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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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7 – 제 정신이 아니로군 (2)
자리가 끝맺어진 것은 새벽 네 시가 다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조엘과 에밀이 파미유를 나선 뒤, 필상은 곧장 홀과 주방을 치워야했다. 어제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터라, 오늘로 넘어와 버린 마감 업무를 마치고나니 꼬박 다섯시였다.
소름끼치게도, 다시금 기나 긴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에 접어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암울한 현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우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클래식 음악부터 어떻게 하는 게 수순인 듯 보였다. 잔잔한 곡조가, 자신을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게끔 만들고 있었으니까. 곧장 플레이 리스트를 손봤다. 정적이고 우아한 클래식은 집어치우고, 하나같이 경쾌하고 신나는 곡조의 재즈로 대체했다.
그 다음에는 가게 카운터 PC로 오늘자 예약 손님들의 앙케이트를 확인했고, 곧장 오늘 선보일 메뉴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 술에 잔뜩 취하기라도 한 것 마냥 머리가 지끈대고 정신이 몽롱했다.
애꿎은 펜 끄트머리를 질겅질겅 씹어가며 생각을 쥐어 짜내다시피 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전에 우연히 접했던 모 대학의 연구자료가 떠올랐다. 다름 아니라,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한 사람에 비해 상황 판단능력이 몇 배나 더 떨어진다는 내용의 연구자료였다.
“셰프님, 설마 아직까지 안 들어가신 거예요?”
아침 여덟 시, 막 레스토랑 안에 발을 들인 이정준이 인사보다 먼저 건넨 물음이었다.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맙소사···.”
이내 필상이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선반에 오늘 선보일 코스, 타임 별로 정리해서 붙여뒀어요. 밑작업도 거의 다 마쳐뒀고요.”
“대체 언제요? 잠은 주무셨어요?”
“네, 가게에서 눈을 뜨니까 집에서 잘 때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더라고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해 보인 필상이 나직이 덧붙였다.
“앞으로도 종종 가게에서 잘 까봐요.”
“좋은 발상은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잠깐 씻고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머지 준비 하고 있을게요.”
이정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준 뒤,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차디 찬 물로 몸을 씻었다. 나약한 생각들과 피로가 함께 씻겨져나가는 것만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파미유의 주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영업 준비가 모두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첫번째 예약손님들의 방문까지 고작 5분 가량 앞두고 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금 하루가 시작되었다.
*
시간은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흘렀다. 없는 정신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다보니 어느덧 하루 끝자락에 접어들어 있던 것이다. 이내 필상과 이정준이 주방 마감 업무에 돌입했다. 남은 식재료에 라벨을 붙여 정리하고, 바닥과 화구를 광이 나도록 공들여 닦는 등 말이다.
고되지만, 순탄한 하루였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손에 묻은 물기를 조리복에 대충 문질러 닦아내고, 하루 내내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휴대폰을 집어들어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강훈 셰프를 시작으로, 최영도 셰프, 그 밖에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을 만큼의 친분이 있는 여러 셰프들로부터 도합 십수 통 가량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는 상황이었다. 뿐아니라, 빌리 반 코퍼레이션 측 담당자 멜리로부터도 대여섯 통 가량의 전화가 걸려왔던 상황이었고.
바보가 아니라면 일이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다. 이내 필상이 곧장 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심장이 옥죄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한 편으로는 ‘설마 벌써 로맹 가리의 칼럼이나, 셰프 조엘의 지원사격이 있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과 한두 시간 전쯤에야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발을 들이는데 성공했을 테니까.
덕분에 불안이 치솟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로 국내 웹 뉴스 연예면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하거나,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는 생면부지의 셰프에게 스페츌라로 흠씬 두들겨 패주겠다는 식의 경우 없는 폭행 예고를 듣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맙소사,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함이 잔뜩 서려있는 멜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내 필상이 저도 모르게 묵은 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최대한 덤덤한 어투로 되물었다.
“미안해요, 휴대폰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어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어제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 알고있어요. 셰프 조엘 르뷔숑과, 파인다이닝 심판자 로맹 가리가 필상의 레스토랑에 방문했겠죠.
한차례 “네, 맞아요.” 하고 답해 보인 필상이, 잠시 틈을 두고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말에 낮은 웃음을 흘려보였던 멜리가, 특유의 나긋한 투로 답했다.
