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108
108
Chapter27 – 성장의 계절 (1)
“하아, 이제 저도 잘 모르겠네요.”
“혹시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될 대로 되라죠.”
이번 ‘베스트 듀오 셰프 챔피언십’(Best Duo Chef Championship)의 공식 홈페이지 참가 팀 목록에 기재된, 자신의 이름 ‘쁘띠 준’을 확인한 이정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넨 말이었다.
이내 필상이 이정준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밀고 있던 제 휴대폰을 도로 거둬들이며, 장난기가 잔뜩 서려있는 투로 물음을 건넸다.
“이쯤 되면 즐기고 있는 거 아녜요?”
그 말에 이정준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도마 위에 내려놓았던 제 칼을 도로 집어들며 답했다.
“장담하는데, 아마 절대 아닐걸요?”
“알겠으니까, 칼은 좀 내려놓고···.”
“일해야죠.”
덤덤한 투로 답해 보인 이정준이 능수능란한 솜씨로 야채를 손질해가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제가 수 셰프 자격으로 출전하게 되면, 브래들리가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파우스트의 실질적인 수 셰프는 브래들리니까···.”
“이해할 거예요. 정준 씨와 한국에서 함께 한 시간 때문에. 그러니까 정이나, 연고. 뭐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정준 씨를 고용한 게 아니니까요.”
그 말에 이정준이 마냥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제 두 손을 잠시 멈춘 채로, 필상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럼요?”하고 되묻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이기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에요.”
“흠, 그래도···.”
“신경 쓰이세요?”
“아무래도 조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필상이 덤덤한 투로 덧붙였다.
“브래들리와는 제가 잘 대화할게요. 정 신경 쓰이시거든, 이번 ‘스프링 시즌 신메뉴 투고’ 때 모두한테 보여주세요. 앞으로 모든 중대사를 정준 씨가 도맡게 되더라도,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하게끔요.”
“예, 셰프.”
“그리고 정준 씨. 조금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영원한 건 어디에도 없어요. 지금 당장은 정준 씨가 가장 효율적인 카드였을 뿐이었고, 저는 이겨야 하는 상황이니 가장 효율적인 카드인 정준 씨를 고른 것뿐이에요. 만약 제 손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카드가 있었다면, 정준 씨가 아닌 다른 카드를 골랐겠죠.”
비록 듣는 쪽에서도, 또 말하는 쪽에서도 거북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라지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물론 이정준이 또래와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기야 하다지만, 행여나 이번 대회의 수 셰프로 자신을 발탁한 이유가. 또 대부분의 중대사를 그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함께 한 시간이나, 그 시간을 통해 쌓은 정. 또는 연고 덕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위기의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위기의식이야말로, 이정준 같은 성향의 요리사에게 있어 가장 큰 동력원이 되어 줄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말이다.
그때.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정준이, 끝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사뭇 의연한 투로 되물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저보다 더 효율적인 카드가 나타날지 모르니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건가요?”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필상이 “정답.” 하고 답해 보이고는, 도마 위에 놓여있던 생양파를 집어 들어서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내 제 고개를 좌∙우로 몇 번 내저어 보인 이정준이 다시금 야채를 썰어나가기 시작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으음, 확실히 가혹하긴 하네요. 시즌 신메뉴 투고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있을 테고, 그럼 매년 4회씩은 시험을 치르는 셈이니까요.”
“맞아요. 그래도 몇 번 이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사실은 습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척 꺼내 보인 말이라지만, 실은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된 충고였다. 말을 마친 필상이 다시금 양파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우적우적 씹어가며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주 파우스트의 스프링 시즌 신메뉴 투고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이번 대회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될 거예요. 아마 다빈과 로버트의 얼굴을 질리도록 볼 수 있겠죠.”
“그렇네요. 그나저나 앞으로 한 달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셈이네요? 준비하기에 촉박한 상황 아니에요?”
이내 필상이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잖아요?”
“진부하지만 맞는 말이죠.”
“맞는 말이니까 진부해졌을 테고요.”
