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76
76
Chapter20 – Your Beemer (2)
‘미슐랭이라···.’
물론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거룩한 이름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야 했다. 다만, 이토록 가까이에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것뿐.
이내 필상이 제 고개를 좌・우로 저어대기 시작했다.
‘아냐, 아냐.’
욕심은 갖되, 탐욕을 가져선 안 된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바라는 마음. 즉, 명백한 탐욕들은 저버려야 한다.
파우스트를 더 나은 파인다이닝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에 젖어든 채 지내다 보면, 부와 명예는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오게 될 테니까.
– 어찌 됐든, 파우스트의 ‘*존망’(*存亡)은 재 오픈 첫 주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네요.
“그렇겠군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필상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멜리의 말에 따르면 파우스트가 다시 문을 열게 되는 날을 기점으로, 대략 일주일에 걸쳐 유명 매거진에 소속되어 있는 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들이 줄줄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역시 자신의 흠집을 찾아서는, 집요하고 물어뜯고 흔들어대기 위해 파우스트에 걸음 할 터였다. 적대적인 어투로 방문을 예고한 평론가들의 수만 하더라도 족히 열댓 명은 될 게 분명했으니까.
거기에 화제성에 편승하려는 파워 블로거들, 또 인근 레스토랑의 셰프들 역시 염탐을 목적으로 방문할지 모를 노릇이었고 말이다.
– 부디 이겨내셨으면 좋겠네요.
“고마워요.”
– 진심이에요.
말을 마친 멜리가 낮은 웃음을 흘려 보였다.
– 사실 빌리 반에 입사한 이후, 소속 아티스트를 전담해보는 건 필상이 처음이거든요.
“정말로요? 일 처리가 너무 능숙해서 몰랐어요.”
– 네, 인턴십(Internship) 기간 2년에 걸쳐 능숙해 보이는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한차례 “어쨌든···.”하고 말해 보인 그녀가 재차 덧붙였다.
– 실수였던 것 같네요. 열정이 과했던 탓인지, 필상에게 너무 쉽고 빠르게 정을 붙여버렸거든요. 실은 교육 기간 내내 전담 아티스트에게 정을 주지 말라는 충고를 누누이 들었는데도 말이죠.
“그런 교육도 받는군요.”
– 네, 빌리 반은 냉정한 곳이니까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정 친구가 되고 싶거든 재계약을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체결한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삼으라는 내용도 있어요. 이미 몇 번가량 성과를 올린 이력이 있는 아티스트라면, 정말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사측으로부터 쉽게 버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 하지만 필상에게는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이번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애물단지로 전락한 뒤, 아무런 지원도 못 받다가 계약이 만료되는 날 곧장 쫓겨날지도 모르죠.
말을 마친 그녀가 엷게 떨리는 어투로 덧붙였다.
– 기왕이면 오래도록 당신을 서포트하고 싶어요. 그런 선배들이 더러 있거든요. 어떤 아티스트의 시작점은 물론이고, 전성기, 은퇴까지 모두 함께 한.
“낭만적이군요.”
– 네. 저는 아직 제 직업이 낭만 가득하다고 믿고 있어요. 부디 필상께서 제 믿음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네요.
한차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노력해보죠.”
멜리와의 통화를 마친 필상이, 제 상반신을 의자 등받이에 편히 뉘인 채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사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적당히 잘해선 안 된다. 다들 파우스트의 흠과 결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기이한 상황이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두렵냐고? 아니, 전혀 두렵지 않다.
이런 불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회귀 이전의 삶과 비교해본다면, 지금은 가히 천국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으니까.
차라리 집단 광기와 다를 바 없는 적대적인 관심이라 할지라도, 철저한 무관심보다는 백배. 아니, 천 배 쯤 낫다고 생각했다.
뻑뻑해진 두 눈을 문질러 보인 필상이, 간단히 자리를 정리한 뒤 파미유를 나섰다. 밤바람이 사뭇 싸늘하다 여겨졌다.
어느덧, 겨울이다.
온다는 것이, 동시에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질적인 계절. 이 계절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자신의 삶이 꽤나 많은 변화를 거친 상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사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했다.
한국에서의 남은 일정을 전부 다 정리한 뒤, 파우스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파우스트를 되살리고, 의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에게 셰프로서의 가치를 입증해내야 한다.
한차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필상이, 가로등 불빛이 비춰주고 있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띠리릭-.
현관 도어락을 해제하고 집 안에 첫발을 내딛은 필상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다름 아니라, 쇼파에 드러누우신 채로 주무시고 계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본인도 모르는 새 곯아떨어지신 것인지 TV 전원은 켜져 있었고, 바닥에는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웹 뉴스 기사들이 인쇄된 A4용지, 또 그것들을 보기 좋게 모아 붙여둔 스크랩 북, 풀, 가위 따위의 문구들로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상태였다.