– 로맹 가리가 필상의 ‘파미유’와 관련된 칼럼을 게시했어요. 사측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다시 펜을 쥔 것은 장장 3년 만의 일인 데다가, 그가 칼럼을 통해 호평을 늘어놓은 것은 무려 5년 만에 있는 일이더군요.
“맙소사, 정말입니까? 하지만 직항편으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불과 한두 시간쯤 전에야 막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을 텐데···.”
– 네, 맞아요. 칼럼 말미에 서술된 부분에 따르면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원고를, 공항에 도착하기 무섭게 송고했다더군요. 일 분, 일 초라도 더 빠르게 필상이 뒤집어쓰고 있는 오명을 벗겨주고자 하는 마음으로요.
말을 마친 멜리가 마치 영화 록키의 코치, 미키 역을 맡았던 ‘버제스 메레디스’라도 된 것 마냥 덧붙였다.
– 정말 멋진 한방이었어요.
그 목소리가 어찌나 격정적인 것인지, 만약 그녀가 옆에 있었더라면 꽉 끌어안으며 ‘우리가 해냈어!’하고 외쳤을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고마워요.”
필상이 절제된 투로 답해보이자, 잠시 “음···.”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멜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어쨌든, 흐름이 아예 바뀌었어요. 그것도 심지어 손바닥 뒤집듯이 ‘휙-.’하고, 단번에. 분명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SNS를 통해 마녀사냥하듯 필상을 물어 뜯고 있던 셰프들 중 태반이 암페타민을 투여받은 실험용 쥐라도 된 것 마냥, 불안한 마음으로 입장을 정정하는 식의 게시물을 작성하고 있거든요.
“멜리의 말처럼 그들이 암페타민을 투여받은 실험용 쥐 마냥 불안에 떨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지만 어쨌든 희소식이네요. 적어도 뉴욕 시내를 거닐다가, 스페츌라로 뒤통수를 가격 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한차례 “음.”하고 침음을 흘려보였던 멜리가 덧붙였다.
– 안타깝지만, 그 말을 했던 셰프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 상황이네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필상의 뒤통수에는 아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단 뜻이죠.
말을 마친 멜리가 뒤늦게 수습했다.
– 뭐, 어쨌든 중요한 건 뒤통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아니라 필상의 삶과 커리어가 궤도를 향해 미칠듯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겠어요?
*
필상은 마감 업무를 마치기 무섭게 ‘로맹 가리’가 게시한 칼럼의 내용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애초에 칼럼의 제목부터가 한없이 자극적이고, 호의적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빌리 반의 1호 셰프 필상과 파미유, 무신론자 셰프 조엘 르뷔숑이 신을 찾게 만든 맛과 천부적인 재능에 관하여. ]칼럼의 내용은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칭찬일색이었다. 기본과 완벽에 집착하는 훌륭한 마음가짐의 셰프라는 것은 물론이고, 요리 뿐 아니라 베이커리, 또 기반지식이 깊다는 점까지 두루 칭찬했다.
칼럼의 조회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 잠적했던 일류 평론가가 장장 3년 만에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선발대 역을 자처하여 한창 대중의 이목을 잡아끌고 있던 어린 셰프에 관한 내용을 다뤄주었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실감이 나지 않는 일 투성이였다. 가히 전설적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평론가이자, 파인다이닝 심판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고 있는 로맹 가리가 자신과 관련된 칼럼을 손수 작성해 주었다는 점도. 또 대중들의 반응이 하루아침에 이토록 뒤바뀌었다는 점도···.
가장 놀라운 대목은 멜리가 말했던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데, 불과 24시간 남짓한 시간도 소요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
– 필상, 선택의 시간이에요.
다음 날, 멜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기 무섭게 들은 첫 마디였다.
“선택이요?”
한차례 “네.” 하고 짧게 말해 보인 그녀가, 진중하기 그지없는 투로 상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 필상의 파인다이닝에 투자하고 싶다는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어요. 아직 눈에 띠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들은 없는 지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예정이지만요.
“그런데 선택이라뇨?”
– 다름 아니라, 꽤 재미있는 제안이 하나 들어왔거든요. 필상, 혹시 맨해튼 외곽 상권에 위치해 있는 ‘파우스트’(Faust)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아시나요?