말을 마친 필상이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하세요.” 하고 말해 보인 뒤, 곧장 브래들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을 돌린 필상의 얼굴 위로 은은한 미소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대화를 마치기 직전 목도한 이정준의 ‘손’ 덕이었다. 굳은살은 더 단단해졌고, 기다란 손가락 위로 새로운 생채기 몇 개와 화상 자국이 자리잡았다. 부주의가 아닌 노력의 증표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다만, 과로에 시달린 원숭이들이 보통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가 이곳에서도, 또 ‘쁘띠 준’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뒤 전과 다른 인지도를 얻었음에도 꾸준히 요리사로서 해야 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내 필상이 오늘도 어김없이 주방 곳곳을 배회해가며, 각 섹션의 상태를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는 브래들리의 곁에 멈춰 섰다.
“브래들리”
“예, 셰프.”
“바쁘세요?”
“아뇨,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필상이 주방 뒷문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덧붙였다.
“그럼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요?”
*
필상과 브래들리, 두 사람이 주방 뒷문과 이어지는 ‘하역장’에 발을 들였다. 식자재를 잔뜩 실은 트럭이 주차된, 또 몇몇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쉬는 시간에 시간을 죽이곤 하는 휴식처였다.
이따금 파인다이닝의 직원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에 기겁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지만, 주방 직원들에게 있어 업무 도중 담배 한 개비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조우한 오아시스와 마찬가지인 존재다.
유일하게 눈치를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담백한 휴식 시간이자, 대화 한 마디 주고받지 못한 채 기계처럼 일하던 동료와 아주 잠깐이나마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한산한 시간에는 마냥 소란스러운 곳이라지만, 오픈 준비로 한창 정신이 없는 지금은 그 이야기가 사뭇 달랐다.
이내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인 필상이 자연스레 하역장 한 귀퉁이에 놓인 식용유 통 한 개를 꿰차고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앉으세요.”
“예, 셰프.”
이내 브래들리가 곧장 식용유 통 한 개를 꿰차고 앉으며, 멋쩍은 듯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브래들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필상이, 한차례 숨을 길게 내쉬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브래들리. 다름 아니라, 이번 ‘베스트 셰프 듀오 챔피언십’에 출전하기로 했어요. 혹시 어떤 대회인지 알고 계신가요?”
그 말에 브래들리가 제 두 눈을 휘둥그레 떠보이며 답했다.
“맙소사, 설마 모를 리가요! 매년 새로운 형태의 퀴진이 개발되고 탄생하는 엄청난 대회잖아요···?”
한껏 격정적인 투로 물어 보인 브래들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아내 보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파트너 셰프는요? 어느 파인다이닝의 어떤 셰프와 함께 출전하시는 거예요?”
“장 조니의 ‘다빈’ 셰프와 함께 출전하기로 했어요.
“어라? 참가 조건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비롯한 여러 음식점의 헤드 셰프 이상 직급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빈은 조건에 충족되지 않는 거 아닌가요? 다빈은 아직 장 조니의 헤드 셰프가 아니잖아요?”
“그랬죠. 그런데 이제 가능해졌어요.”
“예? 그럼 설마···?”
이내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장 조니 셰프께서 다빈에게 파인다이닝을 승계해주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인가 봐요. 서류 정리는 이미 끝난 것 같고, 지금은 순차적으로 부수적인 인수∙인계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인 것 같더라고요.”
“그렇군요. 다빈 정도면 셰프와 함께 팀을 이루기에 손색없는 훌륭한 쿡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수 셰프였다지만, 다빈은 장 조니의 실질적인 항해사이기도 했고 이미 실력이 입증된 훌륭한 요리사니까요. 아마 독립해서 파인다이닝을 런칭했더라면, 분명 좋은 평을 들었을 테고요.”
“동감하는 바에요. 그는 훌륭한 요리사죠.”
짧게 답해 보인 필상이,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가며 재차 물음을 건넸다.
