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Ranker's Comeback RAW novel - Chapter 301
◈ 301화
‘일단 파랑이부터 꺼내야겠지.’
놈의 계획이 뭐든 우선순위는 그것이다.
강서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대한 나무를 응시했다.
파랑이를 꺼낼 방법은 우선 저 나무로 가까이 다가가서 차츰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츠츠츠츳!
‘이건…….’
강서준은 거대한 나무로부터 솟구치는 무자비한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그것은 이내 그의 온몸을 옭아매는 사슬처럼 변했고.
[당신은 ‘밀트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범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당신에게 제약이 강해집니다.]강서준은 직감할 수 있었다.
‘또 그건가.’
강서준은 빠르게 안센부터 걷어차 사유지의 반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케, 케이 님!”
뒤이어 당황하는 안센을 붙잡은 켈이 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멀어졌다.
강서준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걱정 마요. 금방 돌아올.”
하지만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겨우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하얀 방.
밀트의 사유지.
“나가자마자 또 걸렸네.”
강서준은 금세 돌아온 탈력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반지를 내려다보며 제레브의 힘조차 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엔 아이템 자체를 못 쓰게 만들어 놨네.”
[‘밀트의 사유지’에서는 ‘아이템’의 사용이 제한됩니다.]하지만 강서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내가 같은 수법에 또 당하겠냐?”
***
“아아…… 케이 님이!”
안센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진 케이를 찾으며 그저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케이는 겨우 빠져나온 그곳으로 다시 갇히고야 만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안센이 무어라 더 입을 열기도 전에, 켈이 그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설마 거길 빠져나올 줄이야.”
두둥실 허공에 나타난 남자는 초면이었지만, 그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던전의 주인이자, 현 상황의 원흉이라 할 만한 존재.
켈에 의하면 ‘전승인’이라 부르는 터무니없는 괴물.
‘밀트.’
밀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빌어먹을 케이 놈 때문에 시간만 더 걸리겠어. 괜히 3만 명이나 써먹었잖아?”
그는 지팡이를 허공으로 겨누더니 무어라 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케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잠시 마력이 폭발적으로 뒤틀렸고, 무언가가 아로새겨지는 듯했다.
그리고 꽤 기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아이템까지 봉인했으니 또 빠져나올 일은 없겠지.”
녀석이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거대한 나무 틈으로 들어갈 때까지, 안센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슬슬 숨이 막힐 즈음에야 놈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켈도 입을 막던 손을 풀어 줬다.
“허억…… 허억.”
잠시 숨을 고른 안센이 켈에게 물었다.
“이, 이제 어쩌죠? 케이 님이 또 잡히고 말았어요. 아이템까지 봉인당한 거면…… 그러면!”
“안센.”
“네?”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켈은 차분한 얼굴로 안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손에서 찬바람이 쌩 불어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묘하게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켈은 시선을 돌려 거대한 나무를 바라봤다.
“그보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안센은 너무나도 침착한 켈의 모습을 보며 잠시 침을 삼켰다.
……이 사람은 케이가 속수무책으로 붙잡혔는데도 정말 괜찮은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걱정을 떠올리던 안센은 불현듯 케이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불평한들 바뀌지 않는 일엔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했지. 시간 낭비니까…….’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세상은 저 말 또한 그저 ‘불공평한 현실에 대한 타협’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왠지 모를 떨림이 있었다.
불공평함을 그대로 직시하고…… 중요한 건 출발선이 아니라는 그 말이.
집중해야 할 건 앞으로 어떻게, 어디로 달려야 하느냐라는 그 말이.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쩌면, 여태 출발하기도 전에 지레짐작하여 포기했었던 건 아닐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안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케이가 붙잡혔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이번엔 내가 공략을 찾아야 해.’
차분하게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덜어 냈다. 안센은 좀 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꿩 대신 닭.’
안센의 눈은 거대한 나무의 한쪽에 달라붙은 흙더미로 향했다. 케이가 말하길 그곳에 그녀가 있다고 했다.
