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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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3 – 기회는 늘 위기 속에서 (1)
문득 이런 게 남현철 PD가 말했던 ‘방송이 지닌 힘’인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작 며칠만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지도 모를,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긴 하구나.
이내 필상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투자자요?”
한차례 “응.” 하고 짧게 답해 보인 강훈 셰프가, 사뭇 밝은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내 레스토랑 ‘돌체 모멘트’(Dolce Moment)의 3호점 투자자를 물색하던 도중에 우연히 연이 닿게 된 분이야. 부동산 관련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미식에 대한 조예도 깊으시고, 성격도 젠틀하시고···.”
“네, 그런데요?”
“며칠에 걸쳐서 조건을 조율해봤는데 의견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질 않아서 아쉽게 결렬됐거든.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면 딱히 다른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런칭 장소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던 거고.”
말을 마친 강훈 셰프가 제 앞머리칼을 슬쩍 슬어올려 보이며, 한층 더 진중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분은 국내 런칭을 희망하시는데, 나는 해외 쪽이 아니면 분점을 낼 생각이 없는 상황이거든. 사실 분점을 늘리고 싶은 이유가 미슐랭 스타를 더 확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데, 굳이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가 언제 상륙할 지도 모를 한국에 지점을 낼 필요가 없잖아?”
그 말에 필상이 “아···.”하고 침음을 흘려보였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도 미슐랭 가이드가 발을 들이리란 소문이 무성하긴 했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대로라면 2016년이 저물어갈 무렵에서야 미슐랭 가이드 코리아의 초판이 발행될 예정이기도 했고 말이다.
“기회가 없어서 미처 말을 못 해줬는데, 어쨌든 나는 이제 슬슬 뉴욕으로 돌아가려고 준비 중인 상황이야.”
“뉴욕으로요?”
“응. 이제 2호점인 청담 분점 매출도 안정화가 됐으니 뉴욕 본점부터 한 번 재정비 한 뒤, 해외 분점 런칭에 주력해보려고.”
이내 필상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보였다. 어차피 해외 분점 런칭을 목표로 두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가급적이면 해외 투자자들과 협업을 추진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일 터였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은 물론이고, 여러 거물급 셰프들이 남긴 경영 선례들, 하다 못해 투자자들의 왕래가 쉽다는 장점까지 있을 터였으니 말이다.
“저, 셰프님. 그런데 어쩌다가 그 기회가 저한테까지 오게 된 거예요?”
필상이 조심스러운 투로 꺼내든 물음에, 강훈 셰프가 손가락을 한 번 “딱-.” 소리가 나게끔 튕겨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 셰프 이야기를 넌지시 한 번 꺼내봤거든. 투자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정셰프가 상당히 매력있는 투자 상품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제가요?”
“일단 요리 실력이야 이미 어느정도 입증이 끝난 셈이고, 경영 실적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파미유’라는 좋은 포트폴리오 자료도 있고, 더군다나 인지도 역시 날이 다르게 격상하고 있는 중이고···.”
이내 필상이 제 미간을 살짝 좁혀가며 되물었다.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주어지고 나니 기쁜 마음보다는, 의구심이 조금 더 먼저 드는 것 같네요. 만약 제가 투자자 입장이라면, 저처럼 어린 셰프한테 쉽사리 수억 대의 투자금을 던져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응, 아마 그렇겠지. 일단 지금 당장은 결정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잖아? 이제부터 검증을 시작하겠지. 과연 망설임 없이 투자해도 될만큼 반등할 종목인지, 아닌지 말이야. 물론 결과는 정 셰프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을 테고.”
말을 마친 강훈 셰프가 필상의 두눈을 바라보며 말을이었다.
“일단 미디어가 지니고 있는 힘 덕분에, 간신히 관심을 끄는데까지는 성공한 것 같네. 좋은 기회가 될 여지가 충분해 보이니까, 최대한 한 번 잘 붙잡아 봐.”
