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67
67
Chapter18 – 주방의 폭군 (4)
면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레스토랑의 문을 닫았다. 다큐멘터리 녹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필상은 곧장 면담 장소인 ‘셰프 전용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 들어선 필상이 제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 거려가며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찰나.
조심스레 뒤따라 들어온 알폰스가 긴장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필상, 혹시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에렌이 그러더군요. 그러니까···.”
말끝을 흐려보였던 알폰스가 집무실의 문이 잠겨있음을 확인한 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필상께서 저희 형제의 횡령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네, 맞아요.”
“어떻게 하실 거죠? 위고 씨에게 말씀하실 건가요?”
그 말에 필상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집무실 중앙에 비치된 쇼파를 턱짓으로 한 번 가리켜보였다.
“우선 앉으시죠.”
“알겠습니다.”
이윽고 필상과 알폰스, 두 사람이 협탁을 사이에 둔 채 마주앉았다. 이내 필상이 알폰스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온 앙상한 얼굴 위로, 식은 땀이 잔뜩 맺혀있는 상태였다.
과연 자신이 발주표를 통해 확인했던 바 있는,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수준의 횡령이 전부였더라면 이런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집무실에 따라들어와서 어렵사리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식은 땀을 줄줄 흘려댈 필요가 있었을까?
‘확실히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잠시 아무런 말없이 테이블만 ‘톡, 톡.’ 두드려대고 있던 필상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알폰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분명 에렌에게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문제가 많지만, 우린 분명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그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괜히 거창하게 횡령이라고 표현할 것 없이 *인센티브(*Incentive)나, 부가수익 정도로 생각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처럼 레스토랑의 경영 실적이 침체되어, 손에 떨어지는 금액이 노고에 비해 훨씬 적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엇비슷한 선택을 했을 겁니다.”
알폰스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동생 에렌에게 필상이 자신들의 횡령 사실을 알고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뒤로 줄곧 누군가가 제 목을 ‘꽈악-.’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은 짙은 압박감에 시달려야했건만,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아,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줄곧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횡령 사실이 위고 씨의 귀에 들어간다면···.”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던 알폰스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제 몸을 부르르 떨어대자, 필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덧붙였다.
“아마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되겠죠. 모든 횡령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테고, 법적공방이 시작될 겁니다. 위고 씨가 원하시는 건 배상금이 아니라, 두 분 형제의 파멸일 가능성이 농후하고요. 아시다시피 위고 씨처럼 월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업가들은 그런 습성이 있잖아요? 배신자들을 아예 박살내놓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런 습성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갱이나 마피아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
“문제는 소송 문제가 잘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빅토르 위고 급 거물 사업가의 인프라를 고려해본다면 두분의 여생 정도는 우습게 짓밟을 수 있으리란 겁니다. 최악의 경우, 두 분께서는 맨해튼 내에서 다시는 구직 활동을 하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지역을 옮긴 뒤 어렵사리 취직하시더라도, 위고 씨의 마음먹기에 따라 그 직장을 순식간에 잃게 될 수도 있을 테고요.”
말을 마친 필상이 자연스레 미끼를 던졌다.
“아무래도 횡령 금액이 큰 편이긴 하니까요. 그래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저는 입이 아주 무겁거든요. 대신 조건이 따라 붙기야 하겠지만요.”
“조건이라 하심은···?”
“간단합니다. 저를 끼워주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이 비밀은 평생 지켜질 겁니다. 제가 굳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들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한차례 “하아···.”하고 묵은 숨을 토하듯 내쉬어 보인 알폰스가, 제 정장 외투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는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닦아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식재료의 값을 조금 높게 책정하여 기록해둔 뒤, 차액을 챙기는 게 전부였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루 평균 100달러 정도를 챙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 적은 돈을 반으로 나누기까지 하셨고요? 제기랄, 그런 상황이라면 저라도 감질나서 못 버텼을 것 같군요.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셨군요. 그나저나 다음 단계는 누구 아이디어였던 거예요? 알폰스? 에렌?”
필상이 자연스레 미끼를 건넸고, 알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끼를 물고 말았다.
“리셀(Resell)은 에렌의 아이디어 였습니다. 희귀 품종의 치즈나, 유명 브랜드 와인, ‘*숭어알 보타르가’(*숭어과 어류의 알을 절여 말린 지중해 음식), 화이트 트러플, 오세트라 캐비어 등의 고가 식재료를 시재로 매입한 뒤 되파는 식으로 발전하게 된 거죠. 아마 그때부터 상황을 겉잡을 수 없던 것 같습니다.”