“대회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 것 같던데, 그럼 팀을 이룬 두 명의 셰프가 각각 한 명씩 수 셰프를 기용할 수 있다는 룰도 알고 계신가요?”
그 말에 브래들리가 멋쩍은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가며 답을 내놓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뒷말을 덧붙였다. 연달아 이어진 그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말이었다.
“셰프, 저 대신 준을 데려가세요.”
“예?”
“이기셔야죠.”
짤막하게 답해 보인 브래들리가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덤덤한 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제 직급이 과분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물론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합니다. 이제 주방 지휘도 조금 익숙해진 것 같고, 영 낯설기만 하던 서류 검토도 조금은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 같고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아직 역부족이죠. 어느덧 파우스트가 다시 문을 열게 된 지도 두 달이 다 되어가네요. 저는 이제야 수 셰프 흉내를 낼 수 있게 됐고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준을 기용하는 게 옳다고 봐요. 왜냐면.”
잠시 뜸을 들여 보인 브래들리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준은 이미 많은 걸 보여줬잖아요? 지난 번 대결 때도 그렇고, 업무 시간 도중 준이 일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사실 냉정하게 요리사로서의 준과 저를 비교하다 보면, 제가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더러 있고요.”
“브래들리도···.”
“아뇨, 위로의 말을 해주시려는 거면 정중히 사양할게요. 무조건 낙심해있겠다는 뜻이 아니니까요. 준은 이미 훌륭한 요리사가 맞아요. 하지만 셰프께서 전에 한 번 그러셨잖아요? 주방에 영원한 승자는 절대 없다고요.”
“예, 그랬죠.”
“비록 지금의 제가 준보다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영원히 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생각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늬만 수 셰프인 저 대신, 준을 데려가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저를 데려가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거거든요.”
이내 필상이 그런 브래들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저 말을 저토록 유려하게 늘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을지가 너무도 절절히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의 눈이 열정으로, 시기로, 질투로, 경쟁심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어수룩하고 불완전한 눈빛과는 너무나도 비견되는 모습이었다. 물 한 모금 없이 알약을 삼켜낼 수 있을 정도로 항우울제와 가깝게 지내던, 또 꿈을 좇아 맨해튼에 왔다가 정신이 넝마가 된 이십 대 후반 청년의 자취는 아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청년은, 그저 훌륭한 셰프가 될 재목일 뿐이다. 이정준과 선의의 경쟁이란 이름의, 긍정적인 시너지를 주고받으며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훌륭한 셰프의 재목 말이다.
이윽고, 필상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장담하는데 브래들리는 훌륭한 셰프가 될 겁니다.”
“정말요?”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파인다이닝을 한 개 런칭해 드릴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서라도 준비해둘 걸 그랬네요.”
천연덕스러운 투로 답해 보인 그가 제 나이에 딱 걸맞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재차 되물었다.
“셰프께서는, 혹시 본인의 말이 지닌 영향력을 알고 계신가요?”
“글쎄요? 어느 정도는?”
“저는요, 방금 셰프께서 해주신 그 말씀 덕에.”
잠시 뜸을 들여 보인 그가 애써 덤덤한 투로 덧붙였다.
“다시 태어난 기분입니다.”
그리고는 방수 처리 된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덧붙였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네, 그러세요.”
이내 하역장에 홀로 남은 필상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올해 들어 올려다본 하늘 중, 가장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브래들리의 말 덕에 고민이 깊어졌다.
주방은 좁고, 더우며, 또 이곳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지극히 반복적이다. 그러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生)이 담겨있고 촘촘히 얽혀있는 곳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며, 또 받는다. 일방적인 관계란 절대 없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믿고 이 덥고, 비좁으며, 위험한 곳에서 생을 투신하기로 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간만에 셰프라는 직책이 지닌 버거움과 책임감이, 짙게 다가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이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늘이 유독 맑았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완연한 봄에 접어들고 있음을 일러주는 듯했다. 봄이다. 생기를 잃었던 모든 것들이 도로 푸르스름한 기색을 되찾는, 그리고 이번 봄은 아무래도 성장의 계절이 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