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181
181
Chapter42 – 이면 (4)
필상이 눈을 뜬 것은 꼬박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침실을 벗어난 것은 실로 간만의 일이었으나, 파티가 동이 틀 무렵이 다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강행군이랄 수 있었다.
“이런.”
미간을 잔뜩 찡그려 보인 필상이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미처 가시지 않은 취기와 숙취 탓에 울렁대는 가슴팍을 살살 어루만져대기 시작했다. 이내 맞은 편에 앉아있던 멜리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네요?”
이내 필상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속은 울렁대고, 목구멍은 쓰라려서 샐러드는커녕 물도 못 마실 것 같거든요. 기억도 잘 안 나고요. 그러게, 저 좀 말려주시지 그러셨어요?”
그 말에 “맙소사.” 하고 중얼거려 보인 멜리가 제 고개를 좌우로 내저어가며 답했다.
“맙소사, 어제 제가 몇 번을 말렸는지 기억 안 나시는 거예요? 계속 말리니까 짜증 내다가 나중엔 ‘멜리는 뚱뚱해.’라는 가사에, 음을 넣어 부르시면서 저를 놀리기까지 하셨다고요.”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제가 정말 그랬다고요? 일단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본심은 아니었을···.”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네요.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놔주는 건데.”
재차 사과하려던 필상이 미심쩍은 마음에 되물었다.
“제가 정말 그랬어요?”
“거짓말 같아요?”
필상이 재차 사과하려던 찰나, 멜리가 “됐어요.” 하고 말해 보인 뒤 포크로 집은 샐러드를 입에 욱여넣었다.
이내 필상이 멜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식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제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다름 아니라, 행여나 조엘 르뷔숑이 자신의 은퇴와 관련된 내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의 헤드라인을 한번 훑어보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아직 그의 은퇴와 관련된 소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지. 아니면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른 까닭인지, 아직 술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필상?”
멜리의 부름에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필상이 곧장 “네.” 하고 답하자, 멜리가 제 다이어리를 펼쳐 들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식사 마치셨으면, 오늘 일정 브리핑 시작해도 될까요?”
“조금 느긋하게 하면 안 될까요?”
“느긋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거 아시잖아요?”
다그치듯 말해 보인 멜리가 제 다이어리 위로 빼곡히 적힌 좁쌀만 한 크기의 글씨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금일 18시에 팀원들 중 태반이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에요. 폴 보티즈 셰프, 다빈, 갈라예프, 줄리아, 두 명의 스타주 급 직원들까지.”
“여섯 시라, 다행히 마지막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겠네요.”
“안타깝지만 불가능해요. 필상은 브리핑이 끝나는 대로 곧장 홀리데이로 이동하셔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얼마나 급한 일이 있길래요? 메뉴 정리? 레시피 전수? 사업부 인사들과 최고경영자 찰스 사치 씨 앞에서 재롱떨기? 그것도 아니면, 그릇 닦기?”
필상이 미간을 찡그린 채 이죽거린 투로 건넨 물음에, 멜리가 덤덤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답했다.
“안타깝지만 모두 오답이에요. 정식 쿡 면접이 있을 예정이에요. 아시다시피 뱅크시 셰프와 함께 모든 직원들이 떠났잖아요?”
“음,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면접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 급히 움직여야 하는 건지···.”
“정말 놀랍게도, 어제 초저녁 무렵에 게시한 채용 공고에만 수십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네요.”
멜리가 빈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서류 뭉치를 집어 들어서는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만나게 될 지원자들 이력서에요. 이동하시는 내내 살펴보시면 한 번씩은 훑어보실 수 있으실 것 같네요.”
“이런.”
“참고로 면접은 일주일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라던데요? 그나저나, 홀리데이 관련 업무를 모두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상부에 간략한 스케줄이나마 보고해둬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잠시 고민하던 필상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아내고는 답했다.
“최소 보름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요. 면접을 진행하는 와중에 레시피를 정리하고, 주방 설비와 동선에 변화를 주고, 관리자급 직원들에게 레시피 및 메커니즘까지 완벽히 교육하려면요.”
“보름도 촉박한 거 아녜요?”