이내 필상이 그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이고는 “아뇨,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하고 답하자, 멜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그럴 수 밖에요. 파우스트는 파인다이닝에 대한 제반지식이 없는 투자자와, 실력이 영 별로인 총괄 셰프가 협업을 거쳐 만들어 낸 암울한 합작품이거든요. 투자금을 회수하긴 커녕 매달 엄청난 액수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는 곳이죠. 조만간 간판을 내리게 될 예정이기도 하고요.
“그런데요?”
– 그런데 파우스트의 투자자이자, 실질적인 오너가 꽤나 재미있는 제안을 해왔어요. 만약 필상이 3개월 내에 파우스트에서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51%의 지분을 공식 측정가의 사 분의 일 가격에 양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맨해튼 외곽상권의 오너 셰프가 될 수 있는 셈이죠.
“이유는요?”
– 게임이에요. 그리고 보통 부자들의 게임은 이런 식이죠. 그러니까, 취미 삼아 파인다이닝을 경영하는 재력가들 기준에서요. 아마 필상이 이번 게임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그는 앞으로도 필상을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고자 할 거예요.
이내 필상이 헛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확실히 수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분명한 51%의 지분을 조건으로 3개월짜리 *키친 나이트메어(*Kitchen Nightmares:유명 셰프가 문제가 있는 식당에 대한 제보를 받고, 문제점을 진단 및 개선해주는 영국・미국의 TV 프로그램)를 찍으라는 겁니까?”
– 바로 그거에요. 사실 사측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비록 외곽상권이라지만 맨해튼은 필상의 시작점으로 나쁘지 않은 장소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사를 섭외해서 그 과정을 TV와 인터넷을 통해 미국 전역에 송출시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아무도 필상의 요리 실력과 경영 방식으로 트집을 잡지 못하겠죠. 더군다나 그 이후에는 당연히 여러 투자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 메인스트림 마켓의 중심에 들어설 수도 있을 테고요.
말을 마친 멜리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 물론 우리가 게임에서 이겼을 때의 일이지만요.
이내 필상이 탁상을 가볍게 두드려가며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기는 했다.
애초에 3개월이면 문제를 진단하고 개선하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다. 더군다나 빌리 반 코퍼레이션과의 계약, 또 로맹 가리의 칼럼 덕에 얻은 화제성을 활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킬 수도 있을 터였고 말이다.
보통 레스토랑이 경영 난을 겪는 이유는 ‘유입’내지는 ‘낮은 재방문율’ 때문이다. 하나, 두 가지 문제 모두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확률이 농후했다.
우선 화제성 덕에 손님 유입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 보였다. 유입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니 자신이 제대로 개선해내기만 한다면 유입된 손님의 재 방문율이 어느 정도 유지될 터였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적자가 극복될 터였고, 맨해튼 외곽상권의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헐값에 인수받게 되는 형식이었으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마케팅 수단 및 포트폴리오로 활용하겠다는 빌리 반 측의 제안 역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승리를 지켜보는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더욱 소문이 빨리 날 테고, 그 과정에서 수플레 마냥 잔뜩 부풀어 오를 테니까.
이런저런 여건들을 면밀히 따져봤을 때 이번 제안은 단순히 맨해튼 외곽상권의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헐값에 인수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훗날의 비즈니스까지 순조로워질 여지가 있는 매력적인 제안인 듯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동안 침묵만이 흐르기를 잠시. 오랜 고민을 매듭 짓는데 성공한 필상이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이고는 되물었다.
“멜리, 혹시 ‘파우스트’에 방문해 본 뒤에 결정해도 좋을까요?”
– 좋은 생각이에요. 중요한 시기인만큼, 신중해 질 필요가 있죠.
우선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경영 관련 서류들부터 훑어 볼 요량이었다. 승낙을 하든, 거절을 하든, 그때 가서 하더라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만약 할만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면 곧장 수락하고,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면 일반적인 방식의 투자를 받아 레스토랑을 런칭하면 그만일 터였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파우스트’라는 문제의 레스토랑이, 소생의 여지가 아주 조금은 남아있는 곳이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기왕이면 일반적이고 평범한 방식의 투자를 받아 레스토랑을 런칭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도전이나 시험등의 단어와 가까운 방식을 추구하고 싶었던 탓이었다.
“파우스트···.”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한차례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