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168
168
Chapter40 – 홀리데이 (1)
“끄으···.”
귀를 찌르는 알람 소리 탓에 억지로 눈을 뜬 줄리아가 손을 더듬대서는, 머리맡에 두었던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기에 앞서, 얇은 커튼 틈새를 비집고 한바탕 쏟아지고 있는 은은한 햇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덧 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듯, 햇살 속에 온기가 잔뜩 담겨있는 상태였다.
AM 6:00
여유 있게 출근을 마치려면, 이제 슬슬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에 접어든 상태였다. 이내 줄리아가 제 옆에 곤히 잠들어있는 필상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차례 “이런.” 하고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줄리아가 제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 보이기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잊고 있던 어젯밤 일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까닭이었다.
그때, 필상 역시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제 두 눈을 애써 떠 보였다. 그런 필상의 눈 위로 피로감이 역력히 드러나는 듯했다.
“일어나셨어요?”
필상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건넨 말에, 줄리아가 무어라 답하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취기와 공감, 연민과 동정이 만든 아침 풍경 탓에 머릿속이 마냥 복잡할 따름이었다. 제아무리 행동거지와 사고가 조숙하다지만, 그래 봐야 이제 열여덟 살에 접어든 어린 애가 아니던가?
“내가 무슨 짓을···.”
줄리아가 흘리듯 건넨 말에 필상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뭐 어때요? 제 모국인 한국 법으로 따지면 내년부터 어엿한 성인이에요.”
“어쨌든 아직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미국 법으로 따진다면···.”
“그건 그렇지만, 뭐 어쩌겠어요?”
말을 마친 필상이 제 몸을 반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걷어내던 찰나, 줄리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름 아니라, 이불에 감춰져 있던 필상의 *나신(*裸身)이 훤히 드러났던 까닭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를 켜 보인 필상이 제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곧장 덧붙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필상이 방을 나서자,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줄리아 역시 그런 필상의 뒤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홈 바 주변에 떨어져 있던 속옷을 주섬주섬 주워 도로 챙겨입은 필상이 자연스레 소파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잔뜩 들이켜댄 술 탓에 속은 진탕하는 듯했고 머리는 연신 지끈댔다.
그렇게 필상이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던 찰나였다. 속옷 차림의 줄리아가 음료가 든 컵을 건네주며 말했다.
“드세요.”
“뭐예요?”
“레모네이드요.”
말을 마친 그녀가 한 치의 굴곡조차 없는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술 마신 다음 날에는 꼭 레모네이드를 마시거든요. 다 드신 뒤면 그나마 조금 상쾌해지실 거예요.”
“고마워요.”
“그리고 슬슬 준비해야 여유롭게 출근할 수 있을 거예요. 먼저 씻을 테니까, 잠깐 쉬고 계세요.”
“알겠어요.”
나직이 답해 보인 필상의 시선이 선반으로 향했다. 이내 필상이 선반 위에 엎어져 있는 액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액자 안으로는 지금보다 한참은 앳되어 보이는. 또 몇 배는 밝아 보이는 얼굴을 한 줄리아와, 대략 삼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있었다. 이내 줄리아가 한 치의 굴곡조차 없는 어투로 말했다.
“레이첼이에요.”
“그렇군요.”
짐작했던 바였다. 괜히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려대던 필상이 액자를 반듯하게 세워두며, 재차 물음을 건넸다.
“그런데 왜 엎어두신 거예요?”
“면목이 없어서요.”
“지금도 그래요?”
“물론이죠.”
“왜요? 이제 다 이겨내셨잖아요?”
“아뇨. 그러니까···.”
말끝을 흐려 보였던 줄리아가 웃음기 서린 투로 답했다.
“레이첼이 그랬거든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거든 사랑을 하는 대신, 동료가 돼서 함께 일을 하라고요. 그게 올바른 선택일 거라고 하셨죠. 주방에서 일하는 남자는 절대 만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그 말에 필상 역시 웃음을 흘려 보였다.
