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295
◈ 295화
“……야왕이 죽었군.”
진한 커피 향이 가득한 방에서 오래된 고목처럼 잔잔히 눈을 뜬 남자가 있었다.
A급 던전, ‘저주받은 도시’의 진짜 주인인 밀트였다.
그는 눈앞에서 썩어 가는 한 나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천 년을 산다는 천년목도 이리 관리를 소홀히 하면 썩어 버린다지만…… 그 야왕이 죽었다라.”
밀트의 미간은 깊은 협곡을 만들어 냈다. 안 그래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구겨지니, 더욱 유난스러운 모양이었다.
“상황은 어떻지?”
-……바칼라돈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정체 모를 집단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네. 고블린, 오크, 오우거, 리자드맨, 도깨비…… 믿을 수 없지만 보고된 바로는 그 종류만 수십 가지입니다.
가만히 보고를 듣던 밀트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썩은 천년목의 일부가 그 힘을 버티질 못하고 바스라졌다. 묘하게 진한 커피 향이 더욱 강렬하게 풍겨 났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네?
“몬스터 집단 중 도깨비도 있다고?”
벌벌 떨며 고개를 아래로 박은 웨어울프가 간신히 입을 벌릴 수 있었다.
-네, 네! 분명 도, 도깨비도 있었습니다.
콰직!
결국 과도한 압력에 의해 천년목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말았다.
밀트는 소명을 다하고 데이터 쪼가리가 되어 버린 그 흔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몬스터들의 몸엔 푸른빛이 감돌고 있진 않더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제야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밀트는 수백에 달하는 푸른 몬스터 무리를 일찍이 만나 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을 다루는 게 누군지도.
“다시 ‘왕’이 태어난 거로군.”
도깨비들의 왕, 이매망량(魑魅魍魎).
그는 누구보다 긴 세월을 살아 도깨비의 비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밀트는 명백한 관리자의 의지도 깨달았다.
“또 나를 방해하려는 것이냐?”
성난 목소리에 부복한 웨어울프가 피를 토해 냈다. 흥분을 제어하질 못하여 흘러나온 마력이 늑대들의 심장을 터뜨린 것이다.
-크허억……!
한데 웨어울프들이 토해 낸 피는 바닥을 따라 흐르더니, 이내 소멸한 천년목의 자리로 스며들었다.
뿌리만 살아 있다면 언제든지 회생할 수 있는 게 ‘천년목’의 특징이었다.
그렇게 천년을 사는 나무.
영생에 가까운 생을 살아가는 존재에겐 더없이 긴 세월을 함께해 줄 반려목이다.
밀트는 게걸스럽게 웨어울프의 시체를 탐닉하고, 새로 자라나는 천년목의 새싹을 바라봤다.
“……차라리 잘되었군. 부활의 첫 제물로 제격이지 않느냐.”
그를 둘러싸던 웨어울프들은 천년목에게 모조리 뜯어 먹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새로 자란 천년목의 새싹이 그 작은 잎사귀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
“어? 움직였다!”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던 파랑이가 대뜸 꺼낸 말이다.
그녀는 멀리 우거진 나무들을 가리키며 들뜬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쟤네 웃기다니까? 막 춤춰!”
까르르 웃어 대는 파랑이를 보면서,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용이란 거지?’
솔직히 몇 번을 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예쁘고 귀여운 얼굴이나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
이게 정말 용이라고?
유리나는 의외로 드림 사이드 1을 플레이해 봤고, 용에 대해서도 여러 영상을 통해 접해 본 경험이 있는 편이었다.
실물로는 처음이라고 해도 간접적으로 겪은 것들이 워낙 많았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빤히 쳐다보는 게 이상했는지 파랑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나는 애써 웃으며 찬장에서 과자 몇 개를 더 꺼내 왔다.
그녀를 이곳에 가둔 악마가 주기적으로 가져다주는 과자였다.