[장비, ‘호르스의 고글’을 착용합니다.]정신없이 폭주하는 마력량 틈으로 단 하나의 마력을 특정할 수 있었다.
안센이 오직 ‘로켓의 마력’에 집중하자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용을 구하면 방법이 생길 거야.’
한동안 말이 없던 켈은 안센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말했다.
“일단 파랑이부터 구하죠. 그러면 방법이 생길 겁니다.”
이미 결론을 내린 안센은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계획이 있는 겁니까?”
“네, 근데 일단 움직이죠.”
주변으로 나무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으로 슬슬 가지를 뻗고 있었다.
오는 중에 투명한 공기 벽에 막혀 더는 다가오질 못했지만, 그조차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켈이 말했다.
“딱 달라붙어요. 한 번에 돌파할 겁니다.”
“……네!”
어느덧 켈의 몸 위로 하늘하늘한 인영이 겹쳐 보였다. 정령사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스킬!
‘정령화’를 발동한 켈은 발소리도 내질 않고, 무엇보다 거친 바람이 되었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모든 공격을 날카로운 바람 칼날로 잘라 냈다.
“정령왕……?”
안센은 켈의 뒷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벌써 정령왕을 몸에 안착시킬 정도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난 고작 200레벨을 넘겼는데.’
그에 비해 켈이 보여 준 기술은 못해도 400레벨은 넘겨야만 쓸 수 있었다.
강서준만 S급 수준에 이른 게 아니라, 랭킹 11위에 불과하던 켈조차 이미 S급을 넘긴 것이다.
‘신경 쓰지 마. 켈은 켈이고 나는 나다.’
비교해 봐야 어찌할 수 있는 건 없다. 안센은 애써 상념을 털어 내며 숲을 가로질렀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예상대로 우리 정도로는 밀트가 반응하질 않는군요.”
“네?”
“그놈도 아까운 거겠죠. 시스템을 조작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켈은 안센을 붙잡고 과감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번에도 밀트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들은 순식간에 나무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흙더미 옆으로 난 구멍은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와도 같았다.
“이 안으로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요.”
근데 원래 여기에 입구가 있었나?
잠시 고개를 갸웃한 안센은 켈의 뒤를 따라서 나무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커다란 공터였다.
공갈빵을 뜯어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텅 빈 내부는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 중심으로 무언가만 얽혀 있다는 것만이 두 눈에 보였다.
안센은 중심에 얽힌 한 아이를 보면서 물었다.
“저 아이가 파랑이입니까?”
“네. 근데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곧 그들이 들어온 구멍이 빠르게 껍질로 뒤덮였다.
그렇게 퇴로가 차단되자, 눈앞으로 거대한 마력이 일렁이면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함정이었군.”
그리고 당당히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밀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안 그래도 마력이 조금 모자라던 참인데…… 알아서 와 주는구나.”
밀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켈. 아니, 백귀라고 해야 하나?”
이죽이는 밀트를 보며 안센은 잠시 몸을 떨었다.
뭐라 해야 할까. 오직 그만이 이곳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원이 다르다.’
밀트가 기운을 끌어올릴 때마다 켈도 마찬가지로 마력을 앞으로 내세웠다.
거센 바람과 밀트의 마력이 충돌하여,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충격이 번졌다.
안센은 약간 숨이 벅차다는 것도 깨달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 나간다는 말이 이럴 때에 쓰는 거겠지.
‘천외천(天外天)이란 건가…….’
한때 그도 거기에 속했던 인물이지만, 이제 와서 과거의 영광은 의미가 없었다.
안센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두 사람의 대치를 숨죽여 지켜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켈이었다.
“그쪽은 선배라 불러야 하나?”
“뭐?”
“아니지. 시스템에게 아웃당한 주제에 여태 살아남은 걸 보면 버러지라 해야겠군.”