“음, 면목이 없을 만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마음이, 말 그대로 마음처럼 되는 건 절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조금 아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남자도 생각하시는 것처럼 마냥 나쁘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요?”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 권유하는 거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그래도 굳이 귀책을 따져보자면 줄리아 쪽이 조금 더···.”
“에휴, 능청스럽기도 하셔라.”
이내 줄리아가 괜히 벽면에 거치 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우선 씻고 올게요.”
“그러세요.”
그리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쾅.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애써 참고 있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쏴아아, 이내 그녀가 곧장 찬물을 튼 뒤 머릿속에 어질러진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해보려다가 금세 마음을 접었다.
‘모르겠다.’
자신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한들, 영 셰프의 말대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머리를 비울 요량이었다.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인생이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때 그랬던 것처럼, 일렁이는 감정에 집중한 채 지낼 요량이었다. 이내 줄리아의 입가 위로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맙소사, 하룻밤 새에 신데렐라가 된 기분인데요?”
출근을 위해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선 줄리아가, 건물 앞에 정차 중인 벤틀리 사의 차량을 발견하기 무섭게 꺼내 든 말이었다. 이내 필상이 손수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타세요. 늦겠어요.”
차량에 오른 뒤, 필상이 곧장 뒷좌석에 잘 개져 있던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그 안으로, 프리미엄 브랜드의 와이셔츠 새 제품이 한 벌 담겨있는 상태였다. 이내 필상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고는, 곧장 새 와이셔츠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그런 필상을 들여다보고 있던 줄리아가 나직이 되물었다.
“이봐요, 영 셰프.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원래 그렇게 아무 데서나 웃옷을 훌렁 벗는 편이에요?”
“아뇨, 딱히 그런 편은 아닌데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다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그렇다고 치고 그럼 와이셔츠는 뭐예요? 언제, 어디서 주무실지 모르니 항상 구비해두시는 거예요?”
“아뇨. 같은 옷을 출근할 수는 없으니 준비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나저나 벌써부터 애인 노릇 하시려는 거예요?”
이내 줄리아가 당황한 듯, 고개를 휙 돌려서는 운전수의 뒤통수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필상이 나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걱정 않으셔도 될 거예요.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비밀 유지 조항의 보호를 받거든요.”
“다행이네요.”
“미안한데 아침 일과를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잠깐 일 좀 먼저 해결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나직이 “고마워요.” 하고 답해 보인 필상이 곧장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대화 내용으로 어림 짐작건대, 아무래도 에이전시 측 담당자인 ‘멜리’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필상은 차 뒷좌석에 마련되어 있던 서류의 내용을 확인해가며, 수화기 너머의 멜리와 열띤 대화를 나눴으며 줄리아는 그런 필상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꽤나 신기하게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명 셰프의 아침 일과다. 큰 액수,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영 용어, 또 인터뷰 및 TV 출연 관련 스케줄에 관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통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필상의 모습이, 연신 꿈틀대는 미간이, 펜을 쥔 손 위로 솟아있는 핏줄이, 모든 것들이 마냥 섹시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제 스케줄 정리는 끝난 것 같네요. 파리 분점 관련 미팅은 다음 주 중으로 잡아주시면 될 것 같고요. 어쨌든, 오후에 파우스트에서 뵙는 걸로 하죠.”
통화를 마친 필상이 한차례 한숨을 내쉬자, 줄리아가 노골적으로 그런 필상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내 그런 그녀의 시선을 인지한 필상이 상체를 살짝 뒤로 빼며 불안한 듯 되물었다.
“잠깐, 잠깐만요.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울 수는 없잖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보니까 주방에서 일하는 남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
그날, 저녁 여섯 시 무렵. 필상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는, 집무실 안에 발을 들였다.
“오셨어요?”
이내 먼저 집무실 안에 들어선 채 기다리고 있던 멜리가 인사를 건네왔다. 이미 진즉 도착한 것인지, 협탁 위에 제 몫의 서류를 잔뜩 쌓아둔 채였다. 한차례 “미안해요.” 하고 답해 보인 필상이, 맞은편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손님이 끊일 생각을 안 해서요.”