“번번히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영 죄송스러울 따름이네요. 도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투자자 분 간단한 인적사항 담겨 있는 서류니까, 시간 날 때 한 번 쭉 훑어보고 연락 드린 다음 미팅 일자부터 잡는 게 좋을 거야. 혹시 혼자 만나기 영 껄끄러우면, 내가 동행해 줄 수도 있으니까 편히 말하고.”
“아뇨, 괜찮습니다. 밥상 차려주셨는데, 아예 떠먹여 달라고까지 할 수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의존적인 모습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할 여지도 농후해 보이고요.”
한차례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답해 보인 필상이, 시선을 슬쩍 옮겨서는 제 손에 들려있는 서류봉투를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랄까?
앞서 강훈 셰프에게 말했던 대로 갑작스레 기회가 넝쿨째 굴러 들어오고 나니,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 했다.
아마 회귀 이전의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셰프들이 발을 헛딛으며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뼈저리게 느낄 수 있던 한 가지 교훈 때문이리라. 좋은 기회를 눈앞에 둔 순간일수록, 더욱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건네야 할 것이다.
욕심 탓에,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
강훈 셰프로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어느덧 꼬박 며칠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피곤하다 못해, 어지러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매일 파미유에서 여섯 팀의 예약손님들을 상대했으며, 영업이 끝난 뒤에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들과 한바탕 씨름을 벌여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급물살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 마냥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투자자’와의 첫 번째 미팅일이 밝은 상황이었고 말이다.
– 오늘 저녁에 뵙기로 했다고 했지? 몇시라고 했지?
“여섯 시요.”
짧게 답해 보인 필상이 귀에 바짝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살짝 떼어내서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재차 덧붙였다.
“이제 앞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남았네요.”
그리고는 곧장 전신 거울 속 제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필상은 말끔한 *커스텀 테일러(*custom-tailor) 차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름 아니라,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고자 미팅일자가 잡히기 무섭게 맞춤 정장 제작을 의뢰했던 것이다. 미팅 당일인 오늘 오전에 접어들어서야 아슬아슬하게 제작이 끝난 상황이었고 말이다.
“지금 막 주문한 정장 찾아서 입어봤어요.”
– 그래? 어때?
한차례 “그냥 뭐···.”하고 얼버무려 보인 필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럭저럭 마음에 드네요.”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정장을 갖춰 입어 본 횟수가 손에 꼽을 지경이었던 까닭일까? 말끔한 정장 차림의 제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노라니, 괜히 낯이 뜨겁고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만 같았다. 역시 조리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내 수화기 너머의 강훈 셰프가, 짐짓 덤덤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만, 그래도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주눅들거나 긴장할 필요 전혀 없는 거 알지?
“그럼요, 제 걱정은 않으셔도 되요. 일단 미팅 마무리한 뒤에, 어떻게 됐는지 결과만 간단히 문자로 남길게요.”
이런저런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뒤,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이내 필상이 곧장 양장점을 나선 뒤,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는 창가에 제 머리를 살포시 기댄 채,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지난 삶 속에서 거물급 투자자들과 숱하게 대면해 본 덕인지, 딱히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피로를 쉽게 떨쳐낼 재간이 없었을 뿐.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라도 부족한 수면을 보충할 요량이었다.
*
약속 장소는 강남에 위치한 골든 팰리스 호텔 내의 한식 레스토랑 ‘*청목’(*靑木)의 프라이빗 룸이었다.
레스토랑 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개량 한복 차림의 종업원이 필상을 룸으로 안내해주었다. 룸에 들어선 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시간보다 삼십 분 앞서 도착한 상황이었다. 가슴을 졸여가며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거나, 늦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속히 움직이고 기다리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던 탓이었다.
이윽고, 약속시간인 일곱 시 정각이 되던 찰나. 굳게 닫혀있던 미닫이 문이 활짝 열리며, 머리가 살짝 벗겨진 50대 남성이 웃는 낯을 한 채 프라이빗 룸 안으로 들어섰다.