언제든 마력을 충전해서 일만 하라는 의도로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언니는 착하구나?”
“응?”
“걱정 마. 언니는 내가 지켜!”
파랑이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쿠키를 씹던 한 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 말이 맞아요. 왕께서 명령하신 이상, 저 또한 목숨을 바쳐 당신을 지킬 거예요.”
“……그래요.”
파랑이도 그렇지만, 그 옆에 앉아 있는 로켓이란 소년도 솔직히 바로 받아들이기 힘겨웠다.
듣기론 그도 ‘인간’이 아니라, 본질은 ‘리자드맨’ 계열의 몬스터라고 하질 않는가.
그녀가 알고 있던 몬스터에 대한 개념이 송두리째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왕이라니…… 그분은 대체 어떤 분이신 거죠?”
“응? 파파왕?”
“네. 역시 밖에서 들어오신 거겠죠?”
1년을 넘도록 이 던전에서 살아온 그녀였다. 이토록 다채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천외천 출신인 안센이 희귀한 기물을 종종 만들어 냈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터무니없는 것들 뿐이었다.
‘아직 레벨이 낮고, 재료가 턱없이 부족한 게 이유가 되겠지만…….’
어쨌든 노예 중엔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몰라!”
“네?”
“파파왕은 그러니까…… 인간 같은데 인간이 아니야.”
“무슨 뜻이죠?”
“몰라! 파파왕은 그냥 파파왕이야!”
더욱 정체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로켓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첨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왕은 왕이시지.”
“……네에.”
“근데 인간들은 왕을 이리 부르더라. 케이라고.”
유리나는 잠시 눈을 멀뚱멀뚱 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이름은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다.
“케, 케이 님이라고요? 랭킹 1위?”
“그래. 너도 잘 아나 봐?”
어찌 모르겠는가!
드림 사이드를 플레이했던 사람들에겐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름인데.
특히 드림 사이드 2가 오픈하면서, ‘케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 케이 님이라니……!’
믿기진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막말로 겁도 없이 A급 던전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용’만 보더라도 그의 수준을 짐작할 수도 있었다.
로켓은 그런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왕께선 잠시 할 일이 있어 조금 늦으시는 것뿐이니.”
“아, 네…….”
무엇보다 바칼라돈에서도 가장 은폐된 공간인 이곳에서, 그보다 먼 위치인 광산으로 통신이 연결되는 것부터 신기한 일이다.
이미 상식은 벗어난 지 오래다.
“으으…… 뭐야?”
창밖을 바라보던 파랑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을 돌린 유리나도 그곳에서 풍겨 나는 그윽한 커피 향을 느꼈다.
“……창문을 좀 닫아야겠어요.”
유리나는 다가올 미래를 예감하며 슬픈 얼굴을 했다.
파랑이가 실상 용이라 해도, 외관상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살려…… 줘!
-끄, 아, 아, 아아아, 아악!
-싫……어어어어어어!
비명처럼 번지는 소리에 일행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로켓은 미간을 찌푸렸고, 파랑이도 얼굴을 굳히며 창밖을 살폈다.
소리는 한곳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이 집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으어어어…… 아파아……!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여긴…… 어디야?
여자, 남자, 아이, 노인…… 가릴 것 없이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언어가 들려왔다.
유리나는 잠시 비명을 삼켰다.
반년을 살아온 이곳이었지만, 늘 이 시간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다.
그래도 창문을 닫으니 소리의 크기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로켓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에 뭔가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하네.”
유리나는 로켓이 땅을 뚫고 이곳에 다다랐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저 나무들 아래에 묻혀 있는 게 뭔지 본 건 아닐까?
로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해 보여서 확인해 보진 않았어.”
“……그렇군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현명한 행동이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위험하단 생각부터 든다면. 섣불리 건들지 않는 게 정답이니까.
