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194
194
최종장 – I will be back (2)
맨해튼 빌딩 숲 중심부에 위치한, 필상 소유의 파인다이닝 브랜드 ‘식구’의 본사 건물 내부.
널찍한 통유리 벽 너머로 뉴욕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대표실 안으로, 정장 차림의 필상이 서 있는 상태였다.
덧없이 흐른 시간의 흔적이 그런 필상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가뜩이나 찾아보기 힘들던 애티는 어느덧 아예 가신 상태였으며, 본래 잘 훈련된 셰퍼드를 연상시키던 용모는 더욱 늠름해 보였으며 이목구비는 한층 더 뚜렷해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 필상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와서는 힘없이 ‘뚝.’ 떨어져 내렸다.
“하아-.”
이내 푹신한 소파 한 자리를 꿰차고 앉은 채, 서류 검토 작업에 열을 올려대고 있던 멜리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필상,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네. 멜리, 다름 아니라···.”
그 말에 “잠깐, 잠깐만요.” 하고 답해 보인 멜리가 제 시선을 여전히 서류 위에 고정해둔 채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구의 종말이나, 세계 금융의 위기와 비슷한 수준의 고민이 아니라면 보고를 먼저 올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필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자 멜리가 물 흐르듯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 식구 홀딩스 리미티드와 식품회사 L&K 그룹의 협약이 정식적으로 체결됐어요. 빠른 시일 내로 공장 부지를 확보한 뒤, 미국 전역의 음식점에 특제 퓌레 몇 종을 납품・판매해 볼 생각이에요. 루트를 확보한다면, 급식 사업 쪽에도 손을 대 볼 요량이고요.”
“끝인가요?”
“아뇨. 아직 한참 남았어요. 라스베가스에 신규 론칭을 앞둔 *비스트로(*Bistro:저가형 레스토랑) 관련 보고서를 메일로 송부해 뒀으니, 검토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네요. 그리고 방송 출연 빈도를 조금 더 높여 볼까 해요. 다름 아니라, 이번 미슐랭 스타 최다보유 기록 달성 이후로 세계 각국의 셰프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 초빙 섭외가 빗발쳐서요. 거절하기에는 조건이···.”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려오는 중이었으나, 필상의 반응은 영 덤덤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머릿속 한편에 똬리를 튼 생각 탓에, 멜리의 업무 보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회귀라는 기현상을 맞이한 지 불과 십 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몹시 빠른 속도로 인생이 바뀌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눈덩이를 굴리며 내려오기라도 할 때처럼, 성공과 영광의 크기가 점차 배가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필상은 미슐랭 가이드 역사상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거머쥔 셰프이며, 그와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보유한 셰프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얼마 전에는 포보스지에서 발표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돈을 번 셰프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획득했음은 물론, 외식업계 내에서 가장 높은 브랜드 가치를 지닌 셰프로 자리매김했다.
그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파인다이닝 브랜드 ‘식구’의 지점은 전 세계 각지에 분포되었으며, 브랜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설립한 회사는 상장까지 무사히 마치며 식구 홀딩스 리미티드라는 이름으로 다시 거듭났다.
명예를 얻자, 부(富)가 따라왔다.
비록 타고 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지만 차고에 세워져 있는 본인 명의의 슈퍼 카를 시작으로, 사 측으로부터 지원받은 걸프스트림 여객기, 말리부 해변 인근에 위치한 대저택, 시간이 날 때마다 소더비 경매를 통해 낙찰받는 중인 예술품 컬렉션, 구매를 코앞에 두고 있는 태평양 한복판의 무인도와 호화 요트에 이르기까지···.
삶이 달라졌다.
수입보다는 세금을 더 크게 걱정해야 하는, 원하는 게 있다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구매할 수 있는, 부족한 것이라곤 오직 시간뿐인 삶을 누리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재미있었다. 사람 욕심이 바다와 같다더니, 그 어떤 성공으로도 만족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연신 ‘더’라는 말을 되뇌어가며, 기계처럼 일에 파묻힌 채로 지내왔다.
앞으로도 쭉 지금처럼 지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앞으로는 더 큰 명예, 더 큰 부가 손에 들어올 거라고. 그렇게 손에 넣은 것들을 원동력 삼아, 다시 힘을 내서 나아가면 그만일 것이라고···.
적어도 오늘 아침, 한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제서야 새삼 깨달았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거늘,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세상에는 명예나 성공, 돈 따위 것들로 절대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필상-?”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되물어 보인 멜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가며 심각한 투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지구의 종말이나, 세계 금융의 위기에 버금가는 심각한 고민을 품고 계신 것 같네요.”
“이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상이 긴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며칠이 필요하신데요?”
“며칠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럼, 몇 달···?”