“오늘은 조금 밝아 보이시네요?”
“그럴 만한 일이 조금 있었거든요.”
“셔츠는 뭐예요?”
멜리가 대뜸 건네 온 물음에 필상이 화들짝 놀라서는 “네?” 하고 되묻자, 멜리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말문을 열었다.
“설마 직속 담당자한테도 비밀 유지 조항이 적용될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아뇨, 그러니까 그냥···.”
“필상, 혹시 제가 누차 드렸던 말씀 기억하세요?”
“술과 여자는 조심하고 마약은 절대 쳐다보지도 말 것?”
“잘 알고 계시네요. 다른 아티스트라면 모를까, 필상은 알아서 잘 처신하실 수 있으시리라 믿어요.”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필상이 소파 등받이에 제 몸을 편히 누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슬슬 일 이야기를 시작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름 아니라, ‘홀리데이’(Holi Day) 건 때문에요.”
그 말에 멜리가 “맙소사.” 하고 중얼거려 보이고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격양된 어투로 되물었다.
“드디어 마음이 바뀌셨군요?”
홀리데이.
호주에 위치한 파인다이닝으로 브리즈번에서 96km가량 떨어진 곳, ‘선샤인 코스트 해변’ 백사장 한편에 위치한 곳이랄 수 있었다. *아트 퀴진(*Art cuisine)을 선보이는 파인다이닝 중 가장 명망 높은 파인다이닝 중 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름난 곳이랄 수 있었고 말이다.
특별한 점을 한 가지 꼽아보자면, 시즌 단위로 파인다이닝을 지휘하는 셰프가 바뀐다는 점에 있었다.
총괄 셰프는 고정되어 있으나, 여타 프리미엄 브랜드가 고정 디자이너를 한 명 두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 명을 추가로 고용하여 시즌 제품을 설계하는 것처럼 두 명의 셰프가 함께 아트 퀴진 메뉴를 설계하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눈에 띌 만한 커리어를 잔뜩 축적한 아트 퀴진 셰프들만이 초빙받을 수 있는 엄청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필상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다.
물론, 슬럼프 탓에 파우스트에 집중해야겠다는 핑계를 앞세워가며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내 필상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답했다.
“네, 사실 파우스트에 집중하고 싶다는 건 핑계였어요. 스프링 시즌은 이미 구축이 끝났으니 제가 자리를 비워도 무방할 테고, 홀리데이의 아트 퀴진 메뉴와 섬머 시즌 메뉴를 함께 구상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럼요?”
“실은 괜히 평가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또 새로운 아트 퀴진 메뉴를 짜내는 것도 두려웠거든요.”
“그랬군요. 그나저나 어떻게 설득해도 마음이 바뀔 것 같지 않았는데, 사람이 이토록 쉽게 바뀔 수 있는 건가요?”
“한순간의 결심 탓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게 사람이잖아요? 그냥 일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기로 결심했거든요. 평가는 대중들에게 맡기고 저는 그저 묵묵히 요리하기로 결심했어요. 요리야말로 제 *소명(*疏明)이니까요.”
“잘 생각하셨어요.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외람된 질문인 것 같긴 하지만, 혹시 와이셔츠를 주문하게 만든 의문의 여성 덕에 내린 결정인가요?”
짙은 침묵이 드리우기를 잠시. 필상이 “네.” 하고 답해보이자, 멜리가 제 서류를 챙겨 들며 답했다.
“그런 건강한 관계라면 응원할게요.”
이내 필상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멜리가 집무실 바깥으로 나선 뒤, 필상이 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일에 몰두해야 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또 일을 마친 뒤에는 다시 무수히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며, 이런저런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마냥 두렵게 느껴지던 일이라지만, 글쎄?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 모든 것들이 우스우리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한차례 심호흡을 해보인 필상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어서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업무 마친 뒤에 잠시 봐요. 아무래도 조만간 바빠질 것 같아서.
전송을 마친 필상이 제 휴대폰을 협탁 위에 내려둔 채, 도로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협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리더니, 방금 막 도착한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화면 위로 나타났다.
– 줄리아 :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