해도 될까 싶은 걸, 해선 안 되는 게 바로 노예들이 뼈저리게 깨달은 삶의 노하우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약자들의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아파하고 있어.”
“……네?”
“누군가 괴로워하고 있다고!”
파랑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릴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당황한 얼굴을 한 유리나가 로켓을 바라봤지만, 그도 이 상황을 예상하진 못한 듯했다.
다만 추측되는 건 있나 보다.
“빌어먹을 너튜브…… 히어로물 따위를 보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리 중얼거리며 로켓은 빠르게 파랑의 뒤를 쫓았다. 유리나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본래 이렇게 비명이 터질 때는 집 안에서 버티곤 했기에, 밖으로 나와 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왜 내가 죽어야 해? 내가?
-살려 준다며! 약속했잖아!
-흐흐흐흐흐흐! 꼴 좋다!
소리를 줄여 주던 얇은 벽조차 없어지니, 비명은 더더욱 적나라한 음성을 쏘아 냈다.
유리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명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단순히 소리가 무서운 게 아니다.
비명 속에 담긴 절절한 감정이, 누군가의 불행한 인생이, 고통 속에 사무친 절망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이거 아래에서 들리고 있어!”
“……허튼짓은 하지 말라고 왕께서 말하셨어. 제발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돼?”
막무가내로 나아가는 파랑이와 어떻게든 막고자 노력하는 로켓의 실랑이!
하지만 힘의 차이는 여실히 존재했다.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다.
파랑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당장 이곳에 없었다.
“살려 달라고 말하잖아. 아프다잖아! 외면하는 건 영웅이 할 게 못 돼!”
“넌 영웅이 아니……!”
쿠구구구구궁!
로켓의 말은 파랑이가 내지른 남다른 주먹질에 의해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주변의 비명조차 삼킬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었다.
유리나는 눈앞에서 펼쳐진 장관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입이 떡 벌어져 할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진짜 용이구나.’
조막만 한 손으로 바닥을 내리찍었을 뿐인데, 마치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큰 지진이 일어났다.
바닥은 움푹 파이고, 여태 그녀가 차마 확인할 수조차 없던 지하가 드러났다.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구멍 난 바닥으로 내려갔다.
로켓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건 대체…….”
유리나는 정면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살펴봤다.
파랑이도 그걸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엔 그녀가 찾는 도움을 바라는 인간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죽여…… 줘……….
-살고 싶어! 살려 줘! 살려 달라고오오오!
-개자식아! 나 좀 살려 줘!
-끼이이이이이아아아악!
뿌리였다.
지상에 잔뜩 자라난 나무들의 뿌리가 오직 한곳으로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수십, 수백 개의 얼굴의 형상이 양각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다양한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이 뿌리에 박혀 소리만 내지르는 기괴한 장면이다.
황당하지만 그중 몬스터의 얼굴도 보였다.
“이게 다 뭐야……?”
파랑이가 탄식하며 그 뿌리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그녀의 앞으로 투명한 막이 생겨나더니, 한 발짝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유리나는 언제부터였는지 그녀의 뒤에 선 존재를 깨달았다.
“……미, 밀트?”
이곳 던전의 주인이자, 시체정원을 가꾸는 진짜 악마!
밀트가 성큼성큼 파랑이에게 다가가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정원이 시끄럽다더니…… 용, 넌 어떻게 들어왔느냐?”
“……넌 누구야?”
밀트의 시선이 날카롭게 가공되어 그 곁에 선 로켓에게 향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땅의 마법을 발현했지만, 순식간에 그 형체는 지워지고 말았다.
파랑이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너 감히 우리 로켓한테……!”
크콰카카카카칵!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파랑이의 몸은 수많은 줄기에 엉켜 들어가고 있었다.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줄기는 더더욱 파랑이를 끌어당겼다.
유리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놔! 이거 놔! 놓으라고오오!”
뿌리 속으로 파랑이가 삼켜질 때까지도 그녀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