“그렇기야 한데, 아시다시피 여유가 없는 입장이니 그 안에는 무조건 끝내야겠죠. 하루라도 더 빨리 파우스트의 F/W시즌 준비에 돌입해야 하는 입장인데, 우선순위를 망각해선 안 되겠죠.”
이내 멜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만약 최종 브리핑에서 홀리데이 사업부 측에게 트집이라도 잡히면, 귀국이 미뤄질 수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어떤 일이든 완벽히 처리하는 거 아시잖아요?”
“맞아요. 이 정도 업무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슈퍼맨이기도 하고요.”
“그건···.”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보였던 필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어 보였다. 앞으로의 일상이 눈에 훤히 그려지는 듯했던 까닭이었다. 면접과 채용, 인사 결정, 주방 시스템 구축, 관리자급 직원 교육, 보고서 작성, 파우스트 관련 서류 검토 및 F/W시즌의 간략한 콘티 및 트리트먼트 작성 업무에 이르기까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는 시간 외에는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좋은 시절은 다 갔네요.”
그 말에 멜리가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런 시절이 있긴 했었나요?”
“하기야, 뭐···.”
“슬슬 출발할까요?”
“지금 바로요?”
“굳이 밍기적 대고 있을 필요 없잖아요?”
“그야···.”
말끝을 흐려 보였던 필상이 체념한 듯 덧붙였다.
“움직이죠.”
“예, 셰프.”
그렇게 멜리와 함께 객실을 나서려던 찰나, 필상이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뭐가요?”
이내 필상이 마냥 느릿하게, 또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어제 ‘멜리는 뚱뚱해’라는 가사에, 괴상한 음을 넣어서 불렀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아뇨, 농담이었어요.”
“농담이요? 거짓말이 아니라?”
필상이 신경질적인 투로 건넨 물음에, 멜리가 먼저 호텔 문을 열고 나서며 답했다.
“그럼 거짓말이라고 치죠, 뭐.”
*
홀리데이에 도착하기 무섭게, 필상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일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홀 테이블 곳곳을 꿰차고 앉아있던 지원자 그룹이, 차례로 셰프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면 형식적인 문답의 시간이 이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필상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지원자 세 명이 집무실을 나섰다. 이내 필상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멜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몇 분 정도라도 쉬는 게 좋겠네요.”
“그러세요.”
필상이 의자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눈을 지그시 감아 보이던 찰나였다. 멜리가 나직이 지원자들을 위해 마련된 의자 한 개를 꿰차고 앉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필상, 그나저나 일반적인 면접과 달리 지원자들의 복장이 각양각색이네요? 복장도 감점 요인인가요?”
“아뇨, 별 비중 안 두고 있어요. 정장을 차려입고 온 지원자들은 격식을 차리려는 의도였을 테고, 캐쥬얼한 차림을 한 이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또 *화이츠(*조리복)을 차려입고 온 이들은 열정을 과시할 의도였을 테니까요.”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멜리가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재차 되물었다.
“그나저나 면접이 너무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한 번에 세 명씩 면접을 진행하는 형식인데도, 빠르면 삼 분. 아무리 길어봐야 오 분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던데···.”
“아뇨. 사실 지원자들 커리어나 포트폴리오는 하나같이 훌륭한 편인데, 홀리데이의 특성상. 또, 여건상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어서요.”
말을 마친 필상이 제 앞에 놓인 탁상을 ‘톡, 톡.’ 두드려가며,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지금 홀리데이에 필요한 요리사는 유능한 요리사가 아니라, 잘 융화될 수 있는 파인다이닝이잖아요? 집단 내에 녹아들어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셈이죠.”
“대부분의 쿡들이 그렇지 않나요?”
“오산이에요. 일반적인 파인다이닝 면접의 지원자들이라면 모를까, 홀리데이는 아트 퀴진 파인다이닝이잖아요? 아마 지원자들 중 태반이 일반적인 쿡들에 비해 개성과 가치관이 뚜렷한 이들일 거예요.”
“어째서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트 퀴진이라는 고상한 영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강한 개성과 뚜렷한 가치관은 양날의 검이에요. 불협화음이나 분란이란 불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땔감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성향이 드센 요리사들을 붙여두는 건 화구 옆에 석유가 담긴 통을 놓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아···.”