“어쩐지 에렌을 처음 봤을 때 느꼈죠. 영리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뭐라고 해야 할까? 특유의 피네스나 아우라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 정도 금액이라면 세 사람이서 나누기에도 일절 부족함이 없겠군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희 형제 몫으로 떨어지는 금액이, 필상의 몫보다 조금 적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를 테면 필상이 4할을 취하고, 저희 형제가 남은 6할을 반으로 나눠 갖는 형태라든지···.”
“비율 배분에 관한 문제는 추후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다시 협상하도록 하죠. 여러모로 민감한 문제니까요. 아마 동반자들 중 한 사람인, 에렌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협의하는 걸 원치 않을 테고요.”
그 말이 끝맺어 지던 찰나, 알폰스의 앙상한 얼굴 위로 욕심이 잔뜩 깃든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직원들 월급표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던데요?”
필상의 물음에 알폰스가 곧장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옴싹달싹대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을 굳힌 듯 제 입술을 한 번 핥아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필상께서 셰프로 부임하고 나시면, 금세 모두 알게 되실 테니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다 괜찮으니까, 편히 말씀하세요. 어차피 우리 세 사람은 이제 한 배를 타게 된 입장이잖아요?”
“사실 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괜찮은 부가 수익원이었어요. 예전에는 모든 직원들에게 위고 씨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에 기재된 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뜸을 들여보인 알폰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직원 한 명당 600달러에서 800달러 가량의 이익을 취해왔죠.”
“직원들이 납득하던가요? 반발이 심했을 텐데요?”
“에렌이 설득했습니다. 경영 침체를 이유 삼아서요.”
“그 정도로 설득으로 이해해주던가요?”
“물론, 약간의 ‘협박성 발언’도 섞여있었고요.”
저도 모르게 “맙소사···.”하고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애써 웃는 얼굴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미 외교부가 어째서 에렌을 채용하지 않는 건지 의문인데요? 그 정도 외교술을 갖춘 인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단박에 채용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괜찮은 부가 수익원이었다는 말씀은,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네, 그때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레스토랑 매출 하락세가 가속화되면서 실제로 직원들의 월급이 대폭 삭감되었어요. 대부분 절반 가까이 삭감되었고, 자연스레 저희 몫도 줄어들어 버렸죠.”
그 말에 필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되물었다.
“그럼 직원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을 텐데요? 가뜩이나 적어진 월급마저, 제대로 수령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적은 금액이라면 생활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지난 번에 확인해보았던 월급표에 기록된 주방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한화 80만 원 가량이었다. 중요한 점은 그 적은 액수의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맨해튼의 물가가 반쯤 미쳐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야 어찌저찌 이곳에서 해결한다 치더라도, 아마 자그마한 스튜디오 형태의 원룸에 세들어 사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그때, 알폰스가 사뭇 의기양양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반발이야 있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에렌의 화술이 빛을 발했죠. 그만두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녀석들이 몇 명 있지만, 거기까지였어요. 에렌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다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근무하기 마련이죠. 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에렌은 ‘협박의 대가’거든요.”
“역시 대단한 인재로군요.”
“사실 자잘한 수입원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홀 직원들이 받는 팁을 고스란히 취하고 있거든요. 비록 엄청 큰 돈이 되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무시 할 수는 없는 금액입니다. 모아놓으면 매월 1000달러 가량에 육박하거든요.”
그 말에 필상이 저도 모르게 “허···.”하고 헛웃음을 흘려 보이고야 말았다.
“홀 직원들의 팁까지 취한다고요? 당신들 엄청나게 경제적이고 치밀한 사람들이었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 말에 멋쩍은 듯 웃음지어 보인 알폰스가, 다시금 술술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실 팁은 저희가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당신들 형제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어요. 최고의 파트너가 될 것 같았죠.”
그때 누군가가 굳게 닫혀있는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자 알폰스가 화들짝 놀라서는 문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내 필상이 “잠시만요.” 하고 말해 보인 뒤,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아마 제 에이전시 측 직원인 것 같군요. 이제 슬슬 녹화를 재개해야 할 시간이거든요. 어쨌든, 모두 털어놓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일과가 끝난 뒤에 다시 모여 이야기 나누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현명한 선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환영합니다. 파우스트에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한차례 필상과 악수를 나눈 알폰스가 문을 열고 나서기 무섭게, 문앞에 대기하고 있던 멜리가 그에게 묵례를 해보였다. 멜리는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음을 확인한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필상, 괜찮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이내 필상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되물었다.
“혹시 타이레놀 있어요?”
알폰스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당장에라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참아야 했기 때문일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고, 불에 달궈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진 자갈을 한 움큼 삼키기라도 한 것 마냥 속이 후끈거렸다.