이내 필상이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잠든 아버지를 잠자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반쯤 벌어진 입과 눈 밑에 진 짙은 응달만 보더라도 아버지의 하루가 어찌나 고되었을지 얼추 가늠할 수 있을 듯했다.
출국 전, 부모님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
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꼭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두 번째 생에서조차 바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못난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출국 전날이 좋겠지.’
대단하고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시내 곳곳을 돌아다녀야겠다는 게 계획의 전부였으니까.
그냥 인근 영화관에서 코미디 영화를 관람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수다를 떨고, 갖고 싶었으나 검소한 소비 습관 탓에 미처 구입하지 못하셨을 물건들을 사드리며, 그렇게 평범하고 소소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게 전부였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억들이야말로 더 자주 떠오르며 더 오랜 기간 존속되곤 하니까.
이내 필상이 담요를 아버지의 가슴팍까지 끌어 올려준 뒤, 밝은 빛을 뿜어대고 있는 TV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시청 중이시던 프로그램은 XTM 채널에서 방영 중인 영국 BBC의 ‘*탑 기어’(*Top Gear:자동차 프로그램)였다.
세 명의 진행자가, 웅장하게 생긴 BMW 사의 신형 7시리즈 세단 차량을 세워둔 채 이런저런 예찬론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TV 전원을 끄기 위해 리모컨을 집어 들려던 찰나, 등 뒤편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채널 돌리지 마라.”
화들짝 놀란 필상이, 고개를 휙 돌려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주무시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보고 있었어.”
“지금도 눈 감고 계신데요?”
“어쨌든.”
저도 모르게 “크큭···.”하고 웃음을 흘려 보인 필상이,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버지, 원래 차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글쎄다.”
“네?”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침묵이 드리우기를 잠시.
“동경하지.”
짤막하게 말씀해 보이신 아버지께서, 졸음 탓에 잔뜩 몽롱해진 눈을 애써 크게 떠보인 채로 덧붙였다.
“원래 이 나이쯤 되면 영영 겪어보지 못할 경험들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 마련이거든.”
반쯤 잠긴 목소리로 꺼내 보인 그 말이 끝맺어지던 찰나, 필상이 저도 모르게 짧은 침음을 흘려 보였다.
언제, 어디서였더라?
언젠가 한 번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의 시청자층이, 대부분 50대 이상의 노년층이라는 앙케이트 자료를 본 적이 있었다.
앙케이트 자료의 말미에는 단연 국내 뿐 아니라 BBC, 네셔널 지오그래픽, NHK 등의 일류 다큐멘터리 제작사가 제작・방영하는 모든 자연 다큐가 엇비슷한 맥락이라는 내용의 각주가 첨언 되어 있었고 말이다.
혹시 인생이 오십 줄에 접어들고 나면, 언젠가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던 것들에 대한 동경심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경험해보기를 희망하던 일 중 태반이, 사실은 죽기 전까지 절대 겪어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던 찰나, 문득 기억의 수면 아래 깊은 곳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맑은 증류수에 색이 짙은 물감을 풀기라도 한 것 마냥, 단숨에 ‘확-.’하고···.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회귀 이전의 삶 속에서 아버지께 지금 TV에 나오고 있는 BMW 사의 대형 세단 차종인 7시리즈의 중고 차량을 선물해드렸던 적이 있다.
비록 주행을 하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지만, 외형에서 시간의 흔적이 잔뜩 묻어나는. 신형 외제 차를 사드릴 수 있을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는 않았던지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뒤 골라낸 그런 중고 차량 말이다.
그래도 대단하다고?
아니다. 절대 아니다. 실은 선물이 아닌, ‘면죄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명절에도 얼굴 한 번 못 비추는 바쁜 아들이지만, 부디 용서해주시길. 근간을 들여다보면 저열한 심리만 잔뜩 깔린 못난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고물 7시리즈를 너무나도 애지중지 여기셨다. 매일 카센터에 들르곤 하셨던 터라, 인근 카센터 사장님께서 어머니를 찾아와 아버지 탓에 영업에 곤란을 겪는다며 하소연을 하실 지경이었으니까.
어머니께 전해 들은 바로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며 주말이 식구백반의 고정 휴무일로 자리 잡은 뒤, 아버지께서는 일요일 하루 내내 오후 늦게까지 손 세차를 하며 시간을 보내셨다고 했다.
때때로는 그런 아버지의 정성이, 미련하게 느껴지기 일쑤였다.
‘아니, 몸도 편찮으신 양반이! 그깟 고물차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울컥하는 마음에 한바탕 화를 쏟아냈던 적도 더러 있다. 대화는 도돌이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마냥 능청스러운 투로, 너스레를 떨어가며 상황을 넘겨버리곤 하셨으니까.
