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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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5 – 필연 (1)
그렇게 며칠이란 시간이 더 흘렀고, 모든 사후처리는 음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보도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빌리 반 코퍼레이션’(Billy Ban Corperation) 측과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도, 또 국내 로펌이 미국의 법무법인 리더스미스 측에게 이런저런 자문을 받아가며 법적 대응을 대행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아직까지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던 것이다.
모든 일들이 수면 아래에서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오직 중심점에 서있는 필상만 느긋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원 테이블 레스토랑 ‘파미유’ 역시 다음 주 화요일부터 영업을 재개하기로 공지해 둔 상황인데다가, 이번 주에는 따로 잡혀 있는 방송 녹화 일정조차 아예 없는지라 모처럼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늘어지도록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그간 바쁜 일정 탓에 미루고 있던 이태리어 공부를 하거나, 사놓고 시간이 없어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요리 관련 서적들 및 다큐멘터리 DVD 등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
사락-.
펼쳐놓은 책의 책장을 한 장 뒤로 넘겨보인 필상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지면 위로 새겨진 좁쌀만한 글씨들을 유심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셰프가 직접 저술한 자서전 *원서(* 原書)였다.
비록 바로 곁에 두껍기 그지없는 이태리어 사전을 펼쳐둔 채로 한 줄, 한 줄 직접 해석을 해가며 읽고 있는 중인지라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마냥 더디기만 할 따름이었지만.
그때, 책상 한 귀퉁이에 대충 내려놓았던 휴대폰이 진동해대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인듯 보일 따름이었고 말이다. 이내 필상이 “후우-.”하고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뒤, 곧장 전화를 받았다.
– 필상, 통화 나누게 되어 정말 영광이네요. 저는 앞으로 필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된 빌리 반 코퍼레이션 에이전시 3팀의 ‘멜리’라고 해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온 낭랑한 음성에, 필상이 “아!”하고 침음을 흘려보였다. 드디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업무 및 일정을 도맡아 관리해 줄 담당자가 배정된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전화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야 드디어 며칠간의 무료한 생활의 마침표가 찍히리란 기대감도 덕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목소리가 자연스레 한껏 고무되는 듯 했다.
“멜리,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안 그래도 담당자가 배정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어서 그런지, 더 할 나위 없이 반갑게 느껴지는군요.”
– 혹시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다름 아니라, 중요한 전달사항이 몇 가지 있어서요.
필상이 펼쳐져 있던 책장을 덮어보이며 “그럼요, 물론입니다.”하고 답해보이자, 멜리가 곧장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우선 말씀드렸다시피 앞으로 제가 필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만약 사측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나 문의 사항이 생긴다면, 언제든 주저 마시고 제 개인 연락처로 연락해주시면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 그럼 일단 본론부터 말씀드리도록 하죠. 일단 필상이 저희 빌리 반 코퍼레이션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내일을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짤막하게 답해 보였던 필상이 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려가며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실은 안 그래도 소식이 없어서 담당자가 배정되고 나면 한 번 여쭤보려고 했었거든요. 보도가 미뤄진 이유가 있는 건가요?”
– 네, 맞아요. 어떻게 하면 필상의 공식적인 세계무대 데뷔 소식을 최대한 화려하게 알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해야 이번 계약과 관련된 정보를 가장 가치있게 알릴 수 있을 지에 대한 내부회의가 며칠에 걸쳐 진행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결과···.
잠시간 말끝을 흐려 보였던 멜리가 재차 물음을 건네왔다.
– 필상, 혹시 ‘아트 컬리네리’(Art Culinaire) 라는 푸드매거진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그럼요, 물론이죠.”
요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서양요리 쪽에 뜻을 두고 있는 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미국 내 푸드매거진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필상 본인만 하더라도 회귀 이전의 삶 속에서 정기적으로 구독했던 바 있는 매거진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매거진의 특성 때문에 많고 많은 푸드매거진들 중, 프로 셰프들이 가장 유의깊게 지켜보는 매거진이랄 수 있었다.
“전세계의 프로페셔널 셰프들을 소개해주고, 그들의 파인다이닝 레시피를 담아내는 곳이잖아요? 더군다나 다른 잡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높은 퀄리티의 음식 사진을 선보이는 곳이기도 하고요.”
– 네, 맞아요.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다름 아니라, 사실 필상의 합류 소식 관련 보도가 늦춰진 이유가 아트 컬리넬리의 이번 달 발행호가 내일 발행될 예정이기 때문이거든요.
필상이 “설마···.”하고 나직이 말해보이던 찰나, 멜리가 한차례 낮은 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 저희는 ‘아트 컬리넬리 매거진’을 필상의 데뷔 무대로 결정했습니다. 이번 달 발행 호에 수록될 특집 칼럼을 통해, 필상의 계약사실이 최초로 보도될 예정이에요. 후속 보도야 어차피 관련 사실을 확인한 타 매체들이 알아서 해줄 테고요.
“맙소사,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제가 아트 컬리넬리의 이번 달 발행호에 실리게 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이내 수화기 너머의 멜리가 “네, 바로 그거죠.”하고 답해보였다. 이제야 자신이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 업체인, 빌리 반 코퍼레이션과 계약했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듯 했다.
