고, 파랑이는 새카만 어둠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 순간,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귀신보다도 이 세상에 홀로 남는 것이었다.
“……유령이라도 나와라아.”
하지만 파랑이는 울먹이는 얼굴로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파파왕이 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 진백호라는 인간을 수련시킬 때에, 그에게 강조하듯 언급했던 말이었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거야.”」
파랑이는 그 단어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겨우 발을 내디뎠다. 감정이 가득 섞인 눈물을 또르르 바닥에 흘릴지언정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눈물은, 바닥에 파문을 일으켰다.
“어…… 어어?”
저도 모르게 눈물에 섞인 마력이 복도에 닿고 또한 이 공간을 유지하는 뭔가에 닿은 것이다.
파르르 떨리던 허공을 응시하던 파랑이는 멀리 복도 끝에서 반짝이는 한 점의 빛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
파랑이는 엄청난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본능적으로 다리에 마력을 주입했을까. 그 파괴적인 걸음은 공간 자체를 뒤흔들었다.
신기하게도 문은 금세 그녀를 집어삼키듯 다가왔다.
츠츠츠츳!
파랑이가 화들짝 놀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저택의 밖이었다.
“……후웅?”
그리고 가까이 각종 식물이 다양한 모양새로 자리 잡은 거대한 화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파랑이는 근처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인형처럼 흔들어 대는 커다란 야자수를 보았다.
“우와아아 이게 뭐야?”
잠시 외로움에 사무쳤던 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파랑이는 해맑게 웃었다.
좀 더 둘러보니 화원의 식물은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나무는 인간의 얼굴을 닮았고, 또 몇몇은 몬스터처럼 울고 있었다.
사족 보행을 하는 식물이 그녀의 앞을 지나가다 굳었고, 나뭇잎으로 부채질을 하던 몇 거목이 조심스레 가지를 아래로 내렸다.
파랑이는 화원을 쭉 가로질렀다.
“히이…… 여기 이상해!”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지만 극적으로 변한 풍경은 그녀에게 외로울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화원엔 그녀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는?”
화원의 중앙엔 작고 아담한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꽃처럼 예쁜 여자가 물뿌리개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다!”
“응?”
“와! 진짜 사람이야!”
파랑이는 폴짝폴짝 뛰어가 여자의 앞에 섰다. 가까이 다가가니 꽃향기가 가득 풍겨 났다.
이곳 화원의 식물에서 나는 냄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든 향기는 이 여자로부터 시작됐다.
“이름이 뭐야?”
“……내가 묻고 싶은 얘긴데.”
“왜 여기에 혼자 있어?”
“그것도 내가…… 잠깐만.”
친절하게 답해 주던 여자는 금세 얼굴에 예쁜 구김을 만들고, 바로 파랑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파랑이는 일단 그녀를 따라 아담한 집으로 들어갔다.
여자의 태도가 뭔가 다급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그녀도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게 있었다.
“잠깐 여기에 들어가 있을래?”
여자는 파랑이를 집안 한쪽에 있는 장롱에 넣었다.
문이 닫히고, 다시 새카만 어둠이 생겨났지만 그다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다려. 곧 꺼내 줄게.”
파랑이는 순순히 기다리기로 했다. 멀리 느껴지던 또 다른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문 너머로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남자였다.
“유리나. 무슨 일이지?”
“뭘요?”
“마력의 기척을 느꼈다. 가벼운 게 아니야.”
파랑이는 조심스레 문틈으로 바깥을 살펴봤다.
예쁜 여자, 그러니까 ‘유리나’라 불리는 여자 앞에서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연신 집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얼굴은 뱀처럼 간교해 보였으나 썩은 나무와 같이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가 답했다.
“실수로 물을 쏟았어요. 그때 흘린 것 같아요.”
“……무어라?”
“죄송합니다. 밀트 님.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살벌한 기세로 유리나를 내려다보던 밀트는 짧게 혀를 차더니 몸을 돌렸다.
“됐다. 쉬어라.”
“……네?”
“너의 몸은 네 것이 아니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밀트는 그 말을 끝으로 화원을 벗어났다. 파랑이도 한참을 장롱에서 기다리니, 유리나가 다가와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괜찮니?”
“응. 괜찮아.”
실제로도 괜찮았던 파랑이의 말에도 유리나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녀는 파랑이를 데려다 식탁 앞에 앉히더니, 각종 쿠키를 내오며 말했다.
“어쩌다 너처럼 작은 아이까지…….”
“으응?”
“정말 세상이 어찌 되려는 걸까.”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파랑이에게 따뜻한 차와 쿠기를 내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그 손길이 굉장히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져 파랑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리나. 냄새 좋아. 손 따뜻해! 이상해…… 보통 인간한테 이런 기분은 안 드는데.”
“응?”
“편안해. 꼭 파파왕 같아.”
고개를 갸웃하던 유리나가 물었다.
“파파? 아빠?”
“응! 여기 근처로 같이 왔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뭐? 아빠가 근처에 계신다고?”
유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바깥으로 달려 나가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화원을 살폈다.
파랑이도 같이 나오려니 유리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오면 안 돼! 위험해!”
“왜? 뭐가?”
“어쨌든 위험해! 혹시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딘지 기억나니?”
파랑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말했다.
“돌무덤?”
그녀가 떠올리는 후쿠오카의 풍경은 딱 그러했다.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 있니? 지금 너희 아빠가 위험할 수도 있어!”
“아빠?”
“그…… 파파왕이란 분!”
“에에?”
고롱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옆에서 늘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강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두 사람이 위험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새삼스러운 공포가 다시 고개를 바짝 들려고 할 때였다.
투드드득.
바닥이 흔들리면서 뭔가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파랑이가 먼저 발견했고, 유리나가 뒤늦게 눈치채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위험해!”
하지만 바닥을 뚫고 무언가가 올라오는 게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먼지구름에 휩싸였고 유리나의 탄식이 뒤늦게 들려왔다.
“응?”
그리고 파랑이는 땅을 뚫고 올라온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키는 그녀와 비슷한 꼬마.
아직 윤곽밖에 안 보였지만 묘하게 낯이 익었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파랑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로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