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tar chef RAW novel - Chapter 77
77
Chapter20 – Your Beemer (3)
– 대체 어떤 이유로 30분 만에 BMW사의 차량이 필요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보다는 담당 부서 직원과 직접 상의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담당 부서 직원이요? 설마 차량 구매를 도와주는 부서까지 따로 갖춰져 있는 겁니까?”
장난기가 살짝 서린 물음에, 멜리가 은은하게 웃어 보이고는 답했다.
– 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소속 아티스트의 재무설계 및 지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라고 해두는 게 좋겠네요. 어쨌든, 늦어도 십 분 안에 담당자가 필상의 개인번호로 연락을 줄 거예요.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멜리와 통화를 마친 지로부터 정확히 오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 필상, 반갑습니다. 저는 빌리 반 코퍼레이션 에이전시 3팀에 소속되어 있는 엘릭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 우선 원하시는 조건을 먼저 확인해보도록 하죠. 한국 내 리스 및 렌트 상품을 이용하여 BMW 7시리즈 차량 구매를 희망하신다고요?
“맞습니다.”
– 초기 지출금액은 4만 달러 정도에, 기한은 이틀. 맞죠?
“불가능할까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에 건넨 물음이었다. 모르긴 모르더라도, BMW 7시리즈 정도 수준의 차량이라면 계약서를 작성한 순간을 기점으로 출고까지 꼬박 삼사 개월 이상은 대기해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틀 안에 차량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이번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나면, 언제 또다시 한국에 발을 들이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중고 차량을 목표로 삼는다면 별도의 *웨이팅(*Waiting) 없이 곧장 구매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겠으나, 이번에도 중고 차량을 선물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윽고.
– 음, 비록 확신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만한 오더는 아닌 것 같군요. 사실 이 정도면 꽤 친절한 편에 속할지도 모르겠네요. 어디까지 알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빌리 반 코퍼레이션 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짜’ 들이 득실거리거든요
“상상을 초월하는 괴짜들이요?”
– 네, 이를테면 아직 출시되지 않은 프리미엄 디자이너 브랜드의 시즌 신상품 의류들, 방영되지도 않은 왕좌의 게임 방영분, 심지어는 출간되지 않은 더 글라스 케네디의 퇴고 전 원고까지 구해본 적이 있죠.
“맙소사,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내 수화기 너머의 사내, 엘릭이 “과찬이십니다.” 하고 답해 보였다. 고작 일이 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통화를 나눈 게 전부라지만, 그의 능글맞으면서도 적당히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어투가 꽤 마음에 들었다.
– 일단 일을 처리하기에 앞서 한 가지 여쭤봐야 할 것 같군요. 원하는 기한 안에 BMW 7시리즈를 손에 넣으시려거든, ‘시간’을 위해서도 지출을 감내하셔야 할 겁니다. 그럴 의사가 있으신가요?
“그게 무슨 뜻이죠?”
– 간단히 한국 내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BMW 7시리즈 차종의 경우 계약일을 기점으로 출고까지 평균 3개월에서 4개월가량이 소요되더군요. 우리의 작전은 몹시 간단합니다. 그 3개월에서 4개월가량의 시간을 구매하는 거죠.
엘릭의 작전은 꽤 단순한 편에 속했다. 우선 첫째로 한국 내 리스 및 렌트 상품을 판매하는 업체 쪽에 우선적으로 접촉한 뒤, 7시리즈 차량의 출고를 기다리고 있는 구매자들에 대한 DB를 수집할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에는 당장 하루 이틀 내 출고 예정인 구매자들. 또 그들 중에서도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힘겹게 구매 승인을 받아낸 이들에게 접촉하여 매력적인 제안을 던질 생각이라고 했고 말이다.
– 쉽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기존 계약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금액을 지불한 뒤 그들이 보낸 기다림의 시간을. 즉, 그들의 계약을 구매할 겁니다.
“웨이팅 타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약을 승계받는다는 건가요?”
– 바로 그거에요. 당신이 보낸 ‘웨이팅 타임’을 합당한 값에 구매하고 싶다며 접근한다면, 적어도 몇 명은 관심을 보일 겁니다.
조건이 잘 맞아떨어지기만 한다면 서로 윈&윈(Win&Win)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발상이었다. 필상이 저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흘려 보이던 찰나, 에릭이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필상, 그럼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하는 대가로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으시죠?
“이만 달러요.”
–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하지만, 그 정도면 차고 넘치는 금액이네요.