‘이놈이 말버릇은. 그래도 아들 잘 둬서, BMW를 다 몰아보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마치 컴퓨터를 포맷하는 것 마냥 모든 기억이 급속도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어머니를, 종지에는 본인의 이름 석 자까지도 잊으셨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아버지께서는···.
그런 와중에도, 일요일 정오 무렵이면 어김없이 손 세차를 하셨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이면 광이 나는 BMW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시다가, 곧장 침실로 향해 주무시곤 하셨다고 했다.
선물해드린 아들은 잊으셨으면서도, 아들이 사준 고물 중고 BMW는 잊지 못하셨다. 심지어 한 번은 그 세차 광경을 직접 지켜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두달 전쯤, 어머니께서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꼭 한 번 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에 한국 땅을 밟았다.
입국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이 그랬듯, 아버지께서는 마당에 세워진 차량을 열심히 세차하고 계셨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신 채, 앙상한 손에 ‘*워시 미트’(*Wash meet)를 쥔 채,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지더라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처럼 잔뜩 집중하신 채, 마치 차를 깨끗이 닦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정열적으로 차를 닦고 계셨다.
아버지의 손 세차는 장장 세 시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팔짱을 낀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건만, 아버지께서는 잠깐도 쉬지 않으셨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 가며, 그 고물 차량에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듯 계속해서 닦아내셨다.
아버지는, 고단했을 작업이 끝난 뒤에야 눈길을 주셨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건네오셨다.
‘이 차가 말이야, 우리 아들이 사준 차야. 자네, BMW라고 들어본 적 있지? 그중에서도, 저기 기업 회장님들이 타는 큼지막한 차야.’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그래, 다들 그러더라. 실은 우리 아들이 엄청나게 성공한 요리사거든. 자네도 열심히 살아서, 꼭 부모님께 효도하게. 우리 아들처럼 말이야.’
그 노쇠한 음성 탓에 억장이 단숨에 무너졌다. 나는, 과연? 이렇다 할 효도를 한 적도 없었을 뿐더러, 또 요리사로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몇 마디 말이 단번에 늑골을 박살내고, 호흡을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강력한 훅처럼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곧장 K.O 펀치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께서 환히 웃으셨다. 주름진 입가 위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던 터라, 그 자리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날카롭고 뾰족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위험한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 기억의 파편들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겨대기 시작했다. 그저 떠올린 게 전부인데, 쓰라리다. 정말 사무치도록 쓰라리다.
“아들, 왜 그래?”
아버지의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필상을 도로 현실로 돌아오게끔 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들, 좁은 거실, 켜져 있는 TV, 여전히 BMW 앞에 선 채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화면 속 세 명의 진행자들.
그리고 자신을 마냥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아뇨. 그냥···.”
대강 얼버무려 보인 필상이, 괜히 하품을 해 보이고는 덧붙였다.
“피곤해서 그런지, 괜히 몽롱하네요.”
“그래,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이내 필상이 짧게 묵례를 해 보이고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침대에 걸터앉은 채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모든 정리를 마친 듯 보였다. 빌리 반의 도움 덕에 방송 스케줄을 모두 정리했으며, 파미유는 마지막 영업일을 기점으로 자연스레 폐점될 터였다. 또한 이정준의 워킹 비자 발급 문제도 빌리 반 측에서 도맡아 해결해주고 있는 중이었으니,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때가 되면 맨해튼으로 돌아가 파우스트 업무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좋아.”
나직이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휴대폰을 이용해, 여러 은행에 분산된 자신의 예금액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예치된 총액은 도합 30만 달러가량으로, 한화로 환산한다면 3억2천만 원 가량이랄 수 있었다.
BMW 7시리즈 차량을 일시불로 구매하고도 2억가량이 남는 액수라지만, 그 정도 액수를 일시불로 지불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당장 예치된 금액들은, 파우스트의 지분 51%를 매입할 때 써야 하는 돈이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흠···.’
잠시 고민하던 필상이 곧장 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를 잠시, 이내 필상이 전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 멜리. 혹시 이틀 안에 BMW 7시리즈 차량을 구매할 수 있을까요?”
– 네? 그게 갑자기 무슨···.
“실은 한국에서 타고 다닐 수 있는 BMW가 필요해졌거든요.”
이내 멜리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 잠깐, 잠깐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그 사이에 BMW가 필요해졌다고요?
“네, 공교롭게도 그렇게 됐네요. 렌트나 리스 형태로, 가급적이면 초기지출 금액을 *4만 달러(*4천200만 원가량)로 제한해둔 채로 구매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말을 마친 필상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BMW가 필요해졌다. 잘 키운 아들 덕에, ‘영영 겪지 못할 경험’이라 칭할 만한 일이 인생에서 거의 다 사라져버렸음을 알려 드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또, 외면하고 싶은 과거의 음울한 기억을 밝은색으로 덧칠하기 위해.
아무래도 이게, 자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마지막 일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