아트 컬리넬리에 실린다는 말인 즉, 세계 각지의 프로 셰프들에게 제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에게는 목표로하고 있는 꿈들 중 하나일지도 모를 엄청난 일을, 이토록 쉽고 우습게 이뤄줄 줄이야···.
– 그리고 필상의 향후 활동 방향 및 커리큘럼 설계를 위한 내부회의가 마무리 됐습니다. 회의 결과는 만장일치였지만, 아무래도 필상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요.
“네, 말씀하세요.”
– 가급적이면 자국인 한국에서의 활동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짓고, 활동권을 미국으로 옮기는 쪽이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말씀드렸다시피, 가장 중요한 건 필상의 의사겠지만요.
그 말에 필상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계약을 체결하던 과정에서, ‘마틴’에게 전해 들었던 바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명확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흐지부지 잊고 있던 상황이었고 말이다.
필상이 선뜻 답하지 못한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멜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물론 미국으로의 활동권 변경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자국에서의 생활 및 스케줄을 정리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드릴 예정이에요. 필상,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번 주말 안에는 확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사측 결정에 따라 ‘해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면, 해외에 레스토랑을 런칭하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자금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 아뇨, 확답만 주신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사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드릴 거예요. 상권 분석 및 부지 선정을 시작으로, 인테리어 및 설비, 투자자 유치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모든 과정을요. 필상은 그저 결정만 내려주시면 돼요.
이내 필상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이기에 이르렀다. 다름 아니라, 멜리가 열거한 조건들이 더 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탓이었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상권 분석 및 부지 선정 작업을 거친 뒤 최상의 조건으로 입점할 할 수 있을 터였고, 아티스트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춘 이들에게 인테리어 및 설비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골 머리를 썩히던 투자자 유치 역시 마찬가지. 빌리 반 코퍼레이션의 에이전시 사업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할 투자자들이라면, 지천에 널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만 한다면, 국내가 아닌 해외의 중심 상권에서. 제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런칭하며, 셰프로서의 화려한 데뷔를 맞을 수 있으리란 뜻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어쨌든, 오늘 전달해드릴 사항은 여기까지에요.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 예. 저야말로요.”
통화를 마친 뒤, 필상이 마냥 심각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 채로 제 휴대폰 액정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해외 활동.
분명 염두에 두고 있던 바이기는 했다. 자신이 품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필연적으로 해외 무대로 나아가야만 할 테니까. 다만, 이토록 빠르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을 뿐.
이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필상이, 도로 자신의 담당자인 ‘멜리’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한 치의 굴곡조차 없는 투로 말했다.
“멜리, 죄송해요. 다름 아니라 아무래도 오래 붙들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인 것 같아서요.”
수화기 너머의 멜리가 “네···?”하고 되물어 보이던 찰나, 필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채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지구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국이 그려져 있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보이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사측 결정에 따를게요.”
– 그럼···?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준비가 부족하지 않을까 고민했었으나, 글쎄? 이미 회귀 이전의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유충으로서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이 정도 준비를 했는데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다면 준비여부가 아닌 자질의 문제인 것이다.
때가 됐다.
이제 달러를 벌 때다.
*
다음 날, 아트 컬리넬리 매거진의 이번 달 발행호가 정식적으로 발간됨과 동시에 온・오프라인 상의 판매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또한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온갖 ‘*외신’(外信) 및 국내 매체들이 그 소식을 앞다투어 옮겨나르기 시작했고 말이다.
– 필상, 좋은 아침이네요.
한 편, 필상은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 담당자 멜리의 전화 탓에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이내 필상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시계를 힐끔 바라보고는, 반쯤 잠겨있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네, 좋은 아침. 그런데 뉴욕은 지금 한밤 중 아니에요?”
한차례 “흠, 그럼 굿 이브닝···?”하고 되물어 보인 멜리가, 사뭇 밝은 투로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어쨌든, 혹시 잠깐 통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멜리가 앞서 보여주었던 목소리와 달리 다소 상투적인 투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다름 아니라, 필상을 주제로 한 칼럼이 수록되어 있는 아트 컬리넬리 매거진의 이번 달 발행호가 정식적으로 유통・판매되기 시작했어요.
“맙소사, 제가 잠든 사이에 큰 일이 있었네요. 웹 반응은 조금 어때요? 좋은 편인가요? 아니면?”
– 아쉽지만 기대치에 조금 못 미치는 반응이에요. 안타깝게도, 기사들이 보도된지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메이져 웹 뉴스 페이지들의 메인화면에서 밀려났거든요.
“음, 안 좋은 소식이로군요.”
– 메이져 웹 뉴스 페이지들이 으레 그렇잖아요? 거의 분 단위로 토픽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니, 이 정도 건수로 몇 시간이라도 버티고 있던 게 대단한 셈이죠. 그런데 사실 상황이 많이 안 좋기는 해요.
“잠시만요, 안 좋은 소식들이 더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 것 같은데요?”
한차례 “네, 맞아요.”하고 답해 보인 수화기 너머의 멜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