멜리가 불안감이 가득 서린 투로 건넨 물음에, 필상이 무어라 답하는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내 널찍한 대표실 안으로 침묵이 드리우기를 잠시, 멜리가 괜히 손에 쥔 서류를 만지작거려가며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리에요. 적어도 향후 6개월간은 필상의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야 하는 상황인 거 아시잖아요?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어요. 더군다나 처리하셔야 할 업무 역시 산더미처럼···.”
“멜리,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거예요. 뒤처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케줄이 문제인 거예요? 그동안 잘 버티셨잖아요? 그런데, 대체 어째서 이토록 갑자기···.”
쏟아내듯, 빠르게 물음을 던져대던 멜리가 제 머리칼을 위로 쓸어넘겨 가며 재차 되물었다.
“좋아요, 일단 이유라도 들어보는 게 좋겠네요.”
단순히 피로 때문에 내린 결정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비록 스스로의 살인적인 스케줄에 대한 투덜거림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는 필상이라지만, 실은 필상이 천성적인 워커홀릭이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한차례 “이유.” 하고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멜리의 맞은편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나직이 답했다.
“제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대체 어디에 계셔야 하는 건데요?”
“멜리, 처음은 실수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니라는 말 아시죠?”
“네, 자주 인용하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마친 필상이 물기가 묻어나는 투로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모든 걸 잊어가고 계세요.”
“설마···?”
“알츠하이머.”
“이런.”
짤막하게 답해 보인 멜리가 곧장 말을 이었다.
“정말 유감이네요.”
필상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찌나 각별히 생각하는지를, 너무도 면밀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애초에 파인다이닝의 이름이나, 회사의 이름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두 필상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몇 평 남짓한 자그마한 규모의 식당에서 비롯된 이름들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녀는 필상의 ‘첫 소비’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꽤 많은 액수의 돈을 벌게 된 필상의 첫 소비는, 독일 회사의 세단 차량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필상 본인이 아니라 아버지 몫의 차량이었고 말이다.
째깍, 째깍. 널찍한 대표실 안으로 초침 소리만이 공허히 울려 퍼지고 있기를 잠시. 무언가 결심하기라도 한 듯, “좋아요.” 하고 되뇌어 보인 멜리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제가 만약 정말 훌륭한 에이전시였더라면, 필상의 귀국을 결단코 반대했어야 할 거예요.”
“멜리,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하실 거 없어요. 필상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내린 결정일 뿐이니까요. 더군다나, 아버지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죠.”
괜히 퉁명스레 답해 보인 그녀가 제 옆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겨 가며 재차 덧붙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결정에 따른 책임은 확실히 지셔야 할 거예요. 막대한 손해가 뒤따를 거예요. 아마 위약금 명목으로 여태껏 번 돈의 절반 이상을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요.”
“네, 인지하고 있어요.”
“어쨌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필상의 잠정적 은퇴가 낳을 여파들을 최대한 매끄럽게 수습하는 게 제게 주어진 일이겠죠. 위약금을 최소화하는 와중에, 식구 홀딩스 리미티드의 주가를 최대한 지켜볼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재차 필상을 뚫어지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대신 저랑 두 가지만 약속해요.”
“말씀하세요.”
한차례 “첫 번째.” 하고 힘을 주어 말해 보인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제 등을 소파 등받이에 편히 누이며 덧붙였다.
“이대로 도망치듯 은퇴하시는 건 곤란해요. 가족사로 인해 대외적인 스케줄은 당분간 소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식 인터뷰를 발표하되, 한국으로 돌아가신 이후에도 식구 홀딩스 리미티드 소속 파인다이닝의 레시피 등은 지속적으로 구상・설계해주셨으면 해요. 그 밖에도 한국에서 메일 및 통화를 통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들은, 되도록 손에서 놓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고요.”
잠시간 망설이던 필상이 마지못해 답했다.
“네, 그럴게요.”
마음 같아서는 일을 아예 손에서 놓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려를 받게 된 만큼, 자신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말이다. 또, 이쪽이 추후에 있을 복귀를 감안했을 때에도 훨씬 효율적인 방안이었고 말이다.
“다음, 두 번째.”
다시금 힘을 주어 말해 보인 멜리가 애잔한 마음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필상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주어진 시간에 더욱더 충실히 임해주세요. 아마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시든, 결국 언젠가는 후회하실 수밖에 없을 거예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주어진 순간에 조금 더 충실할 것을, 집중할 것을···.”
말끝을 흐려 보인 그녀가 재차 말했다.
“먼저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본 사람의 조언이에요. 기분 나쁘셨더라도, 여태껏 한 번도 주제넘은 말을 했던 적은 없으니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탁.
검토 중이던 서류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협탁 옆에 놓인 쓰레기통 안에 가볍게 던져넣은 그녀가,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애써 활기찬 투로 말했다.
“그럼 슬슬 폭탄을 터트릴 준비를 시작해볼까요?”
그녀가 제 주먹을 들어 올려 보이자, 필상이 그녀의 주먹 위로 제 주먹을 가볍게 맞대며 답했다.
“Boom-.”