식재료 값을 조작하고, 영업에 필요하지 않은 식재료를 매입한 뒤 되파는 것도 용서받지 못할 행위다. 한데, 직원들의 월급을 가지고도 부당한 이익을 취해왔을 줄이야···.
그 과정에서 그들 형제가 행했을 추악한 행동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아마 그들의 꿈과 목표를 인질로 삼아 협박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을 들먹였을 수도 있으며, 그 어느 파인다이닝에도 다시는 취직할 수 없는 신세로 만들어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을 수도 있다.
필상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쥔 채로 짙은 상념에 젖어들어 그때, 한차례 “잠시만요.” 하고 답해 보인 멜리가 제 정장 외투 안주머니에서 타이레놀을 꺼내서는 건네주었다.
“맙소사, 설마 타이레놀을 항상 들고다니는 거예요?”
필상이 놀란 듯 되묻자, 멜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네. 빌리 반에서 일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지니고 다녀야 할 물건이죠. 비록 사내 지침에 기재되어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요.”
말을 마친 멜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가며 재차 물었다.
“필상, 이제 슬슬 집무실 안에도 카메라 설치를 시작해야 한다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래야죠. 자리를 비켜드려야 하나요?”
“아뇨, 그냥 앉아 계셔도 된다네요. 설치가 끝나고나면 곧장 녹화가 시작될 거예요. 직원 면담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필상이 나직이 답했다.
“직원이 총 몇 명이죠?”
“열 명이요.”
“열 명이나 된다고요?”
“그렇더군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필상이 덤덤한 투로 답했다.
“모두 한꺼번에 만나보는 게 좋겠네요. 가급적이면 오늘 하루 일과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서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테이스티 아메리카 측 스태프들이 줄줄이 들어와서는, 집무실 내부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금세 설치가 완료되었고, 몇 분 가량이 흘렀을 무렵 파우스트의 모든 직원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내 그 쇼파에 앉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필상이, 한없이 까칠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자, 면담에 앞서 잠깐 몇 가지 조사부터 하도록 하죠. 바로 옆 가게만 가도 지금 월급의 3배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
이윽고,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를 잠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눈치만 살펴대고 있자, 필상이 제 앞머리칼을 위로 한 번 쓸어넘겨 보이고는 재차 말했다.
“다행히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얼간이는 한 명도 없군요. 아니면, 지금 받고 있는 쥐꼬리만한 월급에 만족하시는 분?”
다시 한 번.
“그럼 자애롭기 그지없는 파우스트가 아닌 그 어디에도 취칙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있던 분은?”
이내 필상이 숨을 힘겹게 내쉬어가며, 분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잘 들으세요, 파우스트는 잔뜩 곪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잘못 된 모든 부분들을 바로잡을 겁니다. 나한테 협조한다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당신들이 사는 세계가 아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다듬어 보인 필상이 다시금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이 중에 저 까망베르 치즈를 닮은 셰프와 아무런 분장도 없이 워킹 데드 시리즈의 좀비 역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홀 매니져 놈이 너무 두려워서, 최소한의 용기조차 낼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장 나가세요.”
필상의 말이 끝맺어졌으나, 다들 제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따름이었다. 그저 아무런 말없이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정적만이 가득하기를 잠시, 필상이 일렬로 서있는 직원들을 향해 몇 걸음 더 다가선 뒤 재차 말문을 열었다.
“좋아요.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한 명씩, 그동안 얼마나 엿같은 일들을 껶었는지 다 털어놓으시면 되요. 그렇게 다 털어놓고나서 곧장 집으로 간 뒤, 이불 속에 숨어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바뀌어 있을 겁니다.”
필상이 재차 덧붙였다.
“제 모든 걸 걸고서 약속하죠. 정말입니다.”
그 말에 아직 앳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주방직원 한 명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색하지 않고자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이를 꽉 깨물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혼자 스카프를 두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쿡 헬퍼(*Cook Helper:주방보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본래 감정에는 전염성이 있기 마련이지 않던가?
이내 다른 이들의 표정 역시 덩달아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저 어린 요리사처럼 눈물을 보인 이는 없었으나, 다들 지칠대로 지쳐버린 표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필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문득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악마와 싸울 때는, 스스로도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던 말. 아니다, 동의할 수 없다.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는, 더 한 악마가 되어야 한다.
기필코 두 형제를 박살내고야 말겠노라는 결심이 가슴 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자, 여러가지 작전들이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수 셰프 ‘브래들리’가 손을 살짝 들어올린 채 힘겨운 투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