“TV로만 뵙던 분을 직접 뵈니 감회가 상당히 새롭네요. 반갑습니다. 송승철이라고 합니다.”
“아, 네.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정필상입니다.”
이내 투자자 ‘송승철’이 필상의 맞은 편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문앞을 지키고 서있던 종업원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을 해보이고는 능숙하게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 필상은 덤덤한 얼굴을 한 채, 그런 송승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말이다.
송승철.
나이는 52세로, 일전에 강훈 셰프에게 전해들었던 대로 부동산 사업을 통해 자산을 축척해 온 재력가였다.
뿐 아니라 십수년 간 미식 동호회 활동을 해온 터라 미식에도 꽤나 조예가 깊은 것은 물론이고, 국내 미식 평론가 및 칼럼리스트들과의 *인프라(*Infra) 및 네트워크 역시 상당히 두터운 편에 속했다.
또한 취미삼아 유명 웹진에서 아마추어 평론가 자격으로, 평론을 연재했던 이력도 있었고 말이다.
모두 하나같이 함께 협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가정했을 때, 이래저래 이점이 될 만한 부분들이랄 수 있었다.
그때 주문을 마친 송승철이 다시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친절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건네왔다.
“정필상 셰프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메뉴를 골라드려도 될까요? 자주 오는 곳인지라, 평이 엇갈리지 않는 꽤 괜찮은 구성의 코스를 알고 있거든요.”
“아, 예. 그럼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다시금 종업원과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송승철이, 손목에 차고 있던 고가의 시계를 푸르며 재차 말을이었다.
“우선 일 이야기부터 먼저 끝낸 뒤에, 여유롭게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셰프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네. 저도 그 쪽이 나을 것 같네요. 어차피 오늘 나눌 이야기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송승철이, 잠시 틈을 두고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결론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런칭을 희망하는 장소는 ‘일산’입니다. 굳이 새로운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느낌보다는, 셰프님께서 운영 중인 원 테이블 레스토랑 파미유가 근처로 확장 이전한다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내 필상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예···?”하고 되물어보였다. 다름 아니라, 강훈 셰프에게 사전에 전해들었던 조건과 지나치게 큰 차이가 있었던 탓이었다.
필상이 분명 날이 선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송승철은 전혀 괘념치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레스토랑 경영에 관한 전권 및 메뉴 구성에 대한 권한은 오롯이 제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내 필상이 멍한 얼굴로 송승철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제 뒤통수를 망치로 거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멋대로 약속되어 있던 조건을 바꿨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일단 몇 가지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저는 강남, 청담, 이태원 등. 소위 말하는 중심상권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둔 채로 투자자를 물색 중인 상황입니다. 분명 강훈 셰프님께서도 그렇게 전달해주셨을 텐데요?”
이내 송승철이 “흠···.”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뒤,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셰프님께서 말씀하신 중심상권들은 기본 권리금만 하더라도 2억원에서 출발하는 추세입니다. 규모 있는 레스토랑이라면 몇 곱절로 뛸 테고요. 그럼 당연히 기본 투자금조차 회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불편해질 상황을 만드느니···.”
그가 계속해서 무어라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말을 끊었다.
“그럼 경영권 및 메뉴 구성에 대한 결정권을 요구하시는 이유는요?”
한차례 “간단합니다.” 하고 답해 보인 송승철이, 제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되물었다.
“경영에 있어서도, 미식에 있어서도 제가 셰프님보다 경력이 깊지 않습니까? 당연히 제가 결정권을 거머쥐는 게 옳다고 봅니다만.”
“뭐,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강훈 셰프님과 조건을 조율하시던 때에도, 지금처럼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셨습니까?’
갑작스레 날아든 날카로운 말 탓에, 송승철이 화들짝 놀라서는 “예?”하고 되묻던 찰나였다. 필상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스산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재차 말을 건네왔다.
“아니면, 제가 어려서 우스워 보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