날이 선 말투는 마력으로 표출되어 두 사람 사이로 스파크가 튀기는 듯했다.
실제로 바람 칼날이 밀트의 사방을 베었고, 주변에서 솟구친 나무줄기가 그 공격을 막았다.
크콰카카카칵!
후우우우우웅!
선 자리에서 벌어지는 정령사와 마법사의 싸움!
일견 막상막하로 보였지만 아쉽게도 점차 켈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마력의 총량에서부터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듯했다.
밀트는 ‘용’에게서 흡수한 마력을 바탕으로, 이 거대한 나무를 조종하고 있었으니까.
“말하는 것치고는 약해 빠졌구나.”
“크윽……!”
결국 켈의 발목을 휘어잡은 줄기가 승부를 갈랐다.
켈은 속수무책으로 그의 몸을 옭아맨 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밀트가 천천히 다가갔다.
“어리석은 백귀야. 아직 모르겠느냐?”
“……뭐?”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날 상대로 이길 수는 없느니라. 백귀는 결국 ‘영혼’이 형태를 갖춘 것에 불과하니까.”
밀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혼은 내 밥이거든.”
“끄아아아악!”
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 위로 무언가가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억지로 끄집어낸 형태는 터무니없지만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정령왕!’
밀트는 지금 켈의 몸에 정착한 ‘바람의 정령왕’을 억지로 꺼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걸 어떻게 해내는지는 놀랍지도 않다.
‘이대로면 다 끝이야!’
안센은 주변을 둘러보며 본인의 위치를 파악했다. 달려서 멀지 않은 곳에 파랑이라는 수룡이 묶여 있었다.
수십 미터나 되는 나무를 힘겹게 올라야 한다는 점이 있었지만, 구태여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밀트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어.’
어차피 켈이 붙잡힌 마당에 안센이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직 남은 희망은 ‘수룡’을 구출하여,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 까짓것 죽기보다 더하겠냐?’
안센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그와 함께한 곡괭이를 들고 빠르게 달려 나무줄기를 내리찍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곡괭이질만을 했더니 근력 수치는 꽤 높은 편이었다.
암벽 등반을 하듯 나무를 오르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군.”
밀트의 딱하다는 시선이 느껴졌다.
또한 여태 그를 몰라서 놓친 게 아니라, 아예 신경을 쓰질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유는 간단할 것이다.
‘난 벌레만도 못한 존재니까.’
계란으로 바위를 쳐 보아야 깨지질 않는다. 코끼리가 개미를 피해 걸어 다닐 이유도 없다.
밀트에게 안센이란 그런 존재였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
새삼스럽지만 여태 뭘 그리 걱정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후쿠오카에서 흙수저로 태어난 것이 그의 인생을 모조리 결정지었었던가?
불행하게 던전화에 휘말려 이리 노예로 살게 된 것들이 모두 그를 단정 지었나?
‘아니, 결정하고 단정 지은 건 모두 나였다.’
한 번쯤은 그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불공평하게 태어났다고 끝까지 불행하게만 살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 오늘만큼은.’
안센은 밀트의 조롱 어린 시선에도 애써 곡괭이를 박아 넣었다. 파랑이의 고운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되든 안 되든…….
곡괭이를 한 번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휘둘러 보고 싶었다.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게!’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했다.
“그만. 놀이는 거기까지다.”
정신을 차렸을 때의 그는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줄기가 그의 몸을 후려쳐 반항할 틈도 없이 수십 미터나 되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아아…….”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만약 일찍이 오늘처럼 살아왔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쉽게 단정 짓지 않았더라면…….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난 할 수 있었을까.’
의문만을 남긴 채로 바닥에 머리부터 추락하려는 순간이었다.
“네.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저 추락할 뿐이던 그의 몸을 붙잡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사람이 있었다.
안센은 황망한 눈을 떴다.
“……케이 님?”
마치 용처럼 날개를 활짝 펼친 강서준은 안센을 향해 말했다.
“당신도 천외천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