*
[ 영 셰프, 필상. 향후 6개월간의 스케줄 모두 취소, 에이전시 측 공문에 따르면 건강을 비롯한 개인적인 문제. ] [ 흔들리는 식구 홀딩스 리미티드, 모래로 황급히 쌓아 올린 성은 결국 허물어지는가? ] [ 에이전시 빌리 반 측 관계자 曰 “영 셰프는 그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결정 내린 것뿐,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해명에도 불구하고 연신 하락하는 주가. ] [ 영 셰프, 보유하고 있던 미슐랭 스타 전부 반납? 미슐랭 가이드 측 관계자 왈, “아직 확정된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넣었다.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와 칼럼이 여름철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멜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이야, 으레 있는 일인 데다 곧 지나갈 일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위로해주는 중이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잊는 게 답이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보지 않으려 노력이라도 하는 게 답일 것이다.
“하아.”
저도 모르게 내쉰 깊은 한숨이 차창 위로 고스란히 맺히던 그때였다. 운전석을 꿰차고 앉아있던 택시 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필상의 얼굴을 힐끔힐끔 엿보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이내 필상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어 보인 뒤, 곧장 요금을 치르고는 차량에서 내려섰다.
집.
꼬박 몇 년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잠시 묘한 감정에 휩싸일 뻔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다름 아니라, 마당 한복판에서 트레이닝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로 주차된 차량에 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있는 아버지와 곁을 지키고 서 계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여보, 그만 들어가자니까 그러네. 비 소식도 있는데, 공연히 세차는 무슨 세차에요?”
“것 참, 쫑알쫑알 시끄럽게! 도와줄 거 아니면 들어가 있어. 비 한바탕 쏟아지면, 다시 세차하면 그만이지.”
“하이고, 이 양반아. 차라리 출장 세차를 부르든 하시지. 무슨 다 늙어서까지 고생을 사서 하시고 그래요?”
“뭘 믿고 내 차를 맡겨? 대충할지, 막할지 어떻게 알고? 그냥 내가 직접 하는 게 속 편해. 됐으니까, 거기 워시 매트 좀 줘봐.”
어머니께서 제 미간을 한껏 찡그리신 채로, “워시, 뭐요?” 하고 되묻던 찰나였다. 어느새 지척에 다다른 필상이 입가에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는 마당 한편에 놓여있던, 워시 매트를 능숙하게 제 손에 끼워 넣고는 차량 보닛을 닦으며 덧붙였다.
“얼른 깨끗이 닦고 광내고, 세차 마친 뒤에 들어가서 다 함께 밥 먹어요. 배가 많이 고파서.”
“됐다, 들어가자.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뇨, 저는 괜찮아요. 하던 것 마저 끝내고 들어가셔야 마음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그 말에 아버지께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하셨다.
“그래, 그럼 마저 끝내고 들어가서 밥 먹자. 뭘로 해주랴? 순두부찌개? 아니지, 고등어 한 마리 구워줄까?”
이내 어머니께서도 활짝 미소를 머금으신 채 나직이 답하셨다.
“그냥 있는 걸로 간단히 먹어요. 원래 타지 나가 있다 보면 그런 식탁이 가장 그리운 법 아니겠어요?”
“그래요,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그냥 있는 것들로 간단히 차려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전에, 늘상 함께 식사하던 때처럼요.”
필상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어머니께서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워시 매트 한 개를 집어 들어서는 손에 끼워 넣으셨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또 정성스레 천천히 차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식구 사이로, 간만에 재회한 가족들이 주고받을 법한 대화가 잔잔히 오다니기 시작했다.
부쩍 야위었다. 끼니는 잘 챙긴 것 맞느냐. 잠은 제대로 자며 일했느냐. 바쁜데 짐이 될까 선뜻 연락을 못 했다. 그래도 먼발치에서나마 항상 너를 기도하고 응원했다.
다들 일상적인 척 덤덤한 목소리로, 일상적이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상의 시선은 연신 아버지에게로 향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 소식은 들었습니다.
다시금, 모든 걸 잊어가고 계신다고요. 손 쓰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요. 결국은 전에 그랬듯, 필연적으로 모두 잊게 되실 거라고요.
잠깐이나마 알량하게 모두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오만하게 생각했건만, 애석하게도 모든 걸 잊어가시는 아버지를 다시 뵙습니다.
아버지.
부디, 나쁜 기억만 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기억을 잊으시느라 발생한 공백은 제가 좋은 기억으로 꽉꽉 채워드릴 테니, 부디.
날이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하나, 필상은 세차를 빨리 끝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마냥 느릿하게 차를 닦아댔다. 매주 일요일, 단연 이번 생뿐 아니라 지난 생에서도.
아버지께서 어떤 생각을 품은 채, 차를 닦아내셨을지를 짐작해보기 위해 갖은 애를 써가며.
*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으레 그래 왔듯, 하염없이.
또, 무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