“더군다나 어떻게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참가자가 몰렸겠어요? 홀리데이의 명성 덕분에? 아니면, 제가 지닌 네임 밸류 덕에? 아뇨,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확신컨대, 이들 중 일부는 현재 근무 중이던 파인다이닝 업무를 내동댕이친 채로 이곳 면접장에 와서 제 순번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밀리가 제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되물었다.
“면접자들 중 일부가 기회나 여건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니,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네, 맞아요. 더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하루 만에 마음을 고쳐먹고 홀리데이를 등진 채 떠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더군다나 제가 이곳에 붙어서 지속적으로 인사 문제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다지만,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셈이죠.”
말을 마친 필상이 곧장 컵에 담긴 커피를 몇 모금 들이켜고는, 다음 지원자 그룹의 이력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편, 멜리는 그런 필상을 경외감이 가득 서린 눈을 한 채로 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가늠할 수가 없다니까···.’
여태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필상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존재하는 듯했다. 하다못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조차 후에 돌아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일쑤였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 필상이 초능력을 대여섯 가지 정도 사용할 수 있다거나, 두 눈으로 광선 빔을 쏠 수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랬군요.” 하고 답하며 수긍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러있었다.
한때, 그녀는 필상과의 계약을 체결하겠노라는 상부의 결정이 ‘무모한 배팅’이라 여겼던 적이 있다.
처음 필상이 빌리 반 코퍼레이션과 계약을 체결하던 당시, 사 측은 이미 굴지의 아티스트 에이전시 기업이었다. 반면, 필상은? 나이에 비해 꽤 훌륭한 커리어를 갖춘 어수룩한 동양인 소년에 불과했을 뿐이다.
물론 최연소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되지 못한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위약금을 물어내겠다는 특별한 옵션이 걸려 있기야 했으나, 필상의 부진한 성과가 가져올 이미지 타격을 감안해 보면 이 또한 그리 설득력 있는 사유가 되지는 못했다.
빌리 반 코퍼레이션은 ‘마이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곳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불려야만 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결과가 바뀌었다.
필상은 날고 기는 빌리 반 코퍼레이션의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성과와 업적을 이뤄낸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메인스트림 마켓(Mainstream Market)의 중심에 들어서서는,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주목시키는 데 성공했다. TV쇼와 매거진은 그의 시간을 구입하기 위해 연일 비싼 값을 불러대고 있으며, 몇몇 브랜드의 오너들은 꾸준히 그를 자신들의 광고 모델로 삼기 위해 애걸복걸해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행보에 따라 움직이는 자금과 인력의 규모가 달라졌다. 그 덕에, 멜리의 사내 입지 역시 달라진 상황이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인센티브와 상사들의 대우, 파격적인 승진, 입사 동기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필상이 빌리 반 코퍼레이션의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격상한 끝에 입을 수 있던 수혜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기를 잠시.
“필상, 혹시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 같은 거 없으세요?”
간단한 선물로나마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에 꺼낸 질문이었다. 반면, 필상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흠, 글쎄요? 갖고 싶은 물건은 곧장 사는 편이라···.”
“하긴.”
짤막하게 답해 보인 멜리가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던 찰나였다.
“탐나는 물건은 하나 있어요.”
“뭔데요?”
“전용기요.”
“전용기?”
“네, 전용기.”
짤막하게 답해 보인 필상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지원해주는 걸프스트림 여객기 있잖아요? 해외 출장 업무를 볼 때마다 여객기가 탐나더라고요. 뭐, 아직 한참은 멀었겠지만요.”
“그렇군요.”
“왜요? 선물이라도 해주시려고요?”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 보인 멜리가 괜히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우선 면접을 속개하는 게 좋겠네요. 이러다가 한밤중에야 끝나겠어요.”
“아무래도 제가 과로로 쓰러져 봐야 소중히 대해주실 것 같네요.”
말을 마친 필상이 고개를 몇 번 내젓고는, 탁상 위에 놓여있던 내선 전화기를 집어 든 뒤 근엄한 투로 말했다.
“다음 그룹 들여보내 주세요.”
한편, 멜리의 두 눈은 번뜩이는 생각 덕에 생기로 반들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