말을 마친 에릭이 곧장 덧붙였다.
– 절반가량의 금액으로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만 달러에서, 이만 달러. 한화로 환산했을 때, 대략 천만 원 초반대에서, 이천만 원 초반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거금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보냈을 삼사 개월가량의 기다림을 구매하는 대가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버지께 선사해드릴 수 있는 감동의 값으로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필상이 덤덤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시간은 돈으로도 절대 살 수 없다더니, 지금 보니 조금은 어폐가 있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동감하는 바입니다. 사실 저는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만약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면, 혹시 자신의 잔고가 부족한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겠죠.
말을 마친 에릭이 “크큭.” 하고 웃음을 흘려 보인 뒤 덧붙였다.
– 어쨌든, 푹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모든 일이 처리되어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 다음번에는 저택이나 요트 등의 구매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군요.
지극히 자본주의적 성향을 띤 덕담을 끝으로, 엘릭과의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예정대로 파미유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꽤 조촐한 최후였다. 세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마감 업무를 처리했고, 퇴근 준비까지 모두 마친 뒤 동시에 가게를 나섰다.
매장을 나서기 직전, “아!” 하고 짧게 침음을 흘려 보인 김정아가 곧장 문에 걸린 푯말을 뒤집었다. 오픈에서, 클로즈로. 그리고 필상이 예상했던 대로, 세 사람은 성숙하고 덤덤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행복할 때 웃으며 또 만나요.”
“그래요, 꼭.”
분명 파미유는 그렇게 끝맺어졌으나, 놀랍게도 그 여파는 좀처럼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 상식 셰프 정필상 정필상의 원 테이블 레스토랑, ‘파미유’ 금일 부로 영업 종료. 누리꾼들 아쉬움 토로. ]스륵-.
[ 유명 맛 칼럼니스트 조두현 특집 칼럼 – “파미유의 존재가 불러온 국내 원 테이블 레스토랑의 질적 향상에 관하여.” ]스륵-.
[ 정필상 셰프의 원 테이블 레스토랑 파미유 폐점을 계기로 알아보는, 국내 가볼 만한 원 테이블 레스토랑 TOP10 순위. ]스륵-.
[ 상식 셰프 정필상, 맨해튼 파인다이닝의 셰프 정필상로 부임 예정? 금주 ‘냉장고를 털어라!’ 방영분을 통해 밝혀진 추후 행보 관련 정보 총망라. ]손에 쥔 휴대폰 액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필상이 저도 모르게 아쉬움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미유의 영업 종료를 기점으로, 관련 칼럼 및 기사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보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
어머니의 부름 덕에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아, 작게 중얼거려 보인 필상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서는 어머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는 ‘*몽클레어’(*Moncler:프랑스의 프리미엄 브랜드) 사의 코트 패딩을 차려입으신 채로, 멋쩍은 듯 웃음 짓고 계시는 중이었다.
이내 필상이 런웨이 무대에 오를 모델을 선별하는 디자이너라도 된 것 마냥, 진중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완벽하네요.”
어머니께서 소녀처럼 환히 웃으시며 “그래?” 하고 연신 되묻자, 필상의 옆자리에 녹초가 된 채 앉아계시던 아버지께서 미간을 잔뜩 찡그리신 채 이죽거리는 투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이고, 것 참. 옷 몇 벌 사려고 왔다가 여기서 늙어 죽게 생겼네.”
당장 열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곧장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전에 마음먹었던 대로 오늘 하루는 부모님과 함께 보내고 있던 것이다. 근래 개봉한 코미디 영화를 관람했고, 태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은 뒤, 선물을 잔뜩 사드리기 위해 곧장 백화점으로 걸음 했던 것이다.
물론, 쇼핑이 이토록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쇼핑이 원래 이렇잖아요?”
필상이 타이르듯 조곤조곤한 투로 건넨 말에, 아버지께서 “쯧.”하고 혀를 한 번 차보이시고는 발치에 잔뜩 놓여있는 쇼핑백들을 툭툭 두드려가며 답했다.
“그래. 그렇다 치자고. 그나저나 시장에도 싸고 좋은 옷이 널려있는데, 무슨 백화점에서 옷을 사냐면서 펄쩍 뛰던 사람 어디갔냐?”
“그러지 말고, 아버지도 몇 벌 고르세요. 오늘 아니면 정말 언제 이렇게 사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됐네, 이 양반아. 좋은 옷 잔뜩 사면 뭐해? 내가 입고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쫙 빼입고 주방에서 땀 뻘뻘 흘려가며 요리하라고?”
필상이 곧장 되물었다.
“그럼 시계라도 하나 하시는 게 어때요? 바로 맞은 편에 시계 매장도 있던데, 기다리기 지루하시면 한 번 둘러보고 오기라도 하는 게···.”
“됐다. 위성에서 쏴주는 정확한 휴대폰 시계가 있는데 뭐하러 괜히 헛돈을 써? 정 그렇게 뭐가 사주고 싶거든 양말이나 잔뜩 사주든가.”
이내 필상이 미간을 잔뜩 찡그려가며 “양말이요···?” 하고 되묻자, 아버지가 제 귀를 후벼 파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래. 발뒤꿈치에 굳은살 때문인지, 자꾸 양말에 구멍이 나서 아주 곤욕이거든. 아들, 그 식구 백반 골목 모퉁이 리어카 알지?
“네. 알죠.”
“거기서 열 켤레에 이천 원에 팔더라. 그렇게 선물 안 하고는 못 배기겠으면 거기서 양말이나 한 몇만 원어치 사줘 봐.”
필상이 재차 설득하려던 찰나, 어머니께서 수줍은 투로 재차 말문을 여셨다.
“아들, 외투는 이걸로 할게. 참 희한하다. 이렇게 얇은데 어떻게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네.”
“그래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이내 어머니께서 격렬히 손사래를 쳐가며 답했다.
“아이고, 이제 정말 괜찮아! 더 필요하기는 무슨. 저 쇼핑백들 좀 봐. 대체 저게 몇 개니? 오늘 산 물건들만 하더라도 다 들고갈 수 있으련 지가 의문이다.”
“장정이 둘이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혹시 더 필요한 것 있으면 괘념치 마시고 더 고르셔도 괜찮이요.”
한차례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아.” 하고 답해 보이신 어머니께서, 고개를 휙 돌려서는 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에요?”
“그게···.”
그렇게 직원이 가격을 말하려던 찰나. 필상이 그런 직원에게 한껏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서서는 제 카드를 건네주며 덧붙였다.
“루이비통이나 샤넬처럼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얇은 패딩이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요? 이걸로 계산해주시겠어요?”
잠시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재차 말씀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백화점이니까 몇십만 원은 할 텐데···.”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매장 직원이 되물었다.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몽클레어는 몇십만 원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제품조차 백만 원 선에서 시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착용하고 계신 제품의 경우, 무려 이백오십만 원가량을 호가하는 제품이었고 말이다.
만약 가격을 알게 되신다면 펄쩍 뛰어가며 구매를 반대하실 게 너무도 뻔했던지라, 오늘 하루 내내 ‘구찌’나, ‘루이비통’, 또 ‘생 로랑’이나 ‘프라다’ 등의 유명 브랜드 매장은 피해 다니며, 생소한 이름의 프리미엄 브랜드 매장만 골라 다니며 가격을 숨긴 채 결제해왔던 것이다.
참고로 아버지의 발치에 잔뜩 놓여있는 쇼핑백들의 가치만 환산하더라도, 국산 준중형 신차 한 대쯤은 거뜬히 뽑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계산을 모두 마친 뒤, 아버지께서 본인의 발치에 잔뜩 놓여있던 쇼핑백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며 말문을 여셨다.
“이야, 오늘 대체 뭐했다고 벌써 여덟 시야? 일단 밥부터 좀 먹자. 교도소도 밥은 제때 주는 데 말이야···.”
“하이고, 이 양반이 엄살은. 끼니 조금 늦게 챙긴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래, 죽지야 않겠지! 그런데 정말 죽을 것 같다니까? 뱃가죽이랑 등가죽이 ‘착-!’ 하고 달라붙게 생겼다고!”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필상이,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도로 꺼내보았다. 다름 아니라, 막 도착한 메시지 한 통 탓에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어댔던 탓이었다.
[ 청담점 이태식 점장 : 셰프님, 준비 끝났습니다. 내려오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필상이, 한차례 화색을 해 보이고는 중재하듯 말을 꺼냈다.
“흠, 저도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지려는 것 같은데 저녁 드시러 이동할까요?”
“역시 아들이랑은 통하는 게 있다니까? 어디로 갈까?”
“일단 집 근처로 넘어가서 생각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그러자.”
이윽고 세 식구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레베이터 안에 들어섰다.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가 오가기를 잠시, “띵!” 하고 울려 퍼진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내 가장 먼저 내려선 아버지께서 제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낮게 중얼댔다.
“어라, 여긴데···?”
“네? 뭐가요?”
“트럭 말이야. 분명 여기 세워뒀는데···.”
이내 아버지께서 머리를 긁적여가며, 좌・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아버지의 낡은 포터 트럭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광이 번쩍이는 BMW사의 7시리즈 차량이 세워져 있던 탓이었다.
“하이고, 이 양반아. 설마 차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진짜 왜 이러지? 혹시 위층에 세워뒀나?”
그때, 필상이 돌연 BMW 차량 옆에 다가서며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차 찾으시는 거예요?”
“그래, 것 참 희한하네.”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있잖아요?”
“응?”
이내 필상이 주머니 안에서 BMW 7시리즈 차량의 차 키를 꺼내 들어서는, 곧장 도어 잠금 해제 버튼을 눌러 보였다. 그 순간, ‘삐빅-.’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한 번 점멸했다.
그렇게 두 분 부모님께서 멍하니 차량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필상이 아버지의 손에 차 키를 쥐여드리며 덧붙였다.
“선물이에요, 아버지 트럭은 제가 집으로 옮겨놔 달라고 부탁했어요.”
“뭐, 뭐라고···?”
“일단 한 번 앉아보세요.”
이내 아버지께서 헛웃음을 한 번 흘려 보이고는 되물으셨다.
“아들, 지금 농담하는 거지?”
“아뇨, 얼른 앉아보세요.”
“잠깐만, 정말이라고? 정말?”
이윽고, 아버지께서 못 이기시는 척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량 옆에 바짝 다가서시고는 운전석 문을 활짝 열었다.
웅장한 20인치 휠과 고유의 엠블럼이 박혀있는 보닛. 문을 열자, 고급스러운 느낌의 브라운 시트와 깔끔한 센터페시아가 반겨주었다. 운전석에 앉은 채, 처음 동물원에 온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시던 아버지께서 이내 느릿한 손길로 핸들을 꽉 움켜쥐셨다.
그리고는 세차게 떨리는 눈으로 필상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필상이 능청스러운 투로 건넨 말에, 아버지께서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잘 어울린다고?”
무어라 답하려던 필상이 요동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간신히 답을 대신했다.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아들에게 매일같이 안부 전화를 걸어서는 밥을 굶지 말라 신신당부하시던 아버지는. 식구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정작 자기 삶의 태반을 주방의 후끈한 열기에 녹이다시피 하셨던 아버지는···.
아무래도, 이제 무언가를 누리고 즐기는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후우,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해 보인 필상이 느릿한 어투로 말을이었다.
“아버지, 일단 시동부터 한 번 걸어보시겠어요?”
이내 아버지께서 시동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조용하고 웅장한 배기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차량에 장착된 CD 플레이어에서 아버지의 애창곡인 남진의 ‘둥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너 빈자리 채워 주고 싶어···.
그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버지께서 무너지셨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핸들을 꽉 움켜쥐신 채, 얼굴을 파묻으신 채로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셨다. 언뜻언뜻 엿보이는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물이 그 위를 따라 연신 흘러내릴 따름이었다.
본래 감정은 짙은 전염성을 띠고 있기 마련이지 않던가? 어머니 역시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셨다. 하나, 다행히 두 분의 흐느낌이 신나는 노랫가락에 파묻혔다. 미리 삽입해 둔 CD는 일련의 배려였다.
소리죽인 채 흐느끼고 계신 두 분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만약 당신들의 하나 남은 꿈이 나의 성공이라면. 그 꿈을 어떻게든 이뤄드리겠노라고. 아니, 그냥 적당히 이뤄드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말 제대로 이뤄드리겠노라고.
필상이 짙은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그때, 아버지께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신 채 재차 말씀하셨다.
“필상아··· 나는··· 정말···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구나···.”
그 말에 필상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참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둑의 장벽이 허무하게 허물어지고, 갇혀있던 물이 한 번에 범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터져 나왔다.
아버지께서 흐느끼다시피 꺼낸 말에 담겨있는 진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본인의 이름 석 자를 잊더라도, 오늘만큼은 절대 못 잊으시리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나의 삶 전반을 함께 한 사람. 내가 겪은 거의 모든 처음을 지켜봐 준 사람. 훌륭한 스승, 최고의 친구.
그런데 기이하게도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가슴이 저려오는 사람. 내